설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보일 때까지 - 빌립보 3:1~14[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8-18 13:42
조회
6137
2019년 8월 18(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보일 때까지
본문: 빌립보 3:1~14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유럽 땅에 처음으로 세운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다른 서신들이 논쟁적인 데 반해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와 찬사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례적으로 논쟁적인 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편의상 1절부터 그대로 읽었습니다만, 사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1절 상반부는 앞의 2장 말미에 연결된 종결구로 보는 게 좋습니다. 거기까지 내용이 기쁨의 서신이었다면 1절 하반부터는 투쟁의 서신이라 할 만큼 그 성격이 확연히 구별됩니다.
먼저 바울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계속 되풀이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가 혹시 빌립보교회에 불편함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며, 그 되풀이가 자신에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며, 빌립보교회의 안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되풀이된다는 사실 때문에 중간에 또 다른 서신이 있지 않았나 추정케 하지만, 그 되풀이가 꼭 서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두로 전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떼고 난 다음 바울의 이야기는 거친 직격탄입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악한 사람들을 개들이라 칭하며 그들을 조심하라고 일갈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만 이 ‘개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의 욕설로서 무지한 자들, 불신자들, 이방인들을 나타냅니다. 사도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욕설입니다. 이렇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이 빌립보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인 교회인 빌립보교회에서 할례를 주장한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여기서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할례가 평화적 공존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던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과 결혼할 때 할례를 하는 것은 공동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방인 출신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할례는 종종 유대인들에 의해 만류되기도 했습니다. 할례는, 유대 정통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선민의 표징으로서만이 아니라 그저 공존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그 까닭에 이방인들 가운데도 할례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일부가 빌립보교회에 합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바울의 공격은 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격한 말투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교회 안에서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할례를 정신화하는 것이었습니다(3절 이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속적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몸에 할례를 하는 것을 구원의 표징으로 삼는 태도, 곧 율법에 매인 삶의 태도에 한정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의미에서 자랑거리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4절 이하). 다시 말해 바울은 율법의 준수라는 차원에서 말하면 옛날에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명한 대로(창세 17:12)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하였고,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베냐민지파 사람이며, 히브리인 가운데 히브리인이며, 율법준수에서는 가장 철저한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히브리’는, 종종 이방인들이 경멸적 의미를 깔고 있는 ‘유대인’과는 달리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자긍심 내지는 언어 또는 문화적인 자긍심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개념들입니다. 베냐민지파는 바울의 예전 이름과 동일한 사울 왕이 속했던 지파로서, 여기에서는 바울 자신이 이스라엘의 순수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깟 할례한 것(정확하게는 ‘자르는 것’) 하나 가지고 자랑거리로 삼는 이들에게, 자기로 말할 것 같으면 그보다 훨씬 자랑거리가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현재의 자신을 하나의 모범으로 내세웁니다(7절 이하).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 때문에 그간 자신에게 이로웠던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다마스커스 사건을 회상하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전폭적인 결단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 결단이 가능했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결단을 강조합니다. 그 결단은 그야말로 전적인 가치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8절 이하의 말씀은, 편지를 쓰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앞의 7절과 같은 내용을 다시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잃은 모든 것을 단지 오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소중한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오는 의,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전적인 삶의 전환을 뜻합니다. 기존의 자신의 삶을 떠받쳐 주는 조건에 의지하거나 그에 의존한 주관적 욕망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의를 따르고자 하는 삶입니다. 이 열망을 말하는 데서 바울의 어투는 일관되게 자신의 선택과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죽으심을 본받고 마침내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10절 이하). 바울은 여기서 최종의 목적으로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피력합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완전하게 자신을 비워버린 죽음의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때 부여받습니다. 역설의 진실입니다.

예수님과 실제 삶을 공유한 적도 없고, 게다가 그 선포하는 말씀마저 예수님의 삶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고 십자가와 부활만을 역설한 바울이 예수님의 진정한 사도가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보다 다소 늦게 쓴 고린도전서(1:27~28)에서 같은 뜻의 말씀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기존의 질서에서는 어떤 이름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던 사람들, 이름을 가졌더라도 그저 배제와 혐오의 대상으로만 불렸던 사람들을 당당한 삶의 주체로 세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급진성을 뜻하며, 새로운 인간의 탄생,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직접 삶을 나누지는 못하였지만, 그 진실을 일체 몰랐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 그 진실을 보다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사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그렇게 엄연한 존재를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권력과 그 권력에 의해 지탱되는 현존하는 질서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완전하게 부정당한 그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나 빛나는 존재가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부활의 사건입니다.
엉터리 합의로 ‘소녀상’을 철거하도록 강요하고, 전시장에 놓인 ‘소녀상’을 가려버린 것으로 끝이 납니까? 오히려 온 세계 도처에 소녀상이 세워지고, 그 소녀상과 함께 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의 사건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소녀상이 대변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진정한 사과를 받고, 나아가 그 어떤 폭력에 의해서든 마땅한 권리를 유린당한 모든 여성들이 당당한 삶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사건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그 궁극적 목적에 이르는 여정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3:12)
이 이야기는 바울 자신의 고백일 뿐 아니라, 바울이 겨냥하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를 동시에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개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어댈 만큼 바울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의 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로서 율법에 매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바울이 보기에 악한 일꾼들이었습니다(3:2 참조). 여기서 드러나는 이들의 입장은 스스로 완전한 목표에 도달하였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에 매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앞의 진술을 전제하면 율법에 의한 성취를 강조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충실성과 동시에 그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 그리고 그렇게 불릴 만한 어떤 외적 표지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으로 온전함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사태입니다. 끊임없이 남을 정죄하는 데 익숙한 기독교인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만 목표를 향해 달려갈 뿐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바울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그와는 상반된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예수께 사로잡힌 바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한 목표에 도달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자각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최종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바울의 공격을 받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그 목표에 도달한 듯 허세를 떨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아시는 대로 일본에서 오신 손님들을 모시고 안내하는 중,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들렀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 『직지(直指』가 인쇄된 흥덕사 터에 세워진 박물관입니다. 유키네 가족이 하도 꼼꼼하게 살피기에 따라다니며 저도 꼼꼼히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직지(直指』핵심 되는 내용을 한 벽면에 우리 말로 새겨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지랑이는 본래 물이 아닌데, 목마른 사슴은 알지 못해 부질없이 헤매인다. 자신이 어리석어 진실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헛되고 헛되다 하네. 진리는 원래 형체도 없어 집착이 없고,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네. 어느 날 스스로 성품이 원래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 열병에 땀을 낸 듯 후련하리... 흐린 날 비 쏟아져 물에 고이더니... 물 위에 동동 거품이 일어나는 것이 보이네... 앞의 것이 이미 사라지는가 하더니 뒤의 것이 다시 생기고... 앞과 뒤가 서로 이어져 진리에 닿을 지니...”
지금 알고 있는 것, 지금 성취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벗어나 끊임없이 진리를 향하여 정진할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위대한 통찰은 이렇게 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과연 어떤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궁극적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나가는 그 태도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어떤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 멋대로 누군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저 궁극적 목적을 행해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막연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진짜로 제대로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목적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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