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위대한 순간, 바울의 전향 - 사도행전 9:1~19[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9-08 14:08
조회
5878
2019년 9월 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위대한 순간, 바울의 전향
본문: 사도행전 9:1~1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편화하는 데 그 기초를 닦은 장본인입니다. 갈릴리 예수사건이 사도 바울을 거치지 않았다면 오늘 그 사건의 위대성이 세계인에게 알려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 바울이 재해석한 예수사건의 의미를 수많은 기회를 통해 음미해왔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삶의 전환이 이뤄진 그 결정적 계기를 전하는 성서 본문말씀은 오늘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회심’, ‘바울의 개종’, 또는 ‘바울의 전향’ 등 매우 다양하게 불리는 그 사건은 일단 ‘다마스쿠스(다메섹)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열렬한 박해자였던 사람이 그 정반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열렬한 사도로 변모하게 된 계기입니다.

이 사건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그 실체를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물론 성서가 증언하는 그대로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바를 다시 환기해볼까요?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샅샅이 찾아내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고 다마스쿠스로 향한 사울은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환하게 비쳐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대체 누구시냐고 묻는 물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다마스쿠스에서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십니다. 그런데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음성은 들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일로 사울은 눈이 어두워져 겨우 사람들에게 부축을 받아 몸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시력을 잃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아나니아가 나타나 세례를 주고 눈을 뜨이게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자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거듭나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이 보도를 그대로 믿으면 간단할 것 같지만, 그대로 믿기에는 난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9장 말고도 다른 두 곳(22:6~16, 26:12~18)에서 이 사건을 반복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한 묘사가 조금씩 다릅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은 동행자들이 소리는 들었으나 빛은 보지 못했다 하고, 두 번째 본문은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고, 세 번째 본문은 빛을 보았다는 암시와 함께 모두 함께 엎드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셋째 보도는 아나니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반면 첫째 보도와 둘째 보도는 아나니아가 등장하는 장면을 전혀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는 사건기록에서의 차이지만, 정작 바울 자신이 기록한 친서를 볼 것 같으면(갈라 1:17; 고전 9:1; 15:8) 그 사건의 실체는 더욱 아리송해집니다. 어렴풋하게 암시되어 있을 뿐 사건의 실체는 알 수 없습니다. 굳이 핵심을 짚는다면 ‘내가 예수를 만났다’는 것 정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가 이 사건을 전하는 사정이 이러한데, 이를 어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이 역사에 개입하신 데 대해 사울이 그에 대해 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개입한 사건과 한 인간이 응답하는 사건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를 받아들인 한 인간의 태도와 그 정황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은 역사내적 차원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장 열렬한 그리스도의 박해자가 가장 열렬한 그리스도의 전도자로 변화되었을까 하는 것을 헤아려 봄으로써 이 사건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사울은 어째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유대교의 가르침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도(道)’가 다르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를 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기반을 뒤흔들 만큼 위험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뭐가 그렇게 달랐을까요?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와 구별된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한 부류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첫째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해야 한다는 믿었습니다. 둘째 그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된 백성으로 삼았다고 믿었습니다. 셋째 그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백성에서 계시된 율법을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기왕의 분파에 따라 구체적인 믿음의 내용에 차이가 있기는 했습니다. 예컨대 부활과 관련하여 당시 최상위층에 속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믿지 않은 데 반하여 사울이 속하였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를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에 관해서도 믿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친히 악한 세상을 심판하고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믿음과 훗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믿음은 많은 부분에서 공유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달랐을까요?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정적으로 유대인 바리새파 사람인 사울이 지키고 있는 믿음에 손상을 가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첫째로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정통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까지도 받아들여 함께 식탁을 나눴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당시 정통 유대인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백성을 구원할 메시아는 마땅히 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그 만한 위엄을 갖춘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 차원에서 거리낌을 뜻했습니다. 유대인의 통념상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저주받아 죽은 자에 불과했습니다(신명 21:22~23). 또 다른 한편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범에게 부과된 가장 잔혹한 처형이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반역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제국에 맞서 직접 저항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그 지배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은 처절한 패배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수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을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이 사울에게 용납될 리 없었습니다. 그 믿음을 따르는 이들이 유대사회 안에 공존하는 한 선택받은 백성의 거룩함은 무너지고,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받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사울은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마스쿠스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변모했습니까?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나섰습니다. 선민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무너뜨렸습니다. 자신은 정통 유대인 엘리트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기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유대적인 의미에서나, 그리스적인 의미에서나, 로마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편에 섰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고수해왔던 ‘거룩함의 정치’를 팽개치고 ‘사랑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게다가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웠고, 그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가장 핵심적인 믿음의 진실로 역설하였습니다. 바울에게서 십자가는 기존의 모든 상식, 기존의 모든 정당성, 기존의 모든 합리성의 중단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대미문, 전인미답의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표지로서 십자가를 우뚝 세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 조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을 ‘넘어서는’ 데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표방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 십자가를 내세웠을까요? 예수의 삶을 공유하지 못했던 사람으로서 약점을 덮을 수 있는 전략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야말로 예수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가장 응축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버린 하나님, 가장 높고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오셔서 아무것도 아닌 자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예수의 삶을 그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울이 어떻게 그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실마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건의 실체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재구성하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사울이 이 사건을 통해 겪은 체험의 실체를 가늠해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헤아려봐야 할 요소들이 많지만, 크게 두 가지 점을 주목하면서 그 체험의 실체를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이 사건을 통해 사울이 예수를 만났다는 점이요, 둘째는 이를 계기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점입니다.

첫째로 사울은 광채 속에서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의 주인공을 곧바로 예수로 인식합니다. 사울은 예수를 박해한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은 “왜 나를 피박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과 예수의 연속성, 동일성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여전히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현존해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예수의 삶을 몰랐기에 십자가, 곧 죽음과 부활을 역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대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직접 예수와 삶을 공유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계속되는 예수의 삶을 사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몰랐으면 박해도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는데,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기에 박해를 한 것입니다.
광채와 음성 가운데 그 예수께서 사울 앞에 임재하셨습니다. 이를 예사롭게 여기기 쉽지만, 사울이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갈릴리 예수사건 이후, 그 사건의 의미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다시 말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데는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사도 2:1~13), 그리고 사울이 체험한 다마스쿠스 사건일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 사건의 주체는 성령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가 전하는 놀라운 사건의 주체는 항상 성령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런데 다마스쿠스 사건의 주체는 예수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셨다고 해도 좋고, 예수의 영이 임하셨다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굳이 예수께서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른 데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의 실체를 온전히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이후 낙담한 제자들에게는 그 죽음의 의미가 영적 차원에서 승화되어 되살아나는 부활의 체험이 절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실제로 가장 낮은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예수의 삶의 실제를 직시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더욱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 한 바울이 경험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라는 ‘타임머신’을 탈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지속되는 예수의 삶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자기에게 요구되는 삶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 극적인 사건과 더불어 눈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사흘간 어둠 가운데 있다가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진정한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 거듭남의 사건에서 아나니아는 조력자로서 등장합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고 했는데(갈라 1:17),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광야에서 겪은 체험을 연상시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예수의 삶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난 예수께서는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9:15)
바울은 유대인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어와 아람어를 구사했고, 히브리어를 알았으며, 라틴어까지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자신에게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자랑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사람들, 그 주요 지도층에게 이방인 선교는 중요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전히 선민 가운데 전파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의 삶 자체가 이미 모든 경계를 무너뜨렸다고 인식한 것입니다. 삶 자체가 그것을 이미 보여주셨고, 십자가는 그 극한을 보여주신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가장 극한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셨다면, 그 사이에 어떤 경계도 있을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동시에 화해의 표징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죄를 만들어내고, 적대감을 만들어내는 그 모든 조건들을 걷어치우도록 만드는 진정한 화해의 표징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해 예수의 삶의 진실을 온몸으로 새기고, 그로부터 바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진실을 온전하게 직면하게 된 빛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바울은 세계를 이전에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그와 달리 전적으로 거꾸로 보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세계관의 혁명을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꽉 차 있는 하나님, 완벽한 하나님, 실상은 꽉 찬 욕망,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의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은 하나님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을 비워 버린 하나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완전히 비워버린 자신의 삶으로 전환을 뜻합니다. 자신이 가진 조건과 능력이 어떻게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특권을 보장했던 그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는 데,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당당히 그 존재를 인정받고, 권리 없는 사람들이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삶을 누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데 헌신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의 인의론은 그 세계의 구현을 요체로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그 세계에 대한 희망, 그 세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퍼트려나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도’를 따르는 데 낙심하지 않고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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