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믿음, 사죄, 치유 - 마가복음 2:1~12[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0-27 18:38
조회
127
019년 10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믿음, 사죄, 치유
본문: 마가복음 2:1~12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보여준 치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치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풍병 환자를 치유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되, 그 사건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믿음과 사죄 또는 용서, 그리고 치유가 복합적인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의 의미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1:14~15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증언에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오늘 본문말씀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구체화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이야기를 환기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고, 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습니다. 문 앞에조차 들어설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중풍병에 든 사람을 네 사람이 데리고 왔습니다. 네 사람이 들것에 싣고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기록으로 보면, 사람들 때문에 예수께 접근할 길이 없어 예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를 달아 내렸다고 합니다. 본문말씀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는 고대적 관념이 배어 있습니다. 질병은 그냥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고 모종의 악마에 사로잡힌 상태라는 관념이 배어 있습니다.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지붕을 뚫고 이동한 것은 악마를 속이는 행위로서 도망갈 출구를 차단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들어온 곳으로 나가야 하는데, 지붕을 뚫고 들어온 다음 지붕을 막아버리면 악마가 도망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붙잡히는 상황이 된다는 관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써서 예수께 접근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살짝 바꿔놓고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는 질병에 관한 고대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달한 사람들과 환자를 보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높이 샀습니다. 치유의 기적 사건을 전하는 복음서의 내용을 보자면, 항상 예수께서는 그 사건 당사자들의 믿음을 주목합니다. 그 기적의 사건이 일방적으로 펼쳐진 것이 아니라 상호교감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이 당신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때는 기적을 보이지 않지만, 민중들의 절박한 요구 앞에서는 그들의 요구에 지체 없이 응하십니다. 믿고 내 맡기는 태도에는 지체 없이 응하십니다. 기적 사건의 바탕에 진실한 인격적 교감, 상호간의 소통과 교감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적 자체가 그 결과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믿음을 확인한 예수께서는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사죄의 선언, 용서의 선언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율법학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사실은 깜작 놀란 것입니다. 사죄의 특권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으로, 또한 사제에게 허용될 때에도 반드시 희생제물과 더불어 엄격한 제의를 동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 유대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대 유대인들의 통념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있기에 그 사죄의 권한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마가는 분명히 그렇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그 기억이 함축하는 진실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을, 마가는 이렇게 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사람들을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킨 예수님의 역할이 갖는 의미를 더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당신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중풍병 환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그 병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 병에 대한 치유를 선포하는 것이 당장 절박한 요구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질병의 치유 능력을 가진 이로서 그렇게 질병의 치유를 선포하는 일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는 것을, 마가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졌다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어떤 감동이 있을까요? 종교적 도그마의 틀에서 반복하여 새기는 의미 말고, 정말로 저마다의 삶의 실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중풍병 환자에게는 어땠을까요? 이미 굳어진 종교적 도그마의 틀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 맥락 안에서 과연 어땠을까 하는 것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고대세계 안에서 질병은 단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려야 합니다. 육체의 질병은 악마에게 붙들린 상태이거나 신의 징벌을 받은 상태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육체 그 자체의 현상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은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당시 통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질병을 겪고 있는 사람은 어떤 처지가 되었을까요? 육체적 질병 그 자체도 괴롭거니와 더더욱 괴로운 것은 질병을 겪고 있는 자신을 향한 사회적 시선입니다. 뭔가 잘못한 죄인,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시선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질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예수님의 선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그 질병이 하나님의 징벌로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죄의 선언, 용서의 선언은 사회적 편견과 그 편견에 따른 차별의 시선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질병 그 자체보다 더 근원적인 사회적 질병,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병들게 만들고, 괴롭게 만드는 사회적 질병 그 자체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선포합니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이를 보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진정한 치유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질병의 치유는 단지 기술적 치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반적인 삶을 치유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면 삶의 환경 자체를 개선하는 일까지 동반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육체적 질병을 낳는 근본 원인, 육체적 질병의 고통을 더욱 강화시키는 근본 원인을 주목하고, 그로부터 사람을 해방시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그 진실은, 오늘 본문말씀에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마가 2:13~17)을 통해 다시금 확인됩니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탁을 함께 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를 보고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밥을 먹을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응수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을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그 선포와 치유 행위는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을 겪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그 어떤 불편한 시선으로 가중되는 괴로움을 겪지 않고 당당하게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사회와 주변의 인간관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 삶의 의미는 더욱 빛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어떤 한계 상황과 고통의 상황을 겪을 수 있다고 자각하고 있는 사회는 훨씬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사회는 그 만큼 성숙하고 안전한 사회입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겪는 한계 상황과 고통의 상황은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은혜를 체감케 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의 한계와 고통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요한 9:1~3 참조).

예수께서는 치유의 기적 사건을 통하여 그 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그렇게 이뤄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한편의 사람들이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그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누군가를 정죄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늘나라를 사는 삶을 이루는 데서 그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사는 데서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강조했던 개신교 신앙은 본래 그 생동성을 상실하고 딱딱하게 굳은 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도대체 삶과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박제화된 교리의 틀 안에 갇힌 예수 그리스도를 해방시켜 우리의 삶 가운데로 초청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소통하고 교감하는 예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부당하게 당하는 편견을 걷어내고 자유를 누리게 하신 예수,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진실을 새기며, 그 진실을 구현하는 삶을 살기 위해 다짐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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