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성서 밖의 성서 01] 신약 외경의 세계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1-20 21:30
조회
901
2019년 하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2019년 11월 20일~27일 2주간 수요일 오후 7:00~8:30
최형묵 목사

<1> (11/20) 성서 밖의 성서 01: 신약 외경의 세계

1. 정경(正經), 외경(外經), 위경(僞經)

1) 정경(正經, Canon)
하나님의 말씀이라 인정하여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성경을 말한다. 구약의 정경 범위는 교파마다 차이가 있지만 신약 정경의 범위는 기독교의 모든 교파가 27권을 인정하는 점에서 공통된다.

2) 외경(外經, Apocrypha)
‘감추어진 것들’이란 뜻의 외경은 정경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이 확정된다. 교부 제롬은 외경을 ‘이단적’이라기보다는 ‘비정경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공적으로, 즉 예배나 교리 확증의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지만 개인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서는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해는 초대교회의 여러 교부들에게도 공유되었고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이어졌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읽어서 유익한 책으로 보았으며 종교개혁 당시 성경을 출판할 때에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넣어 출간하였다. 구약 외경 말고도 주후 2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기록된 신약외경들도 많다. 정경의 지위를 얻지 못했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책들이다.
(1) 복음서: 도마복음서, 베드로복음서, 니고데모복음서, 나사렛인들의 복음서, 히브리인들의 복음서
(2) 행전: 요한행전, 안드레행전, 바나바행전, 바울행전, 빌립행전, 도마행전
(3) 서신: 고린도3서, 바울과 세네카의 서신, 라오디게아서
(4) 묵시문학: 바울묵시록, 베드로묵시록, 도마묵시록 등.

3) 위경(僞經, Pseudepigraha)
‘위조한 경전’이란 뜻의 위경은 정경과 외경에 속하지 않은 그 밖의 성서‘류’의 책을 말한다. 이 책들이 위경으로 불리는 까닭은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위인들의 이름을 저자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날 ‘위조’ 또는 ‘위작’과는 달리 전근대사회에서 어떤 저술에 과거의 위인 이름이 저자로 붙여진 경우는 허다하다.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책들도 상당수가 그렇다.

4) 사도 교부 총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여러 교회에 보낸 서신들로, 27권의 정경이 확정되면서 그 권위를 잃은 책들이다. 17세기에 집대성되었다. 디다케, 헤르마스의 목자, 클레멘스의 편지, 바나바의 편지,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록 등이 잘 알려져 있다.

2. 한국교회와 외경

한국교회의 외경에 대한 태도는 매우 극단적이다. 비록 정경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신앙적 유익성을 말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와 달리 한국교회는 외경 자체를 아예 경원시해 버렸다. 대다수 평신도들은 외경 혹은 위경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이다. 이러한 풍토에는 축자영감설을 한 기축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앙이 큰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한국 장로교가 표준적 교리로 여기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의 영향은 지대하다. 그 신앙고백문의 외경규정은 이렇다: “보통 외경이라고 부르는 책은 영감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며 경전의 일부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권위가 없다. 또한 다른 인간적 저서보다 더 사용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3. 정경화의 과정, 그리고 외경의 의의

오늘날 신약 정경 27권의 목록이 처음 등장한 것은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서한에서였다(* 참고. 니케아공의회 325년). 이후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를 지지하였고, 세 차례의 공의회(393, 397, 419)를 통해 27권을 신약 정경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최종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은 1439~1443년에 열린 피렌체공의회를 통해서였다. 동방교회에서는 오랫동안 각 지역교회별로 다양한 입장을 취해 왔는데, 1672년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성서에 관한 한 서방교회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고 천명하였다.
이 정경화에 적용된 기준은 신앙의 규범, 고대성, 사도성, 보편성과 권위성 등이다. 그러나 이 기준에 따라 초기 교회의 여러 저작들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즉 정경과 외경의 경계가 칼로 무 자르듯 분명한 것은 아니다.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정경 밖의 문서들도 자주 인용하기도 하였다. 정반대로 종교개혁자들은 정경 안에 들어 있는 일부 책에 대해서 그 가치를 의심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정경과 외경의 구분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유연하게 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정경화에 대한 믿음은, 고정된 본문은 고정된 하나의 의미를 표현한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성서 본문은 결코 하나의 의미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성서 본문 자체가 다양한 입장과 목소리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의미는 해석자의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된다.(본문 상황의 다양성과 해석자 상황의 다양성 / “성서해석은 곧 삶의 해석이다”). 우리는 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성서 본문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성서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말씀으로 살아난다.
진리 판별의 기준은 교회의 권위도 아니고, 이미 ‘고정된 문자’로서 성서(외적인 말씀)도 아니다. 근원적 의미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이 진리를 판별한다. 우리는 삶 속에서 그 영적 분별력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방법을 추구할 따름이다. 외적 권위에 의한 진리 판별 기준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 기준의 붕괴로 혼란과 진통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진리의 혼란은 아니다. 진리는 끊임없이 찾아나가야 할 그 무엇이다.
외경은 그저 경원시되어야 할 책은 아니다. 풍요로운 신앙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지혜의 보고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진리를 탐구해가는 여정에서 그 책들 역시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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