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증언 출간에 붙여: 기장 선교교육원의 역사적 의의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2-03 23:02
조회
840
서대문 민중신학교 북콘서트
2019년 12월 3일(화) 오후 5시
기장 선교교육원 강당



기장 선교교육원의 역사적 의의

최형묵(한국민중신학회 회장/ 기장총회 교회와사회위원장 / NCCK 정의평화위원장)

1. ‘변명’

안병무 선생은 <민중신학 이야기>를 펴내면서 그 첫머리를 ‘변명’으로 시작하였다. 나는 그 책에 수록된 내용의 처음 녹취록을 작성하는 몫을 맡았기에 각별한 감회를 느끼지만, 오늘의 발제도 변명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그저 책 한 권에 대한 서평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공지된 것을 보고서야 알았으니 돌이킬 수도 없었다. 도리 없이 감당하게 되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맡기신 것일까? 기왕지사 감당해야 하는 마당에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이 주제를 맡은 입장에서는 맡겨주신 분들로부터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혹스러운 사태(?)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근래에 묘하게도 1970-80년대 선구자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과제를 연이어 맡게 되었다. 민중신학도로서 기왕에 서남동 선생과 안병무 선생 등 선구자의 신학사상을 탐구해온 터에 최근에는 문익환 목사, 김찬국 교수, 박형규 목사 등의 신학사상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현장을 바삐 뛰어다니며 신학적 성찰을 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당대의 문제들을 주제로 삼고 싶은데, 그 기대와는 달리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평가하는 과제가 연이어 주어지고 있다. 내 전공이 역사학도 아니고 윤리학인데도 말이다.
이를 도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역시 굳이 내가 맡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고서야 어찌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아마도 세대와 세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맡으라는 뜻이 아닐까?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를 잇는 역할을 맡는 것이라면 기쁘게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거 위대한 세대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그 유산이 갖는 의미를 밝히고 그 뜻을 미래세대에 전하는 데 한 몫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 14:7) 마치 이 말씀의 의미처럼 다가온다. 당대 민중들의 문제를 회피하라는 뜻이 아니라, 카이로스적 사건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결정적인 한 사건을 체험하고 30~40년이 지난 후 사도들이 서신을 써야 했고, 복음서를 기록해야 했을 때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 다시 새겨보게 된다.
오늘 발제를 맡은 사람의 변명만은 아니다.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증언>을 엮어낸 분들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2. 저 담장 안에서 무슨 일이?

내가 ‘서대문민중신학교’, 곧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위촉생교육과정’을 알게 된 것은 바로 담장 옆 골목길을 사이로 한 한국기독교장로회청년회전국연합회(기청)에 나다니면서부터였다. 대학 2학년 때, 그러니까 1982년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빵잽이’ 선배들이 계속 공부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수업에 관한 이야기도 종종 들었고, 뭔가 과제물을 작성하느라 부심하는 듯한 모습을 본 적도 있다. 하여간 뭔가 특별한 학교가 바로 담장 너머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교교육원 그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대략 알고 있었다. 선교교육원의 고유한 업무로서 위탁생교육과정과 선교대학원, 그리고 교재편찬 등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당과 기숙사에서는 숱한 모임들이 진행되었다. 각종 그룹들의 수련회 모임 등이었다. 교회들의 수련회도 있었지만, 아마도 다수가 청년학생운동 및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모임들이었다. 정체가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모임의 경우, 기청에 살짝 귀띔하고 기청의 모임으로 해둔 경우도 허다했다. 기청에 속한 청년학생들은 자기 집으로 알고 드낙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기간 내내 청년들에게도 그곳은 수시로 먹고 자고 마시며 공부하는 공간이었다.
서남동 선생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뵙게 된 것도 그렇게 그 집을 드낙거리면서였다(* 이하 서남동 선생에 대한 기억은 “내가 만난 서남동 - 그저 옷깃을 만져봤을 뿐이지만”의 일부를 맥락에 맞게 재구성). 초대 원장을 지내셨던 안병무 선생과의 인연은 1985년 대학졸업 후 한신대 대학원을 진학하고 한국신학연구소의 민중신학 공부모임에서 말석을 차지하면서 부터였지만, 1982년 어간에는 서남동 선생께서 제2대 원장으로 재직중이어서 그 때 비로소 가까이 뵐 수 있었다. 1981년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하면서 서남동 선생께서 복직하여 직접 배우게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1984년 4학년 2학기 복직을 앞두고 그해 7월에 서거하셨기에 수업을 통해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나마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81년 어느 날 기독교회관의 강연회에서였다. 그때는 그저 신학 초년생으로 먼 발치에서 바라만 봤을 뿐이다. 그런데 대학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쯤, 그러니까 1982년말에서 1983년초 어느 시점에 드디어 가까이 뵐 수 있게 되었다. 선교교육원에서 기청 모임을 갖고 있을 때였다. 서남동 목사께서 들르셔서 청년들을 격려해주셨을 때 온화한 얼굴빛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때 긴 말씀은 없었고 그저 격려의 말씀을 주고 가셨는데, 나로서는 가장 가까이 뵐 수 있었던 기회라 ‘아, 바로 이분이구나!’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 때는 그렇게 뵐 수 있었던 것만으로 영광이었다.
마지막으로 뵌 것은 1984년 돌아가신 해 벽두 설날 일단의 청년들과 함께 세배하러 간 자리였다. 연세대학교 구내 낡은 교수사택에서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생께서는 거실에 혼자 계셨고, 탁자를 보니 이미 다른 손님들이 다녀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에 띈 건 포도주였다.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우리들에게도 포도주 한 잔씩을 권하셨다. 젊은 마음에 선생님 댁에 포도주가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신선했는데,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잔을 받게 되어 더욱 영광이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여 적지 않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 그런데 젊은이들 앞에서 민중신학자로서 삶의 여정을 말씀하실 때 귀가 번쩍 띄는 이야기가 있었다. 민중신학자로서 당신께서 ‘크리스찬 맑시스트로 살아왔다’고 말씀하신 대목이었다.
내가 그 대목에서 귀가 번쩍 띈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기청을 통해 기독청년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때가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진입하는 시점이었으니 학생운동에서 ‘고참’급이 된 즈음이었다. 그 때 가장 큰 고민거리가 ‘신앙’과 ‘운동’의 관계였다. 나로서는 신앙과 운동의 행복한 만남, 그 종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지만 당시 기독청년학생운동에서 그 문제는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신앙과 운동의 관계는 막연히 추상적 차원에서 문제시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급진적 학생운동은 과학화되는 경향을 띠면서 사실상 맑스주의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인식은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이해에 비춰볼 때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여기서 이른바 기독청년학생운동의 ‘아이덴티티 논쟁’이 제기되었다. 그 문제는 그렇게 운동진영의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그 운동에 참여한 기독학생들에게는 실존적인 문제가 되었다. ‘운동’을 선택하면 ‘신앙’을 포기하고, ‘신앙’을 선택하면 ‘운동’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즈음 나는 그 실존적 고민에 빠진 여러 후배들을 붙잡고 양자의 병존과 종합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설득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서남동 선생으로부터 스스로 ‘크리스찬 맑시스트’라는 고백을 직접 듣게 되었으 니 그것은 마치 ‘복음’과 같이 들렸다. 이미 서남동 목사의 후기 저술에 그와 같은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기에 나는 선생의 신학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스스로 명시적으로 실토하신 것은 처음 듣는 터여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이해하는 바 그분의 신학에 대해 더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도 그 신학의 방법은 내가 신학적 사유를 펼치는 데 여전히 중요한 하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어쨌거나 그 날 그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던 탓인지 그 다음 상황은 어찌 되었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그 말씀만 강렬하게 남아 있다.
서남동 선생님은 1984년 그 해 서거하셔서 다시는 직접 뵐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그 이후 그분의 유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작업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기독청년학생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에게 친숙한 『해방공동체』집필 작업이었다. 『해방공동체』는 기청 성서연구위원회 이름으로 펴낸 성서연구 교재였고, 그 교재가 나왔을 때 기독청년학생들의 필독서처럼 되었다. 그런데 그 교재가 탄생하게 된 기원이 사실은 서남동 목사님에게 있었다.
당시 기청에서는 청년들을 위한 성서교재를 선교교육원에 요청하였다. 선교교육원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수준급의 교재를 펴내고 있었고, 또한 성인을 위한 구역교재 등을 펴냈으나 청년을 위한 교재는 없었다. 그래서 청년들을 위한 교재를 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인데, 당시 선교교육원장이었던 서남동 목사께서 청년들 스스로 작업을 해보라고 제안을 하셨던 것이다. 청년들 스스로 작업을 시도하면 선교교육원이 뒷받침하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그래서 기청에서는 성서연구위원회를 꾸려 청년을 위한 성서교재 편찬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것이 1985년이었으니 서남동 목사께서 제안하신 그 작업에 대한 지원은 후임 원장인 박근원 목사 때에 이뤄지게 되었다.
아마도 서남동 목사께서 청년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맡기지 못했을 것이다. 청년학생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민중운동이 절정기를 향하고 있던 그 즈음 청년들 스스로 생생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성서를 다시 조명해보라고 맡겼기에 그 책은 탄생할 수 있었다. 당시 정호진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름을 열거하면 알 만한 여러 젊은이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수년에 걸쳐 선교교육원에서 밤을 지새가며 작업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절 신학적 사유의 방식을 형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그 중요한 일이 나에게는 서남동 목사님과의 인연의 한 고리이기도 했고, 선교교육원과의 각별한 인연의 계기이기도 했다. 숱한 밤을 새우면서 했던 모든 작업이 선교교육원에서 이뤄졌으니 나에게서도 그 공간은 청춘을 보낸 중요한 자리였다.
‘서대문민중신학교’, 그 역사적 사건의 현장은 나의 체험과 기억 가운데서도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3. 전설이 역사가 되다

오랫동안 ‘서대문민중신학교’는 일종의 전설이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지만, 그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마치 전설처럼 전해져 왔다. 그 당사자들이 현존하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도 최근까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은 있지만 그 전모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을 전해들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승된 기억의 파편을 엮어 마음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설이었다.
그 전설이 드디어 역사가 되었다.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그 전설이 역사가 되었다. 전설처럼 들려오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확연하게 확인되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여전히 생생한, 그야말로 날 것의 증언과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억의 증언이 한 책으로 엮어진 까닭에 이를 대하는 사람은 그 역사적 전모를 충분히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체험의 의의는 당사자들의 삶 가운데 육화되어 왔겠지만, ‘서대문민중신학교’로 명명된 실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이 책의 출간은 그 역사적 평가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하여 그 의의가 보편화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서대문민중신학교’는 이제 체험 당사자들만의 기억과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의 공동의 유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실체를 조금 알고 있으면서도 또 조금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의의를 평가하는 발제가 맡겨진 것도 그 작업을 본격적으로 개시하라는 뜻일 것이다.

오늘 ‘서대문민중신학교’로 명명된 과정은, 1976년부터 1985년까지 10년간 진행된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위촉생교육 과정’을 말한다. 애초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총회의 결의로 한신대학에서 제적된 학생들에게 신학수업의 기회를 부여하여 목회자 예비과정을 보장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 유신체제의 정부당국은 ‘문제학생’을 제적시켜 인생을 망치려고 했지만,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는 그에 반하여 애초 목회자의 뜻을 두고 있는 학생들의 장래를 보장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후 곧바로 문호가 개방되어 한신대 제적생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제적생들도 입학이 허용되어 그야말로 역동적인 교육과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교과는 신학 2, 사회과학 1, 현장실습 1 비율로 구성되었고, 일정 과목과 교수 선정은 학생들의 결정에 따랐다.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증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총 10년간 123명의 학생이 등록하여 49명이 수료하였고, 총 52명의 교수진이 함께 하였다. ‘쫓겨난 이들의 학교’, 학생은 물론 교수들도 대부분이 해직된 이들이었다. 거기서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1) 민중신학의 산실: 거시적 맥락에서 볼 때 민중신학이 민중사건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민중신학자들이 증언하듯이 전태일 사건이 민중신학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신학적 담론으로서 민중신학이 형성된 데에는 여러 가지 계기들이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신학자 자신의 경험과 통찰이 동반되어야 했고, 또한 신학자의 성찰이 소통되는 구체적 현장이 동반되어야 했다. 그 소통의 현장은 그 언어를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그러기에 끊임없이 그 언어를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되는 자극의 기회가 주어지는 공간이다.
한국의 민중신학이 새로운 신학적 성찰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가다듬어지기까지는 여러 거점들이 있었지만(한국신학연구소, 갈릴리교회, 크리스챤아카데미, 기독자교수협의회 등등), 아마도 그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곳이 바로 ‘서대문민중신학교’가 아니었을까? 이른바 위촉생 교육을 위하여 선교교육원이 세워지고 안병무 선생께서 그 초대원장을 맡고 이어 서남동 선생께서 원장을 맡은 것도 의미심장하거니와 여기에 함께 한 학생들과 교수진들은 당대 가장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민중신학은 단지 신학적 성취에 한정되지 않고 민중에 대한 여러 학문 분야에서의 조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대문민중신학교’는 그 구성원이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2) 민중교회의 원점: ‘서대문민중신학교’를 민중교회 탄생과 관련하여 배타적인 하나의 원점으로 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적 문제의식으로 교회를 새롭게 형성하려고 하였던 민중교회 운동의 역사에서 ‘서대문민중신학교’의 배경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곳에서는 교수와 학생간 문제의식이 서로 교감되고 있었고, 저마다 현장활동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다양한 학생들 사이에서 역시 문제의식이 공유되는 한편 여러 정보들이 소통되고 있었다. 그 조건은 민중교회를 형성시키고자 하는 자극의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민중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 민중사건의 현장을 향해 열린 통로: ‘서대문민중신학교’는 교수와 학생 모두가 당대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민중운동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민중사건을 촉발하는 역할을 맡는가 하면 민중운동의 조직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예컨대 1979년 유신체제 종말의 단초가 되었던 YH사건, 명동YWCA위장결혼식사건 등이 ‘서대문민중신학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훗날 전교조를 형성한 주역(유상덕), 인의협을 만든 주역(황승주)들이 학생으로 함께 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 구성원들이 관련되어 있는 민중운동 조직을 열거하자면 그 목록 또한 한참 길어질 것이다.
‘서대문민중신학교’는 존속한 10년간 내내 민중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그 구성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이 지난 후에도 민중운동의 현장에서 사건의 주역들로 역할을 맡아나갔다. 사실은 ‘서대문민중신학교’ 그 자체가 하나의 민중사건이었다.
4) 자유로운 정신의 대안교육의 모형이자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민중사건인 ‘서대문민중신학교’: 오늘날 교육의 위기, 특히 대학교육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높고 그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 또한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특별히 대학교육 내지는 고등교육과 관련하여 성공적 사례로 알려진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구성원들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정신적 기풍 안에서 학문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논의와 시도를 심심치 않게 접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논의가 이뤄지고 그만큼 사회적 에너지가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도, 그 성과는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오늘의 현실에 비춰볼 때 ‘서대문민중신학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민중사건이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그렇게 척박한 조건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당대 가장 첨예한 문제의식으로 이론과 실천을 연결하고, 구성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고스란히 존중하는 자유대학의 정신을 ‘서대문민중신학교’는 일찍이 구현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여러 조건들을 헤아려볼 수는 있다. 예컨대 한국 민주화운동, 그리고 이에 대해 헌신적이었던 한국기독교장로회에 대한 캐나다교회의 깊은 관심과 지원, 그리고 나치에 저항하였던 고백교회의 유산을 지닌 독일교회의 지원 등이 그 중요한 조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지원 역시 은혜였다. 그러나 그 지원에 힘입어 ‘서대문민중신학교’가 성취한 결과들은 더더욱 놀라운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의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놀라운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서대문민중신학교 사건’은 교회 본연의 사명이 무엇인지 묻게 해주는 원점이 될 뿐 아니라, 교육 본연의 사명이 무엇인지 묻게 해주는 원점이 되기도 한다. 그 영감의 원천을 이제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4. 맺는 말

없는 시간에, 아직 교정과 편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의 원고를 숨가쁘게 읽으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읽고 난 다음 뭔가를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었다면 더욱 즐겁게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이걸 읽고 뭔가를 말해야 한다는 그 과제 때문에 이 책의 의의, 그리고 이 책이 증언하는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의의를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된 것도 사실이다.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 가운데 하나는, 이 책이 도도한 민중운동에 참여하였던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동기와 그 삶의 모습까지도 헤아려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충분히 ‘민중의 사회전기’라 말해도 손색이 없는 그 내용이 흥미로웠다. 그저 선교교육원 역사의 한 단면을 증언하는 책이 아니라 한국 민중운동의 중요한 한 국면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 기록으로서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그 증언하는 바가 가리키고 있는 ‘사건’이 함축하는 뜻 또한 의미심장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 영감을 얻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그 사건의 현장으로서 선교교육원의 공간이 그 기억을 보존하고 전수하는 중요한 역사 교육의 공간으로 보전되기를 바란다. 과거 사라질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저 한 시대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오늘 당대 사람들의 살아 있는 숨결과 과거 여기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마주쳐 새로운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공간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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