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유를 향한 여정 그 길목에서의 교회 - 역대지하 5:2~10[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5-10 16:12
조회
41221
2020년 5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자유를 향한 여정 그 길목에서의 교회
본문: 역대지하 5:2~10

[음성]


[영상]


반갑습니다. 꼬박 두 달을 넘겼습니다. 코로나 위기로 제가 안식년 휴가를 유보하고 복귀할 수밖에 없었지만, 3주간의 휴가기간까지 포함하면 딱 석 달만에 여러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동안 영상을 내보냈으니, 여러분들은 저를 볼 수 있었지만, 제가 여러분을 뵙는 것은 정말 석 달만입니다. 물론 예배를 준비하면서, 또는 다른 일들로 간헐적으로 뵌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요.

이미 두 달을 넘긴 온라인 예배 기간 지속적으로 성찰하였지만, 예배의 진정한 의미, 교회 공동체의 존재방식에 대해 우리는 새삼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간 인류문명과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기치 못한 가운데 맞이한 위기이지만, 그 성찰의 기회를 우리는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번 계기에 주어진 숙제를 우리는 끊임없이 숙고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을 바라는 희망을 키워나가고 그 여정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참으로 절묘합니다. 처음 성서일과를 따라 본문말씀을 접했을 때는 ‘아, 이 심심한 말씀이 오늘과 같은 위기의 상황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뜻을 음미하자니, 참 그 시점이 절묘하다 싶었습니다. 온라인예배를 끝내고 우리 교회가 교회당에서 모이는 예배를 다시 시작하는 시점에 주어진 말씀으로서 절묘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봉헌하는 데서 일종의 화룡정점에 해당한다 할 수 있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의미에 접근하기에 앞서 역대지/기에 대해 잠깐 말씀드립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크게 두 가지 관점의 역사가 대별됩니다. 그 하나가 신명기 사관에 따른 역사요, 또 하나가 역대지 사관에 따른 역사입니다.
신명기 역사가 앞선 시대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면 역대지 역사는 포로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역사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을 내세우며 왕조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면, 역대지 역사는 나라를 잃어버린 시대의 산물인 까닭에 다윗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그 흠을 들춰내지 않습니다. 또한 정치적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강조하기보다는 종교적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수 없지만, 정치적 공동체로서 나라가 사라진 현실에서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은 그 공동체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다윗 왕을 이은 솔로몬이 마침내 성전 건축을 완성하여 봉헌하는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신앙 전승의 맥락에서 볼 때 왕조의 등장과 함께 이뤄진 성전의 건축은 매우 중요한 전환을 나타냅니다.
애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백성과 함께 하시고 그 백성이 움직이는 곳에 현존하시는 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형상을 만드는 것마저 금지하신 하나님께서 특정한 처소에 자리한 당신의 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나타냅니다.
물론 성전 이전에 장막이라고 하는 특별한 성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장막은 백성들이 움직이는 여정 안에서 일시적으로 세워졌던 것일 뿐입니다. 그 전통은 이스라엘이 정착하여 왕이 없이 살았던 사사시절에도 지켜졌습니다. 정착하기는 하였지만 배타적인 유일한 성소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시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삶의 영역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권이 등장하면서 성전이 건축되었고, 그 성전은 유일하게 거룩한 장소로서 특권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전종교의 기원입니다. 그 특권적인 지위를 갖게 된 성전건축과 봉헌 이야기가 오늘날 무슨 각별한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괴리된 배타적 성소로서 성전은 사실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성전종교를 부정했고, 마침내는 회당에서도 쫓겨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교회는 배타적 공간에 세워진 집이 아니라 백성들의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굳이 ‘성전’이라든지, ‘성당’이라 하지 않고 ‘교회당’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든지 ‘성당’이라는 말은 신의 집을 뜻하는 반면, ‘교회당’은 신을 따르는 회중들이 모이는 집을 뜻합니다.
그 정신을 따르는 입장에서 볼 때 성전의 건축은 오히려 하나님을 특정한 시공간 안에 유폐시키는 것일 뿐이며, 백성들로부터 유리시키는 장치일 뿐입니다. 그 성전이 함축하는 세계관 또한 백성들과 더불어 있는 장막이 함축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백성 가운데 현존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의 여정을 함축한다면, 성전에 임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안정과 풍요에 대한 갈망을 함축합니다.

우리는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흩어져 예배를 드리면서 흩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흩어져 있는 그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를 새기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성전종교의 한계를 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교회당에 모였습니다. 그 시점에 본문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원상복귀, 다시 성전종교로 퇴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걸까요? 오늘 본문말씀이 절묘한 점이 있습니다. 성전봉헌의 화룡정점,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이 말씀이 절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신의 집으로서 신전, 성전 한 가운데 모셔진 것이 무엇일까요? 거의 예외 없이 신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정착, 그리고 왕조의 등장과 함께 성전이 건축되기는 했지만, 본래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그 핵심으로 해야 한다는 정신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그 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핵심은 새로 건축된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놓았고, 그 언약궤를 장엄하게 장식했다는 것입니다. 신의 형상 대신에 언약궤, 곧 말씀을 그 중심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의 여정에 하나님과 맺은 계약입니다. 그 계약의 내용이 뭘까요? 흔히 알고 있는 대로 십계명을 포함한 계약법전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백성이 자유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특별히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성서의 핵심 골간입니다.
솔로몬 왕은 왕조의 위엄과 영광을 위해 성전을 짓고 봉헌하였지만, 본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그 정신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교회당을 필요로 하는 모든 교회의 실존과 다르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특정한 시공간을 구별하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환기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의 표현으로서 삶의 현장에서의 말씀의 실천, 곧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옛 전승을 반영하여 그 핵심을 말해 주고 있지만, 보다 후대의 전승(히브 9:4)을 따르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와 언약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새긴 돌판뿐만 아니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함께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전승의 근거(출애 16:34; 민수 17:10)를 확인해보면, 두 가지는 언약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곁에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성전 가운데 언약궤와 더불어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가 함께 놓여져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과연 하나님을 믿을 때에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만나 이야기는 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광야에서 기나긴 자유의 여정을 이어가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배고프고 목말랐습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물질적인 결핍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고, 그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서 백성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의 기원입니다. 필요의 충족 조건입니다.
그런데 기나긴 광야의 여정을 보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할까요?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필요 충족 조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고 투정했고,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했습니다. 자유가 없었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 좋았다고 불평합니다. 일종의 과잉 욕망이 빚어낸 환상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먹고사는 것은 걱정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기가마를 향유했을까요? 자유의 여정을 포기하고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퇴행이 문제였습니다. 급기야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등장하는 것은, 고단과 다단과 아비람이 반역을 일으킨 맥락에서입니다(민수 16 이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벌하시고, 더불어 백성들 가운데 염병이 돌게 했습니다. 그 염병으로 일만사천칠백 명이 죽었을 즈음 아론이 지팡이를 들고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과 사이에 서니 재앙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아론이 장막 안에 들어가 그 지팡이를 두니 움이 돋아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까지 맺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뭔가 시사적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과잉욕망으로 참 자유를 보장하는 말씀의 도를 따르지 않고 거역했을 때 사람들에게 재앙이 임했다는 이야기는 오늘 인류문명에 대한 중요한 통찰로 인도합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그 재앙을 끝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다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곧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 사건을 상징합니다.

성전 안에 지배자로서 위용을 갖춘 신상이 놓여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안내하는 약속의 말씀,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여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난과 구원을 환기시키는 징표가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교회 가운데 두고 있는 것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의 신앙세계가, 한때 영화를 누렸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만 고대의 많은 종교들과 달리 오늘날까지 보편적 공감을 얻게 된 진실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그 진실을 환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흩어져 있다가 우리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첫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래서 절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집에서 만나 반가움과 기쁨을 나누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실입니다. 코로나 위기로 흩어져 있는 동안 우리가 새긴 진실을 다시금 새기며, 그렇게 깨달은 진실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함께 애쓰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버이주일입니다. 지난주일 어린이주일을 함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가운데 건너뛰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은 세대를 이어 전해져야 할 신앙의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당당히 전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모든 생명의 존엄함을 일깨우고 생명을 누리는 모든 존재가 서로 돕는 가운데 저마다 진정한 삶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데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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