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 - 마태복음 6:5~15[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5-17 16:12
조회
1451
2020년 5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
본문: 마태복음 6:5~15

[음성]


[동영상]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우리가 평소 잘 알고 있고, 늘 되풀이하고 있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크게 보아 앞 부분은 기도의 방법 내지는 자세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 부분은 그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의례화된 형식에 매인 종교생활을 비판하셨던 예수님의 평소 언행으로 볼 때 격식화된 어떤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본문말씀을 깊이 헤아려 보면 평소 예수님의 가르침과 잘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기도문을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성서에는 또 다른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바로 누가복음 11:2~4에 나오는 주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문은 마태복음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지만 보다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서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짧은 편집문이 긴 편집문 속에 완전히 다 실려 있다면 짧은 것이 더 원래적인 것이라 간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의 것보다는 누가의 것이 더 원래적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보다 간결한 형태로 되어 있던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서 전승되는 가운데 그 본래 뜻의 왜곡 없이 적절하게 보완되고 다듬어진 셈입니다. 줄여 말하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의 예식문으로서 주기도문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기도의 내용이 전승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형태로 최종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앞 부분은 진정한 기도의 태도와 방법을 일깨워 주십니다. 형식화된 종교생활을 비판하신 예수님의 입장이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회당과 큰 길 모퉁이 곧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장소에서, 그야말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의 태도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정치적 성격을 띤 집회에서 영어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조찬기도회에서 권력자를 앞에 두고 찬사를 늘어놓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내밀한 소통행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자기 욕망의 표출이 아닌 하나님과의 내밀한 상호교통입니다. 요란하게 떠들며 기도할 때에 과연 내밀한 소통이 가능할까요? 자기의 큰 목소리 때문에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상호소통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세 번째, 기도할 때에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에게 언어가 의사소통의 결정적인 수단이지만, 혀끝을 통해 드러난 언어가 의사소통 수단의 전부는 아닙니다. 눈빛만 보아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일이 설명 받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알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다음에 예수께서는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늘 되풀이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가 시작된 첫해, 그러니까 2000년 7월 30일에 국어학자 박창해 장로께서 주기도문의 의미와 더불어 우리말답게 번역한 주기도문을 제시해주신 이래 그 주기도문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3년도 수요 성서연구의 일환으로 주의 기도를 석 달간 12회에 걸쳐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마지막 특강은 박창해 선생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20년 역사에서 그런 기회들이 얼마나 풍요로운 시간이었는지 다시 되새기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단 한 차례로 그 의미를 새겨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한 가지 부름말과 일곱 가지 비는 말과 한 가지 기리는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비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셔야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세 가지와, 우리가 필요한 것을 비는 말 네 가지와, 기리는 말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박창해). 오늘은 그 의미를 하나하나 새길 수 없기에 그 기도문의 큰 뜻을 집약하여 헤아리고 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땅의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곧바로 땅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소망으로 연결됩니다. 일용할 양식과 용서를 구하고 아울러 유혹과 악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사실상 산상수훈의 핵심에 해당하는 주의 기도는 예수님의 믿음을 드러내 주며,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정체성을 제시해줍니다. 이 기도는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분리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곧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희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마음 한켠에서 고고하게 지키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드는 사람은 그 뜻이 땅 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염원해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그 진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늘을 향한 뜻과 땅을 향한 뜻은 그렇게 긴장 관계 속에서 얽혀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 밖을 바라다보면서도 동시에 역사 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현실의 굴레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주의 기도는 그와 같이 온전한 인간의 해방을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민중신학자 문동환 목사님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주의 기도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독한 독설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주의 기도가 바로 그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기도는, 유식한 신학자의 신학적 담론도 교리주의자의 교리도 아닙니다. 바로 구체적인 땅의 현실을 처절한 아픔으로 느꼈던 이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늘 허덕이는 현실, 서로 물고 물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 언제나 떨치기 어려운 유혹을 겪어야 하는 현실, 마음은 원이로되 도무지 선을 행할 수 없게 만드는 악의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체험이 주의 기도의 밑바탕입니다. 그 현실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하나님의 뜻이 가로막힌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느꼈던 그 현실, 그리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그 현실을 회피해서 위선적인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주의 기도는,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진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주의 기도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의 기도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의 외침입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점에서 주의 기도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첫째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자각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요, 둘째 그러나 희망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 그것이 주의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땅의 현실 가운데 평화스러운 하늘의 실재가 임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곧 주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주의 기도는 빈말이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삶 가운데서 그렇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 가운데서 그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주일입니다. 40주년입니다. 국가의 공식 명칭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이지만, 저는 ‘광주민중항쟁’으로 부릅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중요한 한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흔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인권은 세계의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숭고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광주 사건은 그것만으로 담아내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랄 만큼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은 한마디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으로서 역사의 계시였습니다.
권력을 찬탈하고자 하는 군부에 의해 인간을 완전히 비인간화하는 살육의 만행이 저질러졌으니, 그것은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죄책감을 지닌 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참담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서, 그렇게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기에 이후 숭고한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알고 움직였습니다. 더 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또한 멀쩡한 시민이 ‘폭도’가 되고 ‘빨갱이’가 되어 죽음을 맞이했던 그 비극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고 싸웠습니다. 온 몸을 내던져 나서지 못한 사람들은 주먹밥을 해 나르고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대치상황이 바뀌면 곧바로 살인 악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흘 굶은 계엄군 병사들에게까지 밥을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피를 흘리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내놨습니다. 싸우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놨습니다. 누가 강요하고 지시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무자비한 비인간적 살육에 그렇게 맞섰습니다.
‘주먹밥과 피의 공동체’, 아니 ‘절대공동체’, 1980년 5월 18~27일 열흘간의 광주를 달리 적절히 표현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합니다. 외부와 연락과 지원이 완전히 끈긴 광주는 ‘바위섬’과 같은 운명에 놓였지만,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나간 그 밖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항쟁을 통해 형성된 그 공동체가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무너졌지만, 그 공동체는 죽지 않았고 끊임없이 우리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가장 처참한 비극의 땅에서 가장 숭고한 하늘을 보았던 경험, 하늘과 땅이 그렇게 만나는 사건의 체험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세계인의 가슴 속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촛불항쟁으로 지속되었고, 지금도 우리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그나마 세계 가운데서 부끄럽지 않게 된 것은 그 광주항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은 그렇게 체험되었고, 그 체험은 끊임없는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다시금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역사와 삶을 향한 희망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반복할 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하늘의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소망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 놀라운 사건에 동참하기 위한 결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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