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진정으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 민수기 6:22~27[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6-07 15:10
조회
3510
2020년 6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정으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본문: 민수기 6:22~27



본문말씀은, 그 어떤 군더더기나, 그 어떤 갈등관계도 없이 전적으로 축복에 관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늘 이런 말씀만 선포된다면 절로 “아멘!” 소리가 울려 퍼지겠지요? 아마도 본문말씀은, 평균적인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 어떤 갈등관계도, 그 어떤 걸림돌도 없이 선포되는 이 말씀을 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지당한 말씀을 대하면 설교자인 저로서는 오히려 당황합니다. “아멘!” 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일 것 같은 말씀을 두고 뭔가 설명을 덧붙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갈등구조가 깔려 있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본문말씀이라야 오히려 쫄깃하게 느껴지는데, 그저 좋은 말씀이니 ‘이를 어쩌나?’ 하는 느낌부터 앞섭니다.
그러나 당연해 보이는 말씀이라도 그 의미를 다시 헤아리고 깊은 뜻을 새기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누구나 언제나 들어도 좋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의 뜻을 새기기 위해 먼저 이 말씀의 역사적 맥락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출애굽의 여정에서 백성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민수기는, 인간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는 책입니다. 본문말씀 역시 그와 같은 여정의 한 대목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첫머리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 선언할 말씀을 일러 주십니다. 백성의 최고 지도자 모세에게 직접 이르지 않고 어째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르는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제사장으로서 특별한 직분을 맡은 아론과 그 아들들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서는 일찍이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레위지파를 특별히 제사장의 직분을 맡는 가문으로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바를 따르면, 모세와 아론은 모두 그 가문에 속하는 후손들입니다.
그 가운데 모세는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백성들을 해방시킬 최고 지도자로 선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렇게 최고 지도자로 선택받을 때 흥미로운 사연이 전해집니다. 백성의 지도자로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집트 왕 파라오와 대결을 해야 하는데, 자신은 도대체 말이 어눌해서 자신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말 잘하는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아론을 모세의 대변인으로 붙여줍니다(출애 4:14).
모세는 자신에게 집중된 권한을 감당할 수 없어 하나님께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70 장로를 선택하여 역할을 분담하게 했습니다(민수 11장). 우리 교회도 지난 주일에 장로임직식을 가졌습니다만,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여기에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 점에서 흥미로운 진실을 일관되게 전합니다. 그것은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의 불완전함을 끊임없이 시사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은 말하기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관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성격을 말합니다. ‘홀로 주체성’이 아니라 ‘서로 주체성’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대변인으로서 아론의 역할, 그리고 본문말씀에서 백성에 대한 축복의 임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 역시, 관계 안에서 각기 적절한 몫을 맡는 인간의 삶에 관한 성서의 기본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 모세를 통한 축복이 백성들에게 훨씬 권위 있게 받아들여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특별히 그 임무를 분담시키는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단지 인간사회 안에서의 제도의 효율성을 전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서로의 결여를 보완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모두가 본문말씀을 대할 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히 그 축복의 내용일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이 말씀은 기복적 신앙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최고의 장전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본문말씀에서 선포되고 있는 축복의 내용은, 흔히 오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물질적 번영이나 개인적인 성공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백성에 대한 축복의 사명을 부여받은 아론의 역할을 재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의 내용을 환기하자면, 출애굽기 32장에는 이른바 금송아지 사건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간 사이,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야훼 하나님으로 떠받든 사건입니다. 아론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적어도 백성들의 유혹을 떨치도록 이끌지 못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성서의 기록은 아론의 책임에 대해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지만, 그 백성들의 잘못을 엄중하게 묻습니다. 황금 송아지 사건은 물신숭배의 전형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와 번영을 지상의 가치로 아는 잘못된 신앙을 극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갈망을 저버리고, 곧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물신의 노예로 퇴행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속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일화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종교사적으로 검토해야 할 여러 배경적 요인들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형상을 금지하는 성서의 신앙의 맥락에서 명백하게 물질주의 우상에 빠진 인간들을 경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론은 그 일에 연루되었다가 가까스로 복권이 되었습니다. 그가 복권된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더 이상 물질적 번영의 축복을 위한 사제로서 머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백성들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한 사제로서 역할이 재삼 확인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를 통해 백성들에게 내려져야 할 축복의 선언은, 따라서 그 물질주의적 번영이나 성공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해방과 구원을 위한 축복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축복의 선언을 세 가지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복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재삼 확인하고 있는 선언임에 틀림없습니다만, 하나하나 새기자면 또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본문말씀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들을 지켜 주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지금 인용한 <표준새번역>은 복수로 번역해놨지만, 원문은 단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단수로 호칭된 것입니다.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축복의 선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첫 번째 축복의 선언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을 주시어 당신들을 지켜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 복의 근본적 성격을 말합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은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늘 지켜 주신다는 것은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늘 우리 삶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내 존재의 근원을 생각할 때 우리가 삶을 허투루 살 수 있을까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須知父母)’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내 몸의 모든 것이 부모로부터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개체성을 부정하는 말이기보다는,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어떤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늘 지켜 주신다는 것은 그 근원과 분리되지 않은 의식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선언에서 핵심어는 ‘은혜’입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빛이 대지와 온 만물에게 내리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밝은 햇빛은 그 어떤 대상에게도 차별적으로 내리비치지 않습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그 누구에게나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말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자기 업적과 상관없이 누리는 선물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내 땀의 결과로만 내 삶을 영위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에서 연대의 가치로 드러납니다. 서로가 얽혀 있고, 따라서 서로 협조하고 연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말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는 것은, 그렇게 연대의 가치가 중심적인 삶의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적 관계, 삶의 현실을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회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삶의 가치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에 ‘고이 보시어’라고 번역된 것은 <개역성경>에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사를 나눌 때 어떻게 합니까? 얼굴을 마주하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인사다운 인사가 되지 못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주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이슬람 수피들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너를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을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해라.’ 늘 근원을 늘 의식하는 태도입니다.
그 때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샬롬’입니다. 통상 ‘평화’로 번역되는 이 말은 본래 ‘상처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처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다면 이 말은, 상처를 주는 일그러진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근원에 대해 의식할 때, 우리들의 삶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말씀은 진정한 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인간 삶의 근원, 인간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근원을 망각함으로써 겪는 불행과 고통을 넘어 삶의 뿌리를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을 늘 기억하고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서로가 서로를, 서로 물어 뜯는 늑대와 같이 여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불행한 삶의 현실을 뛰어넘어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환경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생명의 위기, 삶의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우리는 깊이 성찰하여야 합니다. 심각한 기후위기와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의 속출은, 인간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을 망각하고 무한히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온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위기를 넘어서기 위하여 우리의 삶의 근원을 생각하고,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생명을 영위한다는 진실을 새기며,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의 문제는 곧 구체적인 삶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깨닫고 마음 가운데 삶 가운데 새겨, 진정으로 평화를 누리고 복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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