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실한 하나님, 신실한 희망 - 미가 7:18~20[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6-28 18:41
조회
49861
2020년 6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신실한 하나님, 신실한 희망
본문: 미가 7:18~20



성서에는 여러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출신이나 인격적 특성이 다양한 예언자들이 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격적 개성의 다양성이야 어떤 경우든 마찬가지이지만, 출신이 다양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의 지위가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세습 지도자가 아니라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그야말로 하나님의 부름에 응한 사람들이기에 그 출신이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출신에 따라 메시지의 색깔도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미가서의 본문말씀을 함께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아주 인상 깊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처음 신학에 처음 입문했을 때 미가서를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학에 입문하기 전 교회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모스, 미가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현실의 불의를 고발하는 데 어쩌면 이렇게 적나라할 수 있을까? 종교적ㆍ사회적 불의를 향한 질타가 놀랍습니다. 지금 그대로 적용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선포 내용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와 함께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였습니다. 문서로 예언을 남긴 초기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번영을 구가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부패, 특히 국가지도자 및 종교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역설한 점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출신 신분 자체가 미천한 아모스와 미가의 질타는 직설적입니다. 당대의 예언자 가운데 이사야가 귀족출신으로 그 언어 또한 현란하다면, 아모스는 목동 출신으로, 미가는 농사꾼 출신으로 그 언어가 매우 직설적이고 통렬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미가서의 결론으로서 그 신랄함이 잘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은 매우 선명한 미가서 전반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단적으로 말해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이 본문말씀에 한정해 말하면, 그 뜻이 간결명료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백성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용서하여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죄를 보고 진노하시지만, 끝까지 노여움을 지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오늘 말씀의 문맥에서 보면 불의를 보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도 실은 백성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잘못에 대해 진노하시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지만, 끝내 죄의 수렁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건져 내시어 백성들에게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고백은,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의 믿음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지니고 있는 신실한 희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끝내 정의가 회복되어 모든 백성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되리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 예언은 사실 이미 파국에 이른 공동체를 전제로 하고 그로부터 회복을 선언한 말씀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미가 예언자의 활동시기에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유다 공동체의 파국은 587년 멸망을 말하는데, 미가 예언자가 활동한 시기는 그보다 200여년 앞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서가 그렇지만, 하나의 문학단위로 편집되어 있을 경우, 그 의미는 그 자체의 문맥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성서본문의 메시지는 상황적 맥락에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기록으로서 책의 문맥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것만 따로 떼어놓고 볼 것 같으면 사실 그 어떤 예언자의 메시지와도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위로와 희망의 선포 아닙니까? 모든 예언의 결론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어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예언서의 기본 구조입니다. 그 공통적인 성격만을 전제하고, 본문말씀을 주목하면 특별한 메시지의 성격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 메시지의 생생함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역시 그 문맥을 감안하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미가의 이 예언은 그가 선포한 전반적인 예언의 맥락에서 조명할 때 그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미가가 농사꾼 출신이고, 그 책이 간결 명료하기도 하여 그 메시지의 직설적 성격이 도드라지기는 하지만, 미가가 동시대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 어떤 식견이나 혜안이 빈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미가는 동시대 예언자 아모스와도 많은 부분 닮아 있을 뿐 아니라, 출신으로 봤을 때 비교되는 이사야와도 많은 부분 시대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미가 역시 장대한 스케일로 장차 이뤄질 평화를 그리고 있습니다(4:1~5). 그 비전을 <새번역>은 “주님의 통치로 이뤄질 우주적 평화”라고 소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과연 ‘우주적 평화’라고 할 만큼 원대한 희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한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4:3)
익숙한 선포 아닙니까? 이사야 2:4의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국제연합(UN) 본부 앞에 새겨진 말씀입니다. 그 만큼 미가가 당대의 다른 예언자들과 시대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사꾼 출신 미가다운 예언은 그 다음 이어지는 선포 가운데 드러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 4:4)
이것은 자기가 땀 흘려 가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서 거둔 소출을 바로 그 나무 아래서 향유한다는 소망입니다. 그렇게 거둔 소출을 빼앗길 염려도 없고 평화스러운 삶이 침해를 받을 염려도 없는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것은 성서적 정의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으며, 평화의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로 인식되지만 그것은 소극적 의미의 평화이며,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는 일상의 삶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곧 정의로운 일상의 삶입니다. 정의로운 평화의 모습입니다.
미가서의 마지막 결론은 바로 이와 같은 메시지의 핵심에 비추어 그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죄를 사하여 주시고,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의 참뜻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갖고 있다면서도 옹졸해져 있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전부인 줄로 압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곳에서 저마다 땀 흘린 결과를 스스로 누림으로써 정의가 이뤄지고 진정한 삶의 평화가 이뤄지기를 바라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미가 예언자가 선포한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바로 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관계, 그 사회와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관계, 그 사회는 확연한 차이를 지닙니다.
최근에 미국의 전 안보보좌관 존 볼턴의 회고록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의도한 것과는 달리 중요한 진실을 알려준 면도 있습니다. 한반도 관련 부분 발췌본이 보여주고 있는 진실을 살펴보면 의미심장합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개념 없이 과시적 성과에 집착한 트럼프, 겉과 속이 다른 폼페오, 집요하게 평화협상에 훼방을 놓은 아베와 볼턴, 그 사이에서 정말 절박하게 움직인 남북 당국자의 모습이 오히려 두드러집니다.
물론 여전히 안타깝고 부족한 당사자들의 노력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절박하게 애쓰는 사람들과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체제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전쟁이 발발한지 70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그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서 평화는 곧 우리의 생존의 문제임을 새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평화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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