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분노에 맞선 사랑의 승리 - 출애굽기 32:7~1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5-05 18:13
조회
141
2024년 5월 5(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분노에 맞선 사랑의 승리
본문: 출애굽기 32:7~14



성서의 정신세계를 형성한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을 꼽는다면, 하나는 출애굽 사건이요, 또 하나는 예수 사건입니다.
출애굽기는 단지 하나의 사실적 보도라기보다는 인간 삶의 실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탁월한 서사시입니다. 출애굽기는 억압의 상황에서 자유를 향한 열망을 보여 주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로부터 나아가 어떤 것을 향한 자유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간 삶의 실존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억압을 당할 때 자유를 갈망하지만 정작 자유가 주어졌을 때 오히려 그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실존을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통찰한 바 있습니다. 자유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분명히 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기 어렵다는 통찰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탈출의 과정이 극적이지만, 광야에서의 40년의 생활은 적나라한 인간 삶의 실존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본문 말씀은 광야의 여정에서 가장 극적인 백성의 배신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자유를 향한 여정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이 어떻게 배반하고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러나 그로부터 어떻게 다시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나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진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의 지도자 모세가 어떻게 돌이키게 하였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에 앞선 백성의 배반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환기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동안 백성은 광야에서 지도자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모세가 나타나지 않자 그 백성은 엉뚱한 생각에 이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떠나 있는 동안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대신한 또 다른 지도자 아론을 부추깁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32:1).
그 요청을 받은 아론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식솔들이 지닌 금붙이들을 모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금붙이들을 모아 녹여서 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32:4). 아론은 그 송아지 상 앞에 제단을 쌓고 백성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백성은 그 송아지 상을 야훼 하나님으로 여기며 예배를 드립니다.
야훼 하나님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이 그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고 여겨졌을 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송아지 상은 풍요의 신, 다산의 신을 나타냅니다. 경제적 성장을 보장해 주는 신입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인간이 지니는 보편적인 욕망을 보여 줍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의 여백은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유혹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조급해지고 그 조급함을 달래려는 방법을 찾습니다.
산 아래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은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백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대신 보이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물로 신상을 만들고 그 신상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섬겼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신으로 섬겼을 뿐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송아지 상을 야훼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을 때 아론은 말합니다.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32:5).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상 눈에 보이는 풍요의 신, 다산의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자본주의가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린 현실을 되돌아봤습니다. 성서는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누가 16:13)고 선포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갈등은 쉽사리 간과됩니다. 출애굽기가 전하고 있는 백성들의 상황은 오늘 인간들의 상황 가운데서도 너무나 쉽사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무엇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길인지,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조급하게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일에 집착할 때 그와 똑같은 사태가 우리 가운데서도 일어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산의 신,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형상을 만드는 순간 그 형상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소유물 또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을 섬기며 거기에 인간이 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그 소유물이나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분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진실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에게서 마음이 떠나 자신들이 만든 대상물을 섬기는 백성을 보고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처럼 하나님은 배역한 백성들을 보고 그들을 진멸하고 싶어 하십니다(창세 6:7).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10).
이 선언은 참 미묘합니다. 배역한 백성에 대한 분노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지만 그 배역의 죄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모세는 구분하여 그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선언합니다. 백성에게 죄의 책임은 묻겠지만 당신에 대한 신실함을 저버리지 않은 모세에게는 역시 당신의 신실함을 저버리지는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때 미묘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모세입니다. 백성과 함께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구원의 보장을 받은 사실에 만족할 것인가, 모세에게는 그와 같은 물음이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모세는 과연 어떤 편에 서야 했을까요? 지체없이 백성의 편에 섭니다. 어떤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32:11~13).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이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환기함으로써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게 맞서게 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난처해집니다. 본문 말씀은 이번 상황에서도 지체없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신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32:14). 본문 말씀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선언을 번복합니다. 분노에 맞선 사랑의 승리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구원에 기대어 배역한 백성에 대해 하나님과 더불어 심판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선택한 것은 배역하여 밉지만,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을 겪게 될 백성의 자리였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모세의 일대기,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 생활을 하였던 백성들의 이야기를 보면 모세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지만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존재 자체부터 히브리 노예의 아들과 이집트의 왕자 사이에서 갈등하였고, 이후 수없이 많은 갈등의 상황에 처해야 했습니다. 문제의 상황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모세는 언제나 마땅히 선택해야 할 것을 마침내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상황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보장을 빌미로 백성에 대한 심판자의 자리에 설 수도 있었던 모세는 오히려 재난을 겪게 될 백성의 그 고통의 자리에 서는 선택을 합니다. 백성의 잘못에 대해 자기가 함께 책임지겠다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백성의 심판자에 설 때 백성이 돌이킬 기회는 더 있을 수 없습니다. 재앙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백성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그것은 양편으로 향한 모세의 신실성을 말해 줍니다. 한편으로는 백성을 향한 신실성,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성입니다.
모세는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는 지도자로 부름받았고 그 몫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순간이라도, 곧 백성이 잘못을 범한 순간이라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 그의 몫은 더욱 확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선 백성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진정한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모세는 판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철저하게 백성의 편에 서는 길을 택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성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까닭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가 거듭나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세는 그렇게 단호하게 하나님께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진정한 믿음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모세의 그 애원, 사실상 단호한 결의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켰다고 했을 때, 그 사이에 다른 어떤 전환의 계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께서 다시는 세상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노아의 제사 이후의 상황입니다(창세 8:20 이하). 본문의 상황에서는 그런 어떤 전환의 계기가 없습니다. 오로지 모세의 호소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모세의 투명한 진정성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증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심판자의 자리에 서지 않고 재앙으로 고통을 겪게 될 백성의 자리에 서는 신실성, 그것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모세의 신실성을 믿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이면 백성을 재난에서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인간의 삶의 정황에 관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미 앞서 이야기했듯이,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쉽사리 흔들릴 수 있는지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그 의지가 흔들리고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지도자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여야 하는지 또한 새삼 생각하게 해줍니다. 위기가 파국으로 귀결되지 않고 새로운 기회로 전환할 수 있도록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함께 맞이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예견하고 그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고통을 겪을 당사자들의 자리에서 해법을 찾는 길입니다. 백성이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길을 찾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는 길을 찾는 방식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와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하늘의 뜻을 구하는 인간의 지혜와 의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예견되는 재앙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닙니다. 하늘의 뜻에 상응하는 사람의 의지와 결단에 따라 그 운명은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운명의 족쇄 안에 묶어두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과 함께 마음 아파하시고 끊임없이 대화하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모세의 절절한 호소 앞에 마음을 돌이키는 하나님입니다.
본문 말씀은 특별히 민심의 심판, 곧 하늘의 심판을 받고도 돌이키지 못하는 오늘 우리 사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정치적 양극화, 전쟁의 위기와 심각한 기후위기에 직면하여 그 어떤 해법도 찾지 못한 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해법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해법을 가로막는 세력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길이 막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탄식과 절규를 듣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목소리를 하나님께 전하며 호소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후세대들에게 잔혹한 현실을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며,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을 나누는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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