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사랑의 유대 가운데 누리는 자유 - 이사야서 58:6~1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5-10-05 16:24
조회
640
2025년 10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정의와 사랑의 유대 가운데 누리는 자유
본문: 이사야서 58:6~12
본문 말씀은 세 번째 이사야의 선포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와 공동체의 재건을 앞둔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지만, 성서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 앞서는 말씀(58:1~5)은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의 허물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 백성은 겉으로 보기에 경건해 보이는 것이 틀림없습니다(58:1~2).
그런데 그것이 왜 허물이 될까요? 마치 그것으로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듯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의례에는 열심이지만 그것이 곧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사안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경우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말씀은, 구체적인 종교적 의례로서 금식을 언급합니다(58:3). 유대교에서 금식의 전통은, 주전 586년 유대 민족국가가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이후부터 그 비극적 사건을 되새기는 뜻에서 정례화되었습니다. 그 맥락을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정례화된 금식을 잘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그 백성들의 태도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에 그런 고행을 해야 하느냐는 반문이 일어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58:3a).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인 것이 이미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을 내면서 자신들에게 가시적 보상이 주어지면 그것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에서 그저 행할 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식일에도 자신들의 향락만 추구하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는 질책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58:3b).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까지 한다고 했습니다(58:4). 이것은 구체적으로 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상행위를 하고, 채무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킨 현실을 말합니다. 자신들의 잇속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약자들에게 못된 짓을 다 하면서도 거룩한 체하는 현실을 말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묻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심하게 꾸짖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느냐?”(58:5) 종교적 의례가 그렇게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가 그렇게 겉치레로만 전락해버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금식은 어떤 것일까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58:6~12)이 그 답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금식 대신에 인간을 향한 행위로 대체하여 금식의 참뜻, 예배의 참뜻을 강조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58:6)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모든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정신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될까요?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너희를 이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구해낸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분입니다(출애 20:2 등). 성서의 백성 신앙의 밑바탕에는 자유가 없는 노예살이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그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을 형성한 가장 원초적인 경험입니다.
이로부터 그 누구라도 타의에 의해 압제 상태에 놓인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 사회가 지고의 가치로 지향하는 자유의 정신은, 이와 같은 성서의 정신을 그 중요한 한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또 이렇게 선포합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58:7)
이 역시 해석의 여지 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온전한 인간 사회를 위한 연대의 정신, 정의의 구현을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 파산당한 사람, 노예, 감금된 사람, 굶주린 사람, 떠도는 사람,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이 마땅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곧 정의라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마태 25:35~36)은 이 말씀에 곧바로 상응합니다. 오늘 현실에서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꼽는다면 어떨까요?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이주민과 난민, 몸이 불편한 사람들, 갖가지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소수자들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라고 선포합니다. 성서는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권리를 옹호하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배제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렇게 배제 대상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우선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불의하기에 그 불의한 상황을 바로잡으라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각 개인의 자유의지 그 자체로 구현되지 않습니다. 그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정의가 보장되어야 하고, 그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가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정신 역시 성서에 그 중요한 한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구체화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 때문에 종교적 계율을 지키고 금기를 따르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 그리고 누구나 예외 없이 특히 사회적 약자들 또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정의와 연대를 이룸으로써 공동체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계속해서 그 진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58:8~9a)
그리고 앞서 선포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재차 선포합니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다.”(58:9b~12)
이사야의 이 예언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귀환하여 민족 공동체를 회복하고 성전을 다시 지으려는 그 시점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그 배경에 비추어 생각할 때, 본문 말씀은 국가사회를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하는 그 기초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지향해야 할 바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성서의 핵심을 함축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우리의 교회 생활 가운데 그 핵심이 망각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반문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누리는 위로와 평안 또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은 그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진정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실시한 2025년 개신교인 인식조사 “개신교인의 극우성향을 진단하다”에 참여하여 설문결과를 분석하면서 심각한 물음이 생겼습니다. 우선 개신교인의 극우 비율(21.8%)이 한국 사회 평균 비율(21.0%)과 다르지 않아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사회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과연 개신교인들은 어떤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이 사사화, 개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되물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어떤 가치를 믿고 지향한다면 그에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난 12.3 비상계엄 때 부당한 명령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한 군인들이 국군의 날을 맞아 표창을 받았습니다. 민주주의와 헌법의 가치를 따른 적극적 행동을 사회가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법은 모르지만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군인의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적 가치가 스며들어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이 그만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면 되겠습니까?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가족의 깊은 사랑의 유대를 돈독히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유대가 우리 사회 가운데 어떻게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답을 찾고 그 뜻을 실현하기 바랍니다. 그 진실을 깨닫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늘어갈수록 우리 사회에 사랑의 온기가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 대열에서 기쁨으로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정의와 사랑의 유대 가운데 누리는 자유
본문: 이사야서 58:6~12
본문 말씀은 세 번째 이사야의 선포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와 공동체의 재건을 앞둔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지만, 성서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 앞서는 말씀(58:1~5)은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의 허물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 백성은 겉으로 보기에 경건해 보이는 것이 틀림없습니다(58:1~2).
그런데 그것이 왜 허물이 될까요? 마치 그것으로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듯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의례에는 열심이지만 그것이 곧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사안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경우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말씀은, 구체적인 종교적 의례로서 금식을 언급합니다(58:3). 유대교에서 금식의 전통은, 주전 586년 유대 민족국가가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이후부터 그 비극적 사건을 되새기는 뜻에서 정례화되었습니다. 그 맥락을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정례화된 금식을 잘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그 백성들의 태도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에 그런 고행을 해야 하느냐는 반문이 일어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58:3a).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인 것이 이미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을 내면서 자신들에게 가시적 보상이 주어지면 그것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에서 그저 행할 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식일에도 자신들의 향락만 추구하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는 질책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58:3b).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까지 한다고 했습니다(58:4). 이것은 구체적으로 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상행위를 하고, 채무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킨 현실을 말합니다. 자신들의 잇속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약자들에게 못된 짓을 다 하면서도 거룩한 체하는 현실을 말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묻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심하게 꾸짖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느냐?”(58:5) 종교적 의례가 그렇게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가 그렇게 겉치레로만 전락해버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금식은 어떤 것일까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58:6~12)이 그 답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금식 대신에 인간을 향한 행위로 대체하여 금식의 참뜻, 예배의 참뜻을 강조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58:6)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모든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정신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될까요?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너희를 이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구해낸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분입니다(출애 20:2 등). 성서의 백성 신앙의 밑바탕에는 자유가 없는 노예살이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그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을 형성한 가장 원초적인 경험입니다.
이로부터 그 누구라도 타의에 의해 압제 상태에 놓인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 사회가 지고의 가치로 지향하는 자유의 정신은, 이와 같은 성서의 정신을 그 중요한 한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또 이렇게 선포합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58:7)
이 역시 해석의 여지 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온전한 인간 사회를 위한 연대의 정신, 정의의 구현을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 파산당한 사람, 노예, 감금된 사람, 굶주린 사람, 떠도는 사람,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이 마땅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곧 정의라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마태 25:35~36)은 이 말씀에 곧바로 상응합니다. 오늘 현실에서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꼽는다면 어떨까요?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이주민과 난민, 몸이 불편한 사람들, 갖가지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소수자들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라고 선포합니다. 성서는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권리를 옹호하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배제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렇게 배제 대상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우선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불의하기에 그 불의한 상황을 바로잡으라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각 개인의 자유의지 그 자체로 구현되지 않습니다. 그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정의가 보장되어야 하고, 그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가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정신 역시 성서에 그 중요한 한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구체화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 때문에 종교적 계율을 지키고 금기를 따르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 그리고 누구나 예외 없이 특히 사회적 약자들 또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정의와 연대를 이룸으로써 공동체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계속해서 그 진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58:8~9a)
그리고 앞서 선포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재차 선포합니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다.”(58:9b~12)
이사야의 이 예언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귀환하여 민족 공동체를 회복하고 성전을 다시 지으려는 그 시점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그 배경에 비추어 생각할 때, 본문 말씀은 국가사회를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하는 그 기초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지향해야 할 바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성서의 핵심을 함축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우리의 교회 생활 가운데 그 핵심이 망각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반문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누리는 위로와 평안 또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은 그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진정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실시한 2025년 개신교인 인식조사 “개신교인의 극우성향을 진단하다”에 참여하여 설문결과를 분석하면서 심각한 물음이 생겼습니다. 우선 개신교인의 극우 비율(21.8%)이 한국 사회 평균 비율(21.0%)과 다르지 않아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사회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과연 개신교인들은 어떤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이 사사화, 개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되물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어떤 가치를 믿고 지향한다면 그에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난 12.3 비상계엄 때 부당한 명령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한 군인들이 국군의 날을 맞아 표창을 받았습니다. 민주주의와 헌법의 가치를 따른 적극적 행동을 사회가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법은 모르지만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군인의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적 가치가 스며들어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이 그만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면 되겠습니까?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가족의 깊은 사랑의 유대를 돈독히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유대가 우리 사회 가운데 어떻게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답을 찾고 그 뜻을 실현하기 바랍니다. 그 진실을 깨닫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늘어갈수록 우리 사회에 사랑의 온기가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 대열에서 기쁨으로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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