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기도 - 요한복음 17:1~26[이성철 전도사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5-10-12 14:48
조회
5823
2025년 10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의 기도
본문: 요한복음 17:1~26
이성철 전도사
여러분 명절 잘보내셨나요? 가족간의 사랑의 유대를 경험하는 시간이셨을까요. 혹시 크고 작은 갈등과 상처는 없으셨는지 안부를 묻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종종 또 자주 안부를 묻고 너를 위해 기도를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저도 기도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곤합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하시나요. 어떻게 기도하시나요. 질문하고 싶습니다. 사실 살림교회 교우분들의 기도 수준이 높아서 감동과 은혜를 받는 시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기도하기가 어렵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공감하시나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기도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알고 사용하는 기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배반당하고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기도하러 간 것으로 나옵니다. 그 표현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메세지는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내용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막 14:36)라는 내용이 담긴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님의 깊은 고뇌와 결심을 살필 수 있는 예수님 사역의 절정을 향해가는 기도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서들에 나왔던 겟세마네의 기도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요한복음은 오늘 읽은 본문인 '예수의 기도', '대제사장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기도하십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의 기도에 대한 이해가 다른 공관복음서와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의 십자가는 처형과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궁극적으로 확인되는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7장은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세 단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는 부분이며, 두 번째는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게 될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 세 번째는 제자들을 통해 앞으로의 역사 속에서 예수의 길을 따르게 될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 안에서의 일치, 연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분열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 제자들 간에 갈등이 생겨 분쟁이 생길 것을 염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리적이나, 종교적인으로 이후에 일치되어야 할 것을 의미하는것도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일치'는 이미 요한복음의 15장에서 예수님이 설명한 포도나무 비유가 의미하는 그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일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이 땅에서 자신이 맡은 사명을 다하여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과 일치됨을 고백하고있습니다.
이어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자신의 여정 동안에 그들과 나누었던 일화들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본문 8-9절은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내가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이 예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임을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었던 예수의 삶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온것임을 알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이며, 그 새로운 삶을 통해 경험될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하라는 부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목적과 방향은 제작각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제자들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이 될것이었고, 세상은 그들을 예수처럼 거부할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십시오." 그것이 제자들과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15절에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자에게서 그들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걸어온 그 길을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하십니다. 본인이 걸어온 이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필요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은 이 고통과 위험이 오래가지 않을것이라고 믿는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통과 위험이 계속되더라도 무너지지 않은 채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믿음으로 연결된 존재인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외부의 어떤것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기도는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21절에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미래에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과 이들의 삶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그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오히려 그 사명이 확장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오늘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두 중심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찬양하는 기도. 감사하는 기도, 청원하는 기도, 탄원하는 기도, 뉘우치는 기도, 모든 기도들과 그 응답에 대한 이야기들도 풍성합니다. 다양한 기적이야기도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기도는 아시다시피 기독교에서만 이어져온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종교들과 종교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인류는 굉장히 다양한 기도를 이어왔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말씀이 의미하는 규범 안에서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어가야할 기도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그저 나의 소원을 위한 기도만이 아닌 하나님과 일치를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함께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렇기에 내 옆의 이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느껴지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많은 기도를 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인권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무연고 사망과 자살 노인들의 추모를 위해 기도 했고, 국가보안법피해자를 위해, 고공농성 노동자,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쫗겨난 이들,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 다양한 소수자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고 아픔을 나누며 거리에서 외치고 이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기도 하고있습니다.
지난 9월 마지막 주 저는 태국 치앙마이에서 진행된 아시아 여성 문화신학회에 다녀왔습니다. 페미니즘과 트라우마 치유를 주제로 워크숍이었는데, 이것은 외부에 공식적으로 미얀마를 주제로 행사를 진행하면 참석한 미얀마 분들의 신변의 위협이 가기 때문에 페미니즘과 트라우마 회복이라는 주제로 위장을 한 채 특별히 미얀마 여성과 소수민족의 증언과 회복을 위한 신학적, 사회적 연구를 나누었습니다. 정말 참혹한 현실을 직접 듣게되었습니다. 현재 미얀마는 2021년도 군부 쿠데타 이후 계속되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 전쟁의 가운데서 미얀마 여성의 고통은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자본주의 하에 다층적으로 지속적으로 가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한국교회와 시민사회가 미얀마와 연대해온 활동을 공유하고 왔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1970년대 군사독재에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신앙의 언어로 저항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의 목요기도회의 전통은 가장 앞장선 저항의 상징이었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신앙의 언어로 공론화 하였고, 종교를 뛰어넘어 함께 슬픔과 책임을 나누고 저항하는 전통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통을 이어 같은 아픔에 연대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21년에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기독교행동'을 조직해 시민사회와 함께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에 동참했습니다. 매주 미얀마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90회를 진행했습니다. 미얀마의 상황을 공부하고, 한국교회가 모은 마음을 헌금으로 실질적으로 피해를 지원했습니다. 살림교회도 이 미얀마 기독교행동에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대의 내용들을 떨어져 있었지만 미얀마를 위해 함께 연대하고 있었다고 활동을 공유하고 계속 함께 기도하고 연대하며 행동하겠다고 나누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일을 이어받아 시작한지 오래 되지 않아 자료들을 정리해서 공유를 하였었는데요. 그럼에도 직접 얼굴과 손을 마주하고 기도가 연결되는 순간이 저에게는 큰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있는 미얀마와 한국 사이에서 나누었던 기도들을 전달하며 우리가 연결되어있음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문장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의 해방 또한 연결되어있습니다. 나의 아픔(저항)을 나누고 다양한 아픔(저항)들을 만날때 우리는 나아갈수있습니다. 우리의 저항은 혼자만의 저항이 아니고 모든 싸움과 연결되어있다.” 많이 알려진 문장이지만 온전히 저의 고백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미얀마 분들이 전하신 한국교회를 향한 감사의 인사를 이 자리에서 살림교우분들에게도 함께 전달을 합니다.
살림교회는 이미 많은 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땅에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에 연결되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그 기도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 하시길 바랍니다. 충분히 탄식 하고 또 충분히 희망을 노래 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있음을 확임하는 통로이며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통로입니다. 특별히 탄식이 기도가 되지 못하고 탄식이 외침이 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권리를 빼앗기고, 외침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이들의 외침이 들려지길 바랍니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은 기도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겪게된 엄혹한 현실과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외침이자 절규였습니다. 그 순간에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셔서 그들은 서로의 언어를, 서로의 절규와 기도가 서로에게 들리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던 다른 이들의 기도와 아픔이 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은 우리를 기도하게 만들고 우리를 기도를 통하여 연결되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사명이며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때로는 원치 않았지만 우리의 삶에 침범하고 경계를 넘어 만나게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양하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내 안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살피며 내 이웃의 신음에 귀기울이는 시간이 기도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그 기도의 시간에 우리들 가운데 기쁨이 차고 넘치기를 이미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세상에 보냄받은 공동체임을 기억하며 비록 그 과정이 쉽지도, 완벽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격려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예수의 기도
본문: 요한복음 17:1~26
이성철 전도사
여러분 명절 잘보내셨나요? 가족간의 사랑의 유대를 경험하는 시간이셨을까요. 혹시 크고 작은 갈등과 상처는 없으셨는지 안부를 묻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종종 또 자주 안부를 묻고 너를 위해 기도를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저도 기도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곤합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하시나요. 어떻게 기도하시나요. 질문하고 싶습니다. 사실 살림교회 교우분들의 기도 수준이 높아서 감동과 은혜를 받는 시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기도하기가 어렵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공감하시나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기도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알고 사용하는 기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배반당하고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기도하러 간 것으로 나옵니다. 그 표현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메세지는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내용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막 14:36)라는 내용이 담긴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님의 깊은 고뇌와 결심을 살필 수 있는 예수님 사역의 절정을 향해가는 기도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서들에 나왔던 겟세마네의 기도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요한복음은 오늘 읽은 본문인 '예수의 기도', '대제사장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기도하십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의 기도에 대한 이해가 다른 공관복음서와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의 십자가는 처형과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궁극적으로 확인되는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7장은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세 단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는 부분이며, 두 번째는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게 될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 세 번째는 제자들을 통해 앞으로의 역사 속에서 예수의 길을 따르게 될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 안에서의 일치, 연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분열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 제자들 간에 갈등이 생겨 분쟁이 생길 것을 염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리적이나, 종교적인으로 이후에 일치되어야 할 것을 의미하는것도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일치'는 이미 요한복음의 15장에서 예수님이 설명한 포도나무 비유가 의미하는 그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일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이 땅에서 자신이 맡은 사명을 다하여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과 일치됨을 고백하고있습니다.
이어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자신의 여정 동안에 그들과 나누었던 일화들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본문 8-9절은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내가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이 예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임을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었던 예수의 삶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온것임을 알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이며, 그 새로운 삶을 통해 경험될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하라는 부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목적과 방향은 제작각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제자들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이 될것이었고, 세상은 그들을 예수처럼 거부할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십시오." 그것이 제자들과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15절에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자에게서 그들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걸어온 그 길을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하십니다. 본인이 걸어온 이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필요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은 이 고통과 위험이 오래가지 않을것이라고 믿는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통과 위험이 계속되더라도 무너지지 않은 채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믿음으로 연결된 존재인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외부의 어떤것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기도는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21절에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미래에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과 이들의 삶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그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오히려 그 사명이 확장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오늘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두 중심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찬양하는 기도. 감사하는 기도, 청원하는 기도, 탄원하는 기도, 뉘우치는 기도, 모든 기도들과 그 응답에 대한 이야기들도 풍성합니다. 다양한 기적이야기도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기도는 아시다시피 기독교에서만 이어져온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종교들과 종교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인류는 굉장히 다양한 기도를 이어왔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말씀이 의미하는 규범 안에서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어가야할 기도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그저 나의 소원을 위한 기도만이 아닌 하나님과 일치를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함께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렇기에 내 옆의 이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느껴지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많은 기도를 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인권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무연고 사망과 자살 노인들의 추모를 위해 기도 했고, 국가보안법피해자를 위해, 고공농성 노동자,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쫗겨난 이들,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 다양한 소수자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고 아픔을 나누며 거리에서 외치고 이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기도 하고있습니다.
지난 9월 마지막 주 저는 태국 치앙마이에서 진행된 아시아 여성 문화신학회에 다녀왔습니다. 페미니즘과 트라우마 치유를 주제로 워크숍이었는데, 이것은 외부에 공식적으로 미얀마를 주제로 행사를 진행하면 참석한 미얀마 분들의 신변의 위협이 가기 때문에 페미니즘과 트라우마 회복이라는 주제로 위장을 한 채 특별히 미얀마 여성과 소수민족의 증언과 회복을 위한 신학적, 사회적 연구를 나누었습니다. 정말 참혹한 현실을 직접 듣게되었습니다. 현재 미얀마는 2021년도 군부 쿠데타 이후 계속되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 전쟁의 가운데서 미얀마 여성의 고통은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자본주의 하에 다층적으로 지속적으로 가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한국교회와 시민사회가 미얀마와 연대해온 활동을 공유하고 왔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1970년대 군사독재에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신앙의 언어로 저항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의 목요기도회의 전통은 가장 앞장선 저항의 상징이었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신앙의 언어로 공론화 하였고, 종교를 뛰어넘어 함께 슬픔과 책임을 나누고 저항하는 전통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통을 이어 같은 아픔에 연대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21년에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기독교행동'을 조직해 시민사회와 함께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에 동참했습니다. 매주 미얀마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90회를 진행했습니다. 미얀마의 상황을 공부하고, 한국교회가 모은 마음을 헌금으로 실질적으로 피해를 지원했습니다. 살림교회도 이 미얀마 기독교행동에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대의 내용들을 떨어져 있었지만 미얀마를 위해 함께 연대하고 있었다고 활동을 공유하고 계속 함께 기도하고 연대하며 행동하겠다고 나누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일을 이어받아 시작한지 오래 되지 않아 자료들을 정리해서 공유를 하였었는데요. 그럼에도 직접 얼굴과 손을 마주하고 기도가 연결되는 순간이 저에게는 큰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있는 미얀마와 한국 사이에서 나누었던 기도들을 전달하며 우리가 연결되어있음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문장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의 해방 또한 연결되어있습니다. 나의 아픔(저항)을 나누고 다양한 아픔(저항)들을 만날때 우리는 나아갈수있습니다. 우리의 저항은 혼자만의 저항이 아니고 모든 싸움과 연결되어있다.” 많이 알려진 문장이지만 온전히 저의 고백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미얀마 분들이 전하신 한국교회를 향한 감사의 인사를 이 자리에서 살림교우분들에게도 함께 전달을 합니다.
살림교회는 이미 많은 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땅에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에 연결되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그 기도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 하시길 바랍니다. 충분히 탄식 하고 또 충분히 희망을 노래 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있음을 확임하는 통로이며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통로입니다. 특별히 탄식이 기도가 되지 못하고 탄식이 외침이 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권리를 빼앗기고, 외침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이들의 외침이 들려지길 바랍니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은 기도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겪게된 엄혹한 현실과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외침이자 절규였습니다. 그 순간에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셔서 그들은 서로의 언어를, 서로의 절규와 기도가 서로에게 들리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던 다른 이들의 기도와 아픔이 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은 우리를 기도하게 만들고 우리를 기도를 통하여 연결되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사명이며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때로는 원치 않았지만 우리의 삶에 침범하고 경계를 넘어 만나게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양하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내 안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살피며 내 이웃의 신음에 귀기울이는 시간이 기도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그 기도의 시간에 우리들 가운데 기쁨이 차고 넘치기를 이미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세상에 보냄받은 공동체임을 기억하며 비록 그 과정이 쉽지도, 완벽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격려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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