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할 때일수록 - 신명기 7:6~1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7-12 14:45
조회
378
2026년 7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약할 때일수록
본문: 신명기 7:6~12
흔히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은 명확히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율법이 행위의 업적을 요구한다면 복음은 조건 없는 사랑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단절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아예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견해까지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폐해를 생각하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율법이 전적으로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성서의 큰 뜻에 비춰볼 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율법주의의 폐해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본래 율법의 정신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신명기는 이른바 모세오경의 맨 마지막 책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앞둔 상황 가운데서 모세가 설교 형식으로 선포한 말씀입니다.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는 ‘거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새로운 땅에서 지켜나가야 할 기본 법도를 일깨워줍니다. 이 책은 구약성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관점이 들어 있는 구약성서를 꿸 수 있는 근본적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나아가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신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가운데서도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대전제를 내걸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7:6)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에 한정해 보면 대전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그 앞선 내용을 해명하는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새로운 땅, 곧 약속의 땅에서 거주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은 기존의 주민이 따른 것과 같은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까닭으로서 이 말씀이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은 그에 걸맞게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초점은 여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7:7~8)
이 말씀은 성서의 밑바탕을 형성한 일관된 동기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뜻은 그 민족이 강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깨나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약해서 강대한 나라에 붙잡혀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였고, 거대한 제국의 권력에 붙잡혀 억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한 자를 선택하신다는 이 말씀은 성서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구약성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더더욱 뚜렷하게 재확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인의론을 통해서 그 정신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자격을 갖추고 업적이 있기에, 그래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좋은 조건에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조건과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인의론의 핵심 요체입니다.
앞서 말했듯, 구약의 율법은 자격과 업적을 요구하는 반면 신약의 복음은 그 모든 것을 폐기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사도 바울 역시 끊임없이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본문 말씀이 그 열쇠입니다. 본래 율법의 정신은 사람들을 옭아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하신다는 말씀의 뜻, 그것이 율법의 정신을 형성한 기초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구약성서의 정신과 신약성서의 정신은 상통하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동기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7:9)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또한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한 백성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동기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천 대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지키며 사랑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7:10)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장 벌을 내려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반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는 대조입니다. 그 대조법이 흥미롭습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천 대에 이르게 하겠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벌은 바로 그 사람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같은 취지를 지닌 출애굽기의 말씀(출애 20:5~6)보다 더 극적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벌이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미친다고 한 반면 신명기는 당사자가 그 책임을 진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복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벌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성이 폐기되지 않았지만, 추상같은 공정함보다는 무한한 자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본문 말씀의 근본 뜻입니다. 약한 백성을 선택하신 뜻, 자격과 업적을 보고 선택하지 않고 그것과 무관하게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다시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 자비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7:12)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계명을 잘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뜻, 곧 율법의 근본정신이 그 백성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데 있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자 동시에 성서의 정수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 지당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자격과 업적 이전에 오직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사람을, 백성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말씀의 그 핵심은 자격과 업적에 매인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바로 앞에서 기존의 풍요종교와 그 풍요종교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고 있습니다(7:1~5). 그것도 사실은 그 뜻에 비추어 헤아려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종교적 배타성의 근거로 여기지만, 단지 어떤 종교와 어떤 이방 민족을 배격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로서의 그 종교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우상숭배로 여겨지는 그 종교적 믿음 아래서 정당화되는 삶의 양식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요의 종교에서 정당화되는 것은 인간의 업적입니다.
그 풍요의 종교가 지배하는 세계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업적의 논리로 정당화되는 권력, 그리고 끊임없이 그 업적을 내도록 몰아붙이는 권력의 힘, 과정의 중요성보다는 그 결과에 집착하는 믿음, 그리고 더 많은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지금의 불공정함과 불평등은 도외시해도 좋다는 생각, 그리고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격이 없다고 배제하는 삶의 질서가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존속되는 사회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런 세계를 문제시하고 온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세계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현대적 인권과 정의의 기초가 되는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배타성의 논리, 타자를 악마시하고 정죄하는 적대와 증오의 논리를 극복하고 가장 연약한 사람, 가장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당당하게 한 구성원으로서 몫을 다하는 세계에 대한 희망을,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또한 가지지 못한 이들을 경원시하고, 불편한 것을 거부하고 정죄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종교, 기독교가 득세하는 오늘 현실에서 본문 말씀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지를 또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성장주의를 신조로 여겨온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그 성장주의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정체성의 근거로 삼아 왔습니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그릇된 태도입니다. 오늘날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신앙의 이름으로 강변하는 태도는 그 그릇된 신앙의 연속일 뿐입니다. 낯설다고 해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이들을 돌보시고 약한 이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백성으로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깨닫고, 그 진실을 구현하는 이 공동체,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약하다고 하여 그 진실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을 온전히 새기고 그 진실을 이루기 위해 더욱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약한 것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현하는 데서 유보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이 됩니다. 약할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신실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 역설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며, 우리 모두 그 진실을 구현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약할 때일수록
본문: 신명기 7:6~12
흔히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은 명확히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율법이 행위의 업적을 요구한다면 복음은 조건 없는 사랑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단절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아예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견해까지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폐해를 생각하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율법이 전적으로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성서의 큰 뜻에 비춰볼 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율법주의의 폐해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본래 율법의 정신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신명기는 이른바 모세오경의 맨 마지막 책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앞둔 상황 가운데서 모세가 설교 형식으로 선포한 말씀입니다.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는 ‘거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새로운 땅에서 지켜나가야 할 기본 법도를 일깨워줍니다. 이 책은 구약성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관점이 들어 있는 구약성서를 꿸 수 있는 근본적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나아가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신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가운데서도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대전제를 내걸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7:6)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에 한정해 보면 대전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그 앞선 내용을 해명하는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새로운 땅, 곧 약속의 땅에서 거주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은 기존의 주민이 따른 것과 같은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까닭으로서 이 말씀이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은 그에 걸맞게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초점은 여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7:7~8)
이 말씀은 성서의 밑바탕을 형성한 일관된 동기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뜻은 그 민족이 강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깨나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약해서 강대한 나라에 붙잡혀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였고, 거대한 제국의 권력에 붙잡혀 억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한 자를 선택하신다는 이 말씀은 성서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구약성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더더욱 뚜렷하게 재확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인의론을 통해서 그 정신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자격을 갖추고 업적이 있기에, 그래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좋은 조건에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조건과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인의론의 핵심 요체입니다.
앞서 말했듯, 구약의 율법은 자격과 업적을 요구하는 반면 신약의 복음은 그 모든 것을 폐기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사도 바울 역시 끊임없이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본문 말씀이 그 열쇠입니다. 본래 율법의 정신은 사람들을 옭아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하신다는 말씀의 뜻, 그것이 율법의 정신을 형성한 기초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구약성서의 정신과 신약성서의 정신은 상통하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동기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7:9)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또한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한 백성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동기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천 대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지키며 사랑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7:10)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장 벌을 내려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반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는 대조입니다. 그 대조법이 흥미롭습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천 대에 이르게 하겠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벌은 바로 그 사람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같은 취지를 지닌 출애굽기의 말씀(출애 20:5~6)보다 더 극적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벌이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미친다고 한 반면 신명기는 당사자가 그 책임을 진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복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벌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성이 폐기되지 않았지만, 추상같은 공정함보다는 무한한 자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본문 말씀의 근본 뜻입니다. 약한 백성을 선택하신 뜻, 자격과 업적을 보고 선택하지 않고 그것과 무관하게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다시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 자비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7:12)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계명을 잘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뜻, 곧 율법의 근본정신이 그 백성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데 있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자 동시에 성서의 정수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 지당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자격과 업적 이전에 오직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사람을, 백성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말씀의 그 핵심은 자격과 업적에 매인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바로 앞에서 기존의 풍요종교와 그 풍요종교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고 있습니다(7:1~5). 그것도 사실은 그 뜻에 비추어 헤아려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종교적 배타성의 근거로 여기지만, 단지 어떤 종교와 어떤 이방 민족을 배격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로서의 그 종교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우상숭배로 여겨지는 그 종교적 믿음 아래서 정당화되는 삶의 양식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요의 종교에서 정당화되는 것은 인간의 업적입니다.
그 풍요의 종교가 지배하는 세계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업적의 논리로 정당화되는 권력, 그리고 끊임없이 그 업적을 내도록 몰아붙이는 권력의 힘, 과정의 중요성보다는 그 결과에 집착하는 믿음, 그리고 더 많은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지금의 불공정함과 불평등은 도외시해도 좋다는 생각, 그리고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격이 없다고 배제하는 삶의 질서가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존속되는 사회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런 세계를 문제시하고 온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세계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현대적 인권과 정의의 기초가 되는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배타성의 논리, 타자를 악마시하고 정죄하는 적대와 증오의 논리를 극복하고 가장 연약한 사람, 가장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당당하게 한 구성원으로서 몫을 다하는 세계에 대한 희망을,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또한 가지지 못한 이들을 경원시하고, 불편한 것을 거부하고 정죄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종교, 기독교가 득세하는 오늘 현실에서 본문 말씀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지를 또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성장주의를 신조로 여겨온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그 성장주의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정체성의 근거로 삼아 왔습니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그릇된 태도입니다. 오늘날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신앙의 이름으로 강변하는 태도는 그 그릇된 신앙의 연속일 뿐입니다. 낯설다고 해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이들을 돌보시고 약한 이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백성으로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깨닫고, 그 진실을 구현하는 이 공동체,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약하다고 하여 그 진실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을 온전히 새기고 그 진실을 이루기 위해 더욱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약한 것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현하는 데서 유보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이 됩니다. 약할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신실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 역설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며, 우리 모두 그 진실을 구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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