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비우는 진실함 - 누가복음 18:9~1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8-16 14:47
조회
138
2026년 8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자기를 비우는 진실함
본문: 누가복음 18:9~1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당연한 세계, 당연한 상식을 되돌아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본문 말씀은 누구나 과오를 범할 수 있음과 동시에 그 과오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를 대비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비유라기보다는 실제 현실을 극적으로 대비하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당당하게 서서 자기가 행한 행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기도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돈을 밝히고, 불의를 행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저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18:10~12).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8:13).
이 말씀을 마친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 가운데 의롭다 인정받고 자기 집으로 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18:14).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단순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바리새파 사람은 잘난 체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지 못했고 세리는 전적으로 겸손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두 사람이 처한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처신과 믿음으로 보자면 거짓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은 그 자신에게는 사실일 뿐 아니라 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파 사람을 떠올리면 그저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떠 올리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윤리적으로 모범적이었고, 종교적으로 헌신적이었습니다. 기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 금식하는 관례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또한 통상 곡식과 올리브 그리고 포도를 수확한 후 드리는 십일조 관례를 넘어 박하와 운향의 판매 수입 등 모든 수입의 십일조는 물론 심지어는 구매한 물품의 십일조까지 드리기도 했습니다. 생산자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모범적이고 헌신적이었던 만큼 하나님 앞에서도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의 기도 또한 진실합니다. 세리는 당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받았고 따라서 상종 못할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세리가 고백한 대로 별로 감사할 조건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라면 경제적으로는 넉넉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하급 세리의 경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엄밀히 말해 국가 관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유력자가 입찰에 응하는 방식으로 징세권을 얻어내면 하수인들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들여 일정액을 상납한 것이 당대 관례였습니다. 단계별로 임의적 징수와 착복이 당연하게 이뤄졌지만, 아래로 갈수록 수입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거의 도둑이나 강도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하급 세리들은 세상의 따가운 시선은 시선대로 받고 자기 손에 쥐는 것 또한 변변치 않았을 테니, 감사할 조건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비유의 주인공이 하급 세리인지 상급 세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급 세리였다 하더라도 늘 불의한 구조에 일조한다는 자책감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리새파 사람이나 세리나 모두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보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셈인데, 어째서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 인정받지 못하고 세리만 의롭다 인정받았을까요?
그것은 자기 세계에 집착하며 지키며 경계를 짓느냐 않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누리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자랑스럽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만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바로 그 조건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갈라 경계를 짓습니다. 나아가 나는 옳고 나와 다른 사람은 그른 것으로 단정합니다. 자기의 가치 기준, 자기 의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세상을 그에 따라 질서 지으려고 합니다. 의인의 세계, 정상인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로부터 배제되는 차별 대상과 비정상인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질서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 세계에 집착하거나 내세울 만한 어떤 조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리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금을 그어놓은 경계 안 어디에도 들어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주류 세계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자기의 가치 기준, 자기 의에 따라 그 누구를 판단하고 세상을 질서 지을 만한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멀찍이 서서 기도하였을까요? 성전 뜰 안에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었고, 세리는 의롭다 인정받습니다. 자기의 업적과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느냐 않느냐에 따라 사람은 세상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헌신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 듯했지만 자기의 판단으로 세상을 진단하고 다른 사람을 질시했습니다.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면 교정과 교화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치부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타인에게 거북스러운 일을 했지만, 자신과 같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더 많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의롭게 되고 종교적으로 신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경계 밖에 있는 죄인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타인에게 거북스러운 일을 해야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삶의 구조가 흔들리고 정말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태도와 행위 이면의 진실을 그렇게 간파하시고, 이 극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설파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편에 가까울까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가 워낙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어서 그 양극단 가운데 어느 한편이라고 쉽사리 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잘 나가는 사람으로 잘난 체하는 것도 아니고, 정반대로 그렇게 가슴을 치며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해야 할 처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구나 바리새파 사람과 같은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삶의 환경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자기 경영의 주체가 되어 삶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구호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주체적 인간으로서 자각을 뜻한다면 다행이지만, 그 구호는 사실상 사회적 공동체를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공동의 책임과 연대를 배제한 가치를 나타낼 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참 아름다운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그 독단적 삶의 원리를 집약하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사회란 없다, 오로지 스스로 책임져라.’ 이와 같은 가치를 대변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독단은 더욱 심각합니다. 자기의 의로움만을 주장하는 거친 목소리 가운데서만 그 독단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만의 안락한 선민의 공동체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그 독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면 우선 ‘이단’으로 정죄하는 한국교회의 습성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타자를 정죄하고 배제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낯선 이를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미숙한 교회의 태도는, 교회 역시 그 독단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기 의에 빠져 타인을 정죄하는 방식으로는, 복음이 구현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건전한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면, 진실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고 하지 않고서는 진실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고, 과연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 또한 이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공적인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임하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믿고 구현하는 데서 성취됩니다. 남을 정죄하는 데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의 삶을 구현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현되는 진실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 신실한 믿음의 대열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자기를 비우는 진실함
본문: 누가복음 18:9~1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당연한 세계, 당연한 상식을 되돌아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본문 말씀은 누구나 과오를 범할 수 있음과 동시에 그 과오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를 대비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비유라기보다는 실제 현실을 극적으로 대비하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당당하게 서서 자기가 행한 행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기도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돈을 밝히고, 불의를 행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저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18:10~12).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8:13).
이 말씀을 마친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 가운데 의롭다 인정받고 자기 집으로 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18:14).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단순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바리새파 사람은 잘난 체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지 못했고 세리는 전적으로 겸손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두 사람이 처한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처신과 믿음으로 보자면 거짓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은 그 자신에게는 사실일 뿐 아니라 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파 사람을 떠올리면 그저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떠 올리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윤리적으로 모범적이었고, 종교적으로 헌신적이었습니다. 기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 금식하는 관례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또한 통상 곡식과 올리브 그리고 포도를 수확한 후 드리는 십일조 관례를 넘어 박하와 운향의 판매 수입 등 모든 수입의 십일조는 물론 심지어는 구매한 물품의 십일조까지 드리기도 했습니다. 생산자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모범적이고 헌신적이었던 만큼 하나님 앞에서도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의 기도 또한 진실합니다. 세리는 당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받았고 따라서 상종 못할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세리가 고백한 대로 별로 감사할 조건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라면 경제적으로는 넉넉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하급 세리의 경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엄밀히 말해 국가 관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유력자가 입찰에 응하는 방식으로 징세권을 얻어내면 하수인들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들여 일정액을 상납한 것이 당대 관례였습니다. 단계별로 임의적 징수와 착복이 당연하게 이뤄졌지만, 아래로 갈수록 수입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거의 도둑이나 강도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하급 세리들은 세상의 따가운 시선은 시선대로 받고 자기 손에 쥐는 것 또한 변변치 않았을 테니, 감사할 조건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비유의 주인공이 하급 세리인지 상급 세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급 세리였다 하더라도 늘 불의한 구조에 일조한다는 자책감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리새파 사람이나 세리나 모두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보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셈인데, 어째서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 인정받지 못하고 세리만 의롭다 인정받았을까요?
그것은 자기 세계에 집착하며 지키며 경계를 짓느냐 않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누리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자랑스럽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만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바로 그 조건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갈라 경계를 짓습니다. 나아가 나는 옳고 나와 다른 사람은 그른 것으로 단정합니다. 자기의 가치 기준, 자기 의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세상을 그에 따라 질서 지으려고 합니다. 의인의 세계, 정상인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로부터 배제되는 차별 대상과 비정상인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질서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 세계에 집착하거나 내세울 만한 어떤 조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리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금을 그어놓은 경계 안 어디에도 들어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주류 세계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자기의 가치 기준, 자기 의에 따라 그 누구를 판단하고 세상을 질서 지을 만한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멀찍이 서서 기도하였을까요? 성전 뜰 안에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었고, 세리는 의롭다 인정받습니다. 자기의 업적과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느냐 않느냐에 따라 사람은 세상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헌신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 듯했지만 자기의 판단으로 세상을 진단하고 다른 사람을 질시했습니다.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면 교정과 교화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치부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타인에게 거북스러운 일을 했지만, 자신과 같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더 많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의롭게 되고 종교적으로 신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경계 밖에 있는 죄인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타인에게 거북스러운 일을 해야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삶의 구조가 흔들리고 정말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태도와 행위 이면의 진실을 그렇게 간파하시고, 이 극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설파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편에 가까울까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가 워낙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어서 그 양극단 가운데 어느 한편이라고 쉽사리 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잘 나가는 사람으로 잘난 체하는 것도 아니고, 정반대로 그렇게 가슴을 치며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해야 할 처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구나 바리새파 사람과 같은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삶의 환경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자기 경영의 주체가 되어 삶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구호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주체적 인간으로서 자각을 뜻한다면 다행이지만, 그 구호는 사실상 사회적 공동체를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공동의 책임과 연대를 배제한 가치를 나타낼 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참 아름다운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그 독단적 삶의 원리를 집약하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사회란 없다, 오로지 스스로 책임져라.’ 이와 같은 가치를 대변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독단은 더욱 심각합니다. 자기의 의로움만을 주장하는 거친 목소리 가운데서만 그 독단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만의 안락한 선민의 공동체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그 독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면 우선 ‘이단’으로 정죄하는 한국교회의 습성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타자를 정죄하고 배제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낯선 이를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미숙한 교회의 태도는, 교회 역시 그 독단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기 의에 빠져 타인을 정죄하는 방식으로는, 복음이 구현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건전한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면, 진실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고 하지 않고서는 진실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고, 과연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 또한 이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공적인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임하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믿고 구현하는 데서 성취됩니다. 남을 정죄하는 데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의 삶을 구현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현되는 진실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 신실한 믿음의 대열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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