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너진 자리에서 넓어지는 경계 - 에스겔서 47:1~23[이성철 목사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6-08-23 13:34
조회
118
2026년 8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너진 자리에서 넓어지는 경계
본문: 에스겔서 47:1~23
이성철 목사



에스겔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였습니다.

기원전 597년, 바빌론제국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면서 유다의 왕과 지도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고,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던 에스겔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10년 뒤인 기원전 586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 성전마저 파괴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사건은 전쟁에서 한 번 패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었던 땅을 잃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왕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지면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주던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입니다.

에스겔은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을 하며 이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에스겔서에는 유난히 많은 환상이 등장합니다. 골짜기에 널브러져 있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고, 예루살렘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있는 47장에서는 성전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나와 마침내 큰 강을 이룹니다.

이런 환상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은 오히려 무너진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눈앞의 현실 너머를 보며 예언한 예언자였습니다. 그 열망을 환상같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는 본문은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면 다시 회복될 이후에 무엇을 다시 세울 것인가. 다시 세워질 공동체는 이전과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에스겔은 이 질문을 붙들고 새로운 세계를 그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이 말하는 회복을 단순히 무너지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꿈꾸었던 것은 해방된 이후는 과거의 영광을 되돌리는 것보다는 이전과 다른 세계를 다시 세우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무너지기 전의 이스라엘에도 이미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백성을 돌보아야 할 지도자들이 자신의 배를 채우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으며, 힘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현실을 고발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47장은 에스겔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계를 아주 인상적인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데,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물줄기였습니다.

에스겔을 이끌던 사람이 손에 줄을 들고 천 규빗을 잰 다음, 에스겔에게 물을 건너보게 합니다. 한 규빗은 팔꿈치부터 손까락 끝까지 길이로 45센티미터정도 됩니다.

처음에는 물이 발목까지 찼습니다. 다시 천 규빗을 가니 무릎까지 차오르고, 다시 천 규빗을 가니 허리까지 올라왔습니다. 다시 천 규빗을 더 가자 이제는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성전에서 흘러나올 때만 해도 아주 작은 물줄기였는데 물은 점점 깊어집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본 것을 환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다시 성전으로부터 시작될 생명이 흘러가면서 얼마나 풍성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은 성전 안에 머물지 않고, 성전에서 흘러나와 광야를 지나고, 마침내 사해를 향해 갑니다.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살 것이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뀝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생명이 흘러가면서 죽어 있던 것을 살리고, 사람들이 먹고 살아갈 것을 만들어내며, 아픈 것을 치료합니다. 아주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했지만 그 물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죽음의 바다까지 이르렀습니다.

12절까지는 물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3절부터 이제 에스겔은 땅을 이야기합니다. 북쪽은 어디까지인지, 동쪽과 남쪽과 서쪽은 어디까지인지 경계를 정하고, 그렇게 구분한 땅을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앞에서는 물이 경계를 넘어 흘렀는데, 그 다음으로는 오히려 땅에 선을 긋습니다. 얼핏 보면 서로 반대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두 장면을 함께 읽어야 에스겔이 꿈꾸었던 회복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두 장면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죽었던 땅에 생명이 돌아왔다면 이제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회복은 죽었던 것이 살아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생명이 흘러 살아난 곳에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누리며 살아갈 것인지까지 변해야했습니다.

각 지파가 회복되어 살아갈 땅의 분배가 이어진 다음, 그 땅을 나누는 마지막 부분에 오늘 본문의 구체적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너희는 말할 것도 없고, 너희 가운데 거류하는 외국 사람들, 곧 너희들 가운데서 자녀를 낳으면서 몸붙여 사는 거류민들도 함께 그 땅을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여라."

여기에서 '거류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게르입니다. 다른 본문에서 주로 ‘나그네, 이방인’이라고 표현되는 존재가 오늘 본문의 거류민, 게르입니다.

이 시기의 이방인인, 게르를 오늘날의 외국인, 난민 같은 개념으로 동일하게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고대사회에는 지금과 같은 국가도 없었고, 시민권과 국적으로 사람의 소속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제도도 없었습니다.

게르는 대체로 자신이 속했던 친족과 지역공동체를 떠나 다른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친족과 토지는 사람을 지켜주는 중요한 보호망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은 취약한 위치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체성 역시 혈통, 친족 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묶어준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출애굽이라는 공동의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 거류민, 이방인을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의 기억을 반복해서 불러냅니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다양한 법전은 이 기억을 꼭 상기시켰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서 안에서도 이방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 왕정시대로 나라가 생기고 통치와 제도가 생기면서 삶을 유지하고 세금을 내고 제사에 참여하는 행위들로 그것에 속한 자들과 속할 수 없는 존재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포로생활을 경험한 뒤에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경계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려는 움직임도 나타납니다.

위기를 경험하면 경계를 좁히기 쉽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겪으며, 실존이 위태로울수록 정체성에 대해 배타적이고, 누가 우리 안에 속하는지를 더 엄격하게 정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기에 누가 '우리'이고 누가 '그들'인지 나누는 일은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살아간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기를 살아내며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다시 세워질 이스라엘을 그려내는 그 마지막에 오늘 본문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거류민들을 본토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족속과 똑같이 여겨라."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끼어서 제비를 뽑아 유산을 받아야 한다."
그들을 '똑같이 여겨라'는 말 이후 '그들도 유산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가엽게 생각하고 환대하라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등하게 여기라고 하고, 그 동등함이 말로만 남지 않도록 실제로 앞으로 누리게 될 땅의 몫까지 나누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삶을 이어갈 기반이었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삶이 보장되어 있다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게르는 어느 날 갑자기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도 아닙니다. 이미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으면서 몸붙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환상에서 새롭게 달라지는 것은 그들의 존재 여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권리가 달라진것입니다.

이미 함께 살아가던 존재들이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되고, 본토에서 태어난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몫을 갖게 됩니다. 에스겔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린 새로운 세계는 오히려 생명이 살아나고 권리와 경계가 넓어지는 세계였습니다.

경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은 땅의 경계를 지파별로 아주 자세하게 다시 그립니다. 다만 새롭게 그어진 경계 안에서 온전한 권리를 가진 사람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모든 경계를 막연히 없애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떤 경계를 만들고 있는지 살피고, 그 경계 안에서 누구의 생명과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에스겔이 새롭게 그린 경계 안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의 몫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누가 차별을 받고 있는지, 무엇을 차별이라고 할 것인지를 두고서는 생각이 수없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수 많은 차이 속에서 살아갑니다. 삶의 조건과 살아가는 방식도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차이가 서로 다른 권리와 삶의 조건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인정과 승인이 필요한 일이 됩니다. 그렇게 차이는 권리의 차이가 되고, 권리의 차이는 다시 힘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곁의 가장 가까운 나그네, 한국사회의 이주노동자의 현실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1일, 아산의 KTX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 아웅민우 님이 작업 도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림교회도 함께 유가족을 위로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웅민우 님은 한국사회 바깥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용할 철도를 만드는 현장에서 일했고, 이곳에서 노동하고 생활하며 이미 이 사회를 함께 이루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 아래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만으로 자유롭게 사업장을 옮기기 어렵고,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는 사유와 횟수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일터가 위험할 때 노동자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선택 가운데 하나는 그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날 자유가 충분하지 않다면 위험을 거부할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힘들고 위험한 노동을 하청과 비정규 노동에 넘겨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위험의 상당 부분을 이주노동자들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외주화가 위험의 이주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체류자격 때문에 일자리에 제약을 받는 이주민들의 상황은 더 열악합니다. 뚜안 님은 유학생으로 한국에 와 대학을 졸업한 뒤 구직비자로 체류하며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직비자로 일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고, 생계를 위해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하던 중 출입국 단속을 피해 숨어 있다가 추락해 돌아가셨습니다.

올해 노동부는 산업현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야", "너"라고 부르지 말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자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을 익명의 노동력으로 취급하지 않고 온전한 존재로 대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제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하고, 위험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아침에 인사를 하고 나간 일터에서 저녁에 다시 집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아웅민우님은 정말 이례적이게도 하청과 원청에게 사과를 받고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그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24년 연구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출입국ᄋ외국인정책본부에 사망이 신고된 사람 가운데 사망 당시 미등록 상태였거나 노동 가능한 체류자격을 가진 이주노동자는 3,340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산업재해로 공식 인정된 사망은 137명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주노동자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곳에서 태어나 함께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별은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정하게 일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떤 사람은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연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관계를 계속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데서도 차별은 지속됩니다.

에스겔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환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누구의 권리는 여전히 온전한 권리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가, 그 몫을 나누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무너진 자리에서 꿈꾸었던 회복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렇게 살아난 생명들이, 함께 살아갈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에스겔의 마지막은 새롭게 만들어질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 샴마’ 라고 하고 마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라는 말입니다.
그 새로운 성읍에서는 나그네에게도 살아갈 자리와 몫이 주어졌습니다. 더 많은 이들의 몫을 함께 넓혀가는 것이 에스겔이 보여준 진정한 회복이었습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려갈 현재와 미래에서 다른 이들의 몫을 늘려갈 때에 '여호와 샴마'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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