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을 지향하는 갈등의 해법 - 사도행전 6:1~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8-30 13:32
조회
69
2026년 8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공동선을 지향하는 갈등의 해법
본문: 사도행전 6:1~7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 갈등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문제는 갈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해법의 적절성 여부에 있습니다. 갈등에 직면하여 한쪽의 일방적인 힘으로 눌러 무마하려 한다면 오히려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고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반면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갈등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조정하여 모든 구성원에게 만족할 만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갈등은 오히려 발전의 동력이 되고 그 사회와 공동체는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최초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 갈등의 해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한 공동체에 발생한 갈등에 관한 현명한 해법을 들여다볼 수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에 대한 해법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열두 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성장해 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헬라계 유대인들이 히브리계 유대인들을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라계 유대인은 그리스 말을 하는 사람들이고, 히브리계는 토착어 곧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불평한 까닭은 헬라계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홀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초기 교회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과 토착어를 하는 유대인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은,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입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인 가운데서는 노년에 정신적 기원이 되는 땅에서 여생을 보내고, 그 땅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 이 이야기는 당대의 구제 사업, 곧 공동체의 복지에 관한 관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은 유대교 회당을 통해서도 지속되어 왔습니다.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매주 금요일마다 14끼 식사비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원했고, 주민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은 그때그때 먹을 것을 주는 방식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도 그 구제의 전통을 따랐지만, 그 방식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홀로 된 할머니들은 사실상 정착한 주민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구제를 받는 방식으로 지원받은 것 같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가족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의 지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주해 온 유대인들 가운데 홀로 된 할머니들이 홀대받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이를 문제시하여 항의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서가 전하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의 최초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곧 차별로 인한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이 갈등에는 단지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종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지 출신의 차이만이 아니라, 신앙 색깔의 차이, 성향의 차이가 개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차별은 늘 그렇게 중첩됩니다. 토착 유대인들은 대체로 성전 제의와 율법에 대해 충실한 반면,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율법에 대해 자유로웠습니다. 바울의 선교활동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그 문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안에서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구제를 담당하는 사람이 지역 토착민으로서 자기에게 친숙한 이들을 우선하여 돌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소홀히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격입니다.
이 갈등 상황을 놓고 열두 사도와 회중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열두 사도는 효과적인 역할 분담을 그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사도들은 이 사태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있지만, 효율적인 역할 분담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고, 별도의 사람들을 뽑아 음식 베푸는 일을 맡기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별도의 역할을 부여받을 사람들의 선출을 회중에게 맡고, 그 결과 일곱 명의 일꾼이 뽑힙니다.
이 이야기는 최초의 교회 직분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곱 집사의 선출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집사’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장로’라고 불러야 할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딱히 명시하지 않습니다. 역할의 분담은 분명하지만, 직분이 고착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처럼 제도화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의 역할이 배타적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도자인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태에 대해서도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더불어 정반대로 새로 뽑힌 이들 역시 그 역할이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뽑힌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스데반이 청중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증언입니다(7:1~53). 역할의 분담은 위계적인 서열을 매기는 것과는 상관없을 뿐 아니라 배타적 경계를 확정하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공동체의 온전한 보전을 위한 효과적인 역할 분담 체계를 형성한 것입니다. 각기 맡은 은사를 선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새로 뽑힌 일곱 일꾼은 한결같이 헬라계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모두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안디옥 출신으로 유대교로 개종한 니골라라는 사람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오래 전부터 유대인 정체성을 지닌 반면 니골라는 자신의 당대에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두 토착 유대인은 아닙니다. 이주해 온 유대인 가운데 홀로 된 할머니들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로부터 소홀히 되었을 때, 그 공동체가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 당사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선출한 것입니다. 당사자 대표의 원칙을 따른 것입니다.
이제 당신들 알아서 하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이들이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또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배제된 이들의 처지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덕을 온전히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함께하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공동체의 갈등에 대한 해법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결여된 이들의 대표성을 전적으로 보장하되, 그 대표성이 전체 공동체의 온전함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한 해법입니다.
갈등이 발생한 상황과 그 해결 과정을 보면, 그 해법이 매우 슬기롭게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신에 따른 차별의 문제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은 공동체 안에서 대표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더불어 역할 분담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두 가지 층위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요? 모두에게 행복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을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6: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갔고, 심지어는 적대적이었던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믿음을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특별히 산헤드린을 지배하고 있던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인을 척결하고자 했던 상황(5:17~42)을 전제할 때 매우 극적인 반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적대자들까지 감화시켰습니다.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공동체 안의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함으로써 그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더욱 빛나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인간 사회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한 사회가 건강한지 아닌지는 갈등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갈등의 해결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갈등에 직면하여 한쪽의 일방적인 힘의 의지를 관철한다면 그 사회는 미숙한 사회요, 갈등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조정하여 모든 구성원에게 만족할 만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갈등 자체를 하나의 사회적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 현명하게 대처하는 성숙한 사회입니다.
이때 갈등의 조정은 기본적인 원칙과 현실적인 조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합니다. 이에 관한 현대적 지혜로, 존 롤스의 정의론을 환기합니다. 간결하게 집약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불가피하게 불평등이 인정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에서 처지가 가장 곤란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물론 통찰력이 뛰어난 한 사상가의 숙고 결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단지 뛰어난 한 사람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닙니다. 인류의 오랜 지혜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지혜의 한 원천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가장 우선하여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성서만큼 강조하는 또 다른 지혜의 전통이 있을까요? 그와 같은 지혜가 사람들의 관계 안에 작동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어떤 사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을까요? 추운 겨울의 밤을 밝혔던 빛의 혁명, 그 빛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누구에게 먼저 눈길을 주어야 하는지 그 시선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에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무엇보다 이해당사자의 형편을 헤아리는 데서 시작하여, 공동체 전체에 덕을 세우는 방안으로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존재할 수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본분이 여기에 있거늘, 거꾸로 기득권의 질서에 편승하여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상처를 안기는 역할을 맡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교회가 진정으로 성숙한 교회를 이룰 뿐 아니라, 그렇게 선취한 그 삶으로 우리의 사회를 바꾸어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공동선을 지향하는 갈등의 해법
본문: 사도행전 6:1~7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 갈등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문제는 갈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해법의 적절성 여부에 있습니다. 갈등에 직면하여 한쪽의 일방적인 힘으로 눌러 무마하려 한다면 오히려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고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반면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갈등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조정하여 모든 구성원에게 만족할 만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갈등은 오히려 발전의 동력이 되고 그 사회와 공동체는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최초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 갈등의 해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한 공동체에 발생한 갈등에 관한 현명한 해법을 들여다볼 수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에 대한 해법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열두 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성장해 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헬라계 유대인들이 히브리계 유대인들을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라계 유대인은 그리스 말을 하는 사람들이고, 히브리계는 토착어 곧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불평한 까닭은 헬라계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홀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초기 교회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과 토착어를 하는 유대인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은,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입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인 가운데서는 노년에 정신적 기원이 되는 땅에서 여생을 보내고, 그 땅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 이 이야기는 당대의 구제 사업, 곧 공동체의 복지에 관한 관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은 유대교 회당을 통해서도 지속되어 왔습니다.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매주 금요일마다 14끼 식사비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원했고, 주민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은 그때그때 먹을 것을 주는 방식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도 그 구제의 전통을 따랐지만, 그 방식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홀로 된 할머니들은 사실상 정착한 주민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구제를 받는 방식으로 지원받은 것 같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가족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의 지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주해 온 유대인들 가운데 홀로 된 할머니들이 홀대받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이를 문제시하여 항의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서가 전하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의 최초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곧 차별로 인한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이 갈등에는 단지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종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지 출신의 차이만이 아니라, 신앙 색깔의 차이, 성향의 차이가 개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차별은 늘 그렇게 중첩됩니다. 토착 유대인들은 대체로 성전 제의와 율법에 대해 충실한 반면,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율법에 대해 자유로웠습니다. 바울의 선교활동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그 문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안에서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구제를 담당하는 사람이 지역 토착민으로서 자기에게 친숙한 이들을 우선하여 돌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소홀히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격입니다.
이 갈등 상황을 놓고 열두 사도와 회중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열두 사도는 효과적인 역할 분담을 그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사도들은 이 사태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있지만, 효율적인 역할 분담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고, 별도의 사람들을 뽑아 음식 베푸는 일을 맡기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별도의 역할을 부여받을 사람들의 선출을 회중에게 맡고, 그 결과 일곱 명의 일꾼이 뽑힙니다.
이 이야기는 최초의 교회 직분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곱 집사의 선출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집사’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장로’라고 불러야 할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딱히 명시하지 않습니다. 역할의 분담은 분명하지만, 직분이 고착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처럼 제도화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의 역할이 배타적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도자인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태에 대해서도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더불어 정반대로 새로 뽑힌 이들 역시 그 역할이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뽑힌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스데반이 청중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증언입니다(7:1~53). 역할의 분담은 위계적인 서열을 매기는 것과는 상관없을 뿐 아니라 배타적 경계를 확정하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공동체의 온전한 보전을 위한 효과적인 역할 분담 체계를 형성한 것입니다. 각기 맡은 은사를 선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새로 뽑힌 일곱 일꾼은 한결같이 헬라계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모두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안디옥 출신으로 유대교로 개종한 니골라라는 사람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오래 전부터 유대인 정체성을 지닌 반면 니골라는 자신의 당대에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두 토착 유대인은 아닙니다. 이주해 온 유대인 가운데 홀로 된 할머니들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로부터 소홀히 되었을 때, 그 공동체가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 당사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선출한 것입니다. 당사자 대표의 원칙을 따른 것입니다.
이제 당신들 알아서 하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이들이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또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배제된 이들의 처지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덕을 온전히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함께하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공동체의 갈등에 대한 해법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결여된 이들의 대표성을 전적으로 보장하되, 그 대표성이 전체 공동체의 온전함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한 해법입니다.
갈등이 발생한 상황과 그 해결 과정을 보면, 그 해법이 매우 슬기롭게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신에 따른 차별의 문제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은 공동체 안에서 대표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더불어 역할 분담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두 가지 층위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요? 모두에게 행복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을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6: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갔고, 심지어는 적대적이었던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믿음을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특별히 산헤드린을 지배하고 있던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인을 척결하고자 했던 상황(5:17~42)을 전제할 때 매우 극적인 반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적대자들까지 감화시켰습니다.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공동체 안의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함으로써 그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더욱 빛나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인간 사회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한 사회가 건강한지 아닌지는 갈등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갈등의 해결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갈등에 직면하여 한쪽의 일방적인 힘의 의지를 관철한다면 그 사회는 미숙한 사회요, 갈등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조정하여 모든 구성원에게 만족할 만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갈등 자체를 하나의 사회적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 현명하게 대처하는 성숙한 사회입니다.
이때 갈등의 조정은 기본적인 원칙과 현실적인 조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합니다. 이에 관한 현대적 지혜로, 존 롤스의 정의론을 환기합니다. 간결하게 집약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불가피하게 불평등이 인정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에서 처지가 가장 곤란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물론 통찰력이 뛰어난 한 사상가의 숙고 결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단지 뛰어난 한 사람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닙니다. 인류의 오랜 지혜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지혜의 한 원천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가장 우선하여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성서만큼 강조하는 또 다른 지혜의 전통이 있을까요? 그와 같은 지혜가 사람들의 관계 안에 작동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어떤 사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을까요? 추운 겨울의 밤을 밝혔던 빛의 혁명, 그 빛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누구에게 먼저 눈길을 주어야 하는지 그 시선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에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무엇보다 이해당사자의 형편을 헤아리는 데서 시작하여, 공동체 전체에 덕을 세우는 방안으로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존재할 수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본분이 여기에 있거늘, 거꾸로 기득권의 질서에 편승하여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상처를 안기는 역할을 맡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교회가 진정으로 성숙한 교회를 이룰 뿐 아니라, 그렇게 선취한 그 삶으로 우리의 사회를 바꾸어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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