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한계 안에서 의미 있는 삶 - 욥기 14:1~6[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1-11 15:44
조회
100
2018년 11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유한한 한계 안에서 의미 있는 삶
본문: 욥기 14:1~6



오랜 만에 욥기 본문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욥기는 10여 년 전 성서연구 시간을 통해 1년 넘게 당시 교우들과 더불어 공부했고, 그 결과를 책(최형묵, <반전의 희망, 욥> 동연, 2009)으로 엮어낸 만큼 그 본문을 대하면 반갑습니다. 모처럼만에 다시 욥기 본문을 나누게 되었으니 새삼 그 대강을 환기해봅니다.

욥기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뭘까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는 구절일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처음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바라는 염원입니다. 그래서 개업예배 때 가장 빈번히 애송되는 구절이기도 하고, 아예 표구로 걸어놓기까지 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상식적인 기대와 달리 욥기 전체의 뜻에 비춰 볼 때 그 구절은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맥락에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잘 알다시피 의롭고 유복한 욥이 어느 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극심한 고통에 처하게 됩니다. 그 욥 앞에 친구들이 나타나 처음에는 위로의 뜻을 전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격렬한 논쟁의 상황으로 번져갑니다. 욥기는 그 과정을 극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 논쟁은 크게 보아 세 가지 반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개되는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그 첫 번째 국면에서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르기까지 대략의 논지를 집약해보면,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이 그의 잘못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죄를 지었기에 그 죄에 상응하는 마땅한 벌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착하면 복 받고 악하면 벌 받는다는 상식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는 욥기의 유명한 경구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처음에는 잘 나갔지만 말로가 형편없는 걸 보니 욥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논거로 그 경구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잘못한 욥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 가산을 회복해줄 것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욥은 억울합니다. 스스로 잘못을 범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현실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부조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스스로가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항변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겪고 악한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경우가 더 많다고 욥은 항변합니다. 욥기의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항변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부조리한 상황 가운데서 겪는 여러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항변을 통해서 인과응보의 논리에 매인 친구들의 허위의식,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빠져 있는 그 허위의식을 질타합니다. 친구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 상식은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욥은 들추어냅니다. 하나님은 그 부조리한 현실을 재가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소위 부자와 재상은 하늘이 낸다고 믿는 상식이 허위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결국 그 항변은, 곤경에 처한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운명 탓이거나 그들 자신의 잘못과 무능력 탓이라고 보는 세계관에 대한 도전입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강요받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 탓으로 돌리도록 만드는 잘못된 세계관,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욥은 문제시합니다. 그리고 끝끝내 하나님을 만나 진실을 밝히겠다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격렬한 논쟁의 서막 막바지에 등장하는 욥의 탄식에 해당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을 다 꿰고 있다는 듯이 그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자신을 다그치던 친구들에게 친구들이 말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죄가 없다고 항변하던 욥은 이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하겠다는 태도로 하나님께 항변하며 탄식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한 대목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나님께 항변하면서, 대답 좀 해달라고, 아니면 내가 속 시원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던 욥은 이 대목에서 일종의 체념에 가까운 탄식을 합니다. 대답 없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깊은 성찰을 통해 답을 찾는다고 할까요?

욥은 목소리 높여 다그쳐 물어도 대답 없는 하나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인간 삶의 실상을 고백합니다. 비관적인 인간의 현실에 대한 탄식입니다. 근본적인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의 실상, 욥은 그 인간의 실상을 이렇게 통찰합니다. 우선 인간은 사는 날이 짧습니다. 그 사는 날마저 괴로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인간의 삶은 마치 피었다가 시드는 꽃과 같이 덧없습니다. 그 사는 날을 도저히 붙잡을 없이 휙 지나갑니다. 그 인생이 살아갈 달수와 날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한계 안에 있는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존재라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까닭 없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상황 가운데서 욥은 인생 자체가 그런 것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근본적 한계에 대한 통찰입니다. 대개 이런 통찰에 이르게 되면 그 다음 답은 뻔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꼼짝없이 엎드리겠습니다’, ‘이 고통을 운명으로 알고 달게 받겠습니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저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결론입니다.
그러나 욥의 탄식은 그 상식적인 결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눈을 돌리셔서 그가 숨을 좀 돌리게 하시고, 자기가 살 남은 시간을 품꾼만큼이라도 한 번 마음껏 살게 해 주십시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욥기의 진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이 인생인데, 그 뻔한 인생을 두고 장기판 갖고 놀 듯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실 겁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너무 쪼잔하신 거 아닙니까? 그냥 내버려둬도 어차피 하나님 손바닥 안에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치 품꾼들이 일을 시키는 주인이 눈을 떼었을 때 한 숨 돌리며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숨 돌리도록 내버려두시면 안 되겠느냐고 욥은 그 장탄식을 반전으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회피하고자 하는 잔꾀와도 같은 것일까요? 이 반전에는 욥기가 제기하는 중대한 이의제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상식에 반하는 하나님에 관한 이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절대 순종의 근거가 됩니다. 반면에 욥에게는 오히려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저항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 절대적 진리 앞에서 개별적 진실이 유한하다는 사실, 온 우주의 생명 가운데서 개별적 생명이 미미하다는 사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통속적이고 상식적인 신에 대한 이해,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는 개별적인 존재의 미미함이 강조됩니다. 그저 하찮다는 의미만 강조됩니다.
그러나 욥은 정반대로, 하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한 인생은 그 자체로 자기 삶을 맘껏 구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온 우주를 품으신 하나님이 한 인생을 쥐새끼 내몰 듯 몰아쳐 다그치는 옹졸한 분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꽉 막힌 인과응보의 논리, 꽉 막힌 업적의 논리에 의해 인생이 묶여 있고, 하나님은 그 질서를 재가한다는 신관과 세계관에 대한 이의제기입니다. 이것은, 많은 인간들이 숙명으로 아는 세계질서가 유일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질서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욥은 모릅니다. 어차피 유한한 인간이 그것을 모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신의 뜻으로 믿고 있는 질서, 그것이 결코 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욥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법칙, 그것이 유일한 삶의 법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욥의 마지막 하소연은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희망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인간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의 여지를 열어두는 것입니다. 재삼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뭐냐고 끝끝내 물고 늘어지는 욥의 항변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현재 주어진 운명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면서 욥과 같은 물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본적 물음이 없이 이미 주어져 있는 답으로 자족해 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이미 굳어진 어떤 세계관과 질서 안에 묶여 있을 뿐입니다.

<거대한 전환>이라는 저술을 남긴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는 바로 그 책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가 ‘악마의 맷돌’로 비유한 자본주의체제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여 상품화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파괴할 때, 도대체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을 제시하는 대목에서 성서가 일깨워주는 중요한 통찰을 꼽습니다.
그는 사회를 파괴하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부조리한 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지혜를 성서가 일깨워 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는, 특별히 성서가 일깨워주는 두 가지 진실, 곧 구약성서가 일깨워주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 신약성서가 일깨워주는 한 영혼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성서로부터 영감을 얻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강조한 사회에 대한 인식이 사회를 파괴하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체제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욥기의 맥락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 그것이 어째서 중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폴라니 역시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허무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셈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삶을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한하기에 하잘 것 없는 삶이 아니라, 그러기에 순간순간이 빛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서가 일깨워주는 것이, 그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하나님과 이어짐으로써 매 순간의 삶 가운데서 그 하나님을 체험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매 순간의 삶을 의미로 충만한 삶으로 누리고자 하는 강렬한 희망을 뜻합니다. 성서의 이야기가 위대한 구원의 파노라마가 되는 비밀이 거기에 있습니다. 결국 그 깨달음이, 마치 한 영혼이 온 우주를 품은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승화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욥기의 본문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1970년 11월 13일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목숨을 내던졌을 때, 그것은 그 목숨이 하잘 것 없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마땅히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알고 있었기에, 그 소중한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사회와 세계를 향하여 자신의 소중한 그 몸을 불사름으로써 목숨을 걸고 외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그 항변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화체제를 향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세계적으로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 보수주의가 득세하는 가운데서도 개방적인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아직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의 삶이 변화되고 있다고 할 만큼 뚜렷한 변화는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옥죄는 강박적 질서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일자리에서 부당하게 쫓겨나 2018년 11월 11일 오늘로 딱 1년이 되기까지 75미터 굴뚝 위 저 높은 하늘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는 파인텍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오른 그들을 걱정하고 있지만, 그들은 거꾸로 그렇게 억울하게 일자리에 쫓겨나 하소연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을 더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욥의 항변과 탄식은, 바로 그런 세계를 향한 항변과 탄식입니다. 그 항변으로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항변마저 없다면 기존의 통념이 지배하는 세상은 우리의 숨통을 더 심하게 조여 올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숨통을 조이는 세상의 질서와 이를 용인하는 통념에 대해 ‘아니오!’를 외치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당연한 몫입니다.
그 목소리를 높이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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