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중용(中庸) - 전도서 7:15~18[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2-17 14:18
조회
18745
2019년 2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중용(中庸)
본문: 전도서 7:15~18



오랜만에 전도서의 말씀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코헬렛’이라는 말을 ‘전도자’로 번역한 바람에 그 책 이름이 ‘전도서’가 되었습니다만, 코헬렛은 모임 중에 가르치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현인 정도라고 할까요? 그 가르침이 집약된 것이 전도서의 내용입니다. 잠언, 욥기와 더불어 대표적인 지혜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기, 잠언, 전도서 이 세 책은 지혜서라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각기 전하는 그 지혜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잠언이 매우 상식적인 지혜를 가르친다면, 욥기와 전도서는 그 상식적인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복적인 지혜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와 전도서 사이에도 또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복 받고 악한 사람은 벌 받는다.’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교훈일 것입니다. 잠언이 일깨우는 지혜의 성격입니다. 반면에 욥기와 전도서는 그 지혜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아니, 착한 사람이 힘들게 살고 악한 사람이 더 잘 살던데!’ 이런 반론입니다.
그 상식적 지혜와 전복적 지혜의 차이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상식적인 지혜는 삶의 질서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질서를 당연히 전제하고 그 안에서 현명하고 의롭게 사는 길을 가르칩니다. 반면에 전복적인 지혜는 주어진 삶의 질서 자체를 문제시합니다.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면 ‘개인윤리’를 넘어 ‘사회정의’ 내지는 ‘사회윤리’로 이어지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가 이렇게 상반된 지혜,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측면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지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전복적인 지혜를 일깨우는 지혜서로서 욥기와 전도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욥기는 상식적인 지혜에 대한 반문을 극단으로 몰아 부칩니다. 그래서 상식적인 지혜, 상식적인 세계관이 은폐하고 있는 세계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줍니다. 기록된 책으로서 욥기는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사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욥기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끊임없는 반문과 이의제기 가운데,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믿고 있는 세계관과 실제 부조리한 현실의 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인도해줍니다.
전도서는 상식적인 지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욥기와 같지만, 그 태도는 상당히 다릅니다. 완숙한 현자의 달관한 지혜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산전수전 다 겪어본 현자가, 평범한 사람들이 아웅다웅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고 부질없다고 일깨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일관되게 나름의 답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간순간의 삶에 충실하라는 권고입니다. 전도서 첫머리를 보면, ‘헛되고 헛되도다’로 시작하고 있어서, 일종의 허무주의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허무주의로 귀결되지 않고,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인생을 즐기라는 낙관주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전의 희망, 욥>이라는 책은 우리 교회 성서연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제가 엮어낸 책으로서 참 좋은 책입니다.^^ 저자로서 겸손하게 말하자면 애착이 가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을 내놨을 때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그 시각으로 이번에는 전도서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답했습니다. ‘욥기가 제기한 부조리한 상황은 겪어 본 바 많기에 쓸 수 있었지만, 전도서가 말하는 세상의 영화는 누려보지 못해서 못 쓴다.’고 답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오늘 본문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바로 오늘 본문말씀은 전도서의 성격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어떤가요? 거 참! 저는 웃음부터 나왔습니다. 성경말씀을 대할 때 꼭 긴장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대로 일단 받아들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진지하게 대하면 달관의 경지가 느껴지지만, 적당히 보자면 적당히 살라는 이야기로도 보이지 않습니까? 욥기가 유발하는 것과 같은 긴장감은 전혀 없습니다. 쭉 이어지는 말씀을 보아도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점점 웃음이 나옵니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면, ‘이게 뭐지?’ 하고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제 정색하고 다시 생각해볼까요?
본문말씀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첫머리부터 상식적인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복적 지혜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의인이 망하고 악인이 오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언뜻 보기에는,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의롭게 살든지, 악하게 살더라도 오래 사는 길을 택하든지 선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도자(코헬렛)는 다른 결론을 말합니다.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전형적인 타협의 논리처럼 보입니다. 적당히 살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옳고 그른 것 그렇게 따지지 말고 살라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둘 다 해롭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 모두 부질없다는 이야기일까요?
본문말씀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의로움과 악함이 모두 ‘자기의’ 의로움과 악함이라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에는 그 표현이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개역>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여기서 의로움과 악함이 모두 사람들 사이의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악함이 자기에서 비롯된다는 관념에는 익숙합니다. 특히 신앙을 전제로 할 때 그렇습니다. 반면에 의로움은 자기에게 유익하거나 유해한 것과 상관없는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만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본문말씀은 분명히 둘 모두 ‘자기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에 충실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의’(自己 義)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이 말하는 의로움과 악함이 모두 해로운 결과로 귀결된다고 말하고 있는 점에서 그 두 가지가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더욱 분명하게 피력됩니다.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이 말씀은, 앞서 말했듯, 둘 모두 해로운 것으로, 따라서 둘 사이의 선택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상식에 반하는 문제제기의 진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상식에 반하는 문제제기의 뜻이 현실을 무마하고 타협적으로 살라는 것을 용인하려는 데 있지 않고, 정말 바른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은 이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본문말씀은 처음 문제제기에서 한 단계 뛰어넘어 다른 차원으로 전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의롭게 산다는 것과 동일시되는 지혜롭게 산다는 것, 그리고 악하게 산다는 것과 동일시되는 어리석게 산다는 것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하게 사는 결과가, 서두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는 제 명도 못 채우고 죽음에 이르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에서 말하는, 의롭게 산다는 것과 악하게 사는 것이 사실상 각자에게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상 동일시되는 어떤 사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으되,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 관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악을 행하는 사람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가 쌓은 악행에 의존해서 사는 사태는 우리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옳음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경우입니다. 달리 말하면 수치심이나 죄의식이 없는 경우입니다. 끊임없이 사기를 벌이는 범죄행위를 저질러놓고도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은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스스로를 망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어떤 사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결벽증과 같은 사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더 심각한 사태, 단지 자신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어떤 사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 일말의 다른 가능성을 두지 않고 확신하면서 자기소신을 주장하는 많은 경우가 바로 그 경우일 것입니다. 그 어떤 대상을 악마화해 놓고 스스로의 양심의 짐을 아예 덜어버리는 경우입니다.
‘광수생각’(‘광주에서 수상한 행동을 한 사람’을 뜻한다는데, ‘광주항쟁을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요?)에 빠져 있는 얼토당토않은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에 동조하는 정치인들은 어떤 경우일까요? 명백히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펼치면서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종교인들은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의미심장한 대화가 등장합니다. “악마란 정신의 오만, 웃음이 없는 신앙, 한 번도 의심을 받지 않은 진리입니다.” “너는 예언자들과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해라. 이 사람들은 원래 수많은 사람을 자기네와 함께, 흔히는 자기네보다 먼저, 때로는 자기네 대신 죽게 만들기 때문이지.” 반성의 여지없는 맹신, 맹목적인 진리관이 갖고 있는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고수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아무래도 <개역> 성경 번역이 더 적절해 보여 <개역>으로 인용합니다.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적당히 절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측면과 저런 측면을 모두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중용(中庸)의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어느 한편을 택하는 것이 낫지 정말 모든 측면을 헤아리며 정도(正道)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은 자기를 들볶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제 명에 가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반문이 들 법도 합니다. 그렇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은 아주 편안하고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 내 맡기라는 이야기입니다. 삶의 진정한 개방성을 의미합니다.
지난주일 공동의회 중에도 저에게 하나하나 내려놓으라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열어두면 편해집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매 순간의 삶을 의미 있고 기쁘게 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을 때 그 진정한 삶의 기쁨을 맛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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