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다움’에 대한 ‘물음’ - 마가복음 8:29~30; 10:44~45[유영상 전도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9-03-10 13:24
조회
12980
2019년 3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다움’에 대한 ‘물음’
본문: 마가복음 8:29~30; 10:44~45
유영상 전도사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우리교회에는 다양한 청년군이 있습니다. 진청에서 가청, 그리고 심청까지 정말 다양한데요. 우리 모두가 오늘 말씀나누기의 주인공입니다.

한국 사회는 청년을 환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환대의 경계선은 높고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저에게만 한정된 경계선일까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노력, 그리고 도전, 이에 응당한 성공. 이 연속은 한정된 경계선에서 환대받은 사람들의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환대의 경계선은 각기 다른 개성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자본의 획득, 명성의 획득, 이것들을 성공해야만 환대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존재, 개성이 있는 사회에 단 하나의 경계선과 가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획일화된 이 사회는 노력, 도전, 성공의 덕목을 청년‘다움’에 집약시켰습니다. 청년답게 도전하는 것, 청년답게 노력하는 것, 청년답게 포기하지 않는 것. 청년‘다움’은 청년이 꼭 지녀야 할 소명으로, 덕목으로 청년들에게 주입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다움’이 현대사회의 청년들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청년다움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무엇이 청년다움을 요구하는지 말입니다. 또 사회에서 요구하는 청년다움이 왜 우리의 덕목으로, 소명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말입니다.

작년 청년주일을 앞두고 안희정 전 지사를 가해자로 고발하는 미투운동이 있었습니다. 1심에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최근 2심에서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징역 3년6개월 유죄가 선고됐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러시아 출장 중 피해를 입은 뒤 안희정이 좋아하는 순두부찌개 식당을 알아보고, 업무를 지속한 것이 결코 피해자 답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피해자‘다움’은 무엇일까요. 피해자의 일상은 허락되지 않는 그들만의 피해자‘다움’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지 물어야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물음’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려 합니다.

오늘 읽은 첫 번째 말씀 마가복음 8장29~30절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엄중히 경고합니다. 이를 유력한 신약학자인 윌리암 브레데(William Wrede)는 위 본문말씀을 메시아 예수가 본인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숨긴다고 해서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해석하지만 ‘물음’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해 볼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쓰이게 된 계기를 통해 두 본문말씀이 태동된 이유와 그로부터 저희가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해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추적의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역시 ‘물음’입니다.

마가복음 8장29~30절 바로 뒤에 배치돼 있는 8장31~38절 말씀은 예수가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한 내용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고난을 받느냐고 반박합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는 훈계합니다. 예수는 곧이어 나를 따를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며 목숨을 기꺼이 잃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메시아인 예수는 왜 자신이 ‘메시아’로 고백되는 것을 거부했을까요? 물음을 더 발전시켜 봅시다. 마가복음을 집필한 마가 공동체는 왜 예수가 베드로가 말한 ‘메시아’로 고백되는 것을 거부했을까요?

오늘 두 번째로 읽은 본문말씀 마가복음 10장44~4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그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상을 또렷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바로 종으로서의 메시아, 섬기는 인자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입으로 인자는 섬기러 왔다고, 인자는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인자와 메시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인자는 어떨까요? 다니엘서 7장을 보면 인자는 권세를 마땅히 누리는 자입니다. 비록 다니엘서에서 네 마리의 짐승으로 표현된 제국주의 열강들의 통치를 종식시킬 휴머니즘 통치자로 인자를 설명하지만, 옥좌에 옛적부터 앉아계시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가지고 경배를 받는 왕입니다. 그 권력으로 세상의 폭력을 종식시킵니다. 인자에게는 기본적으로 ‘권력’이 부여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메시아도 이와 흡사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메시아는 다윗왕으로 집약된 제왕적 메시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당시 다윗 왕조 복원에 대한 열망이 컸습니다. 계속 해서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자주적 독립국가를 이루었던 다윗 왕조 시절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이러한 이유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윗 왕조의 복귀를 꿈꿨고 자주독립을 이끌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메시아상, 그리고 전통적인 인자상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던 “왜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 전통적인 인자상을 거부했을까?”라는 물음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왜 예수는 전통적인 메시아, 모두의 염원이 집중돼 있는 다윗 왕조의 후계자, 권세를 가진 인자를 거부했을까요? 질문을 더 발전시켜 봅시다. 왜 마가 공동체는 섬김받는 인자 그리고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아니라 섬기는 인자를 기억했을까요? 그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마가공동체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그 당시 메시아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며 추적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이 기원후 70년대, 예루살렘 성전 붕괴 이후에 쓰였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기원후 66~70년 73년까지로 알려져 있는 예루살렘 전쟁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바꿔놨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온전히 드렸던 성전이 붕괴되면서 그들의 종교성은 제사중심에서 율법 연구로 바뀝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됐다는 사실은 그들의 삶의 방향성과 의지할 처소를 모두 잃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임이 틀림없습니다. 마가 공동체 구성원들 중엔 예루살렘 성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도 있을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된 사실에 충격을 받은 사람이 대다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기억을 가진 채 자신들의 신앙서적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제국 군대에 대항하여 싸울 때의 성전 내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동안 긴장 있게 발발하던 이스라엘 지역 메시아 운동에 대해서도 익히 들었을 것이라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기원후 66년, 로마 총독은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10만 데나리온의 세금을 덜 냈다면서, 이를 추징한다며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를 약탈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돈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유대인들의 분노는 만만치 않았고, 곧바로 유대인들은 성전으로 달려가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참혹한 학살이었습니다. ‘시케’라는 이름을 가진 단도를 지니고 다니면서 로마제국과 협력한 자들을 암살하는 일종의 유대 혁명운동 단체인 시카리를 모두들 들어 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카리의 지도자 므나헴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모아 곧바로 성전으로 쳐들어갔고, 공문 서고에 불을 지릅니다. 이는 엄청난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빚 수금 대행업자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의 장부뿐 아니라 땅문서, 공문서 모두가 불에 타 없어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누가 부자이고 가난한지, 누가 노예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질서와 권력이 초기화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꿈꾸던 해방/독립이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났으며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습니다. 갑자기 시카리의 지도자인 유대혁명가 므나헴은 기이한 일을 벌입니다. 비싼 진홍색 예복을 입고 성전 뜰에서 자신이 메시아이며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왕국을 통치할 왕권적 힘을 가진 통치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목격한 예루살렘 성전 내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고, 므나헴의 기이한 행동에 분노한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였던 사람들은 그를 살해합니다. 므나헴을 따르던 시카리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멀리 떨어져 있는 마사다 요새로 피신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탈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시카리가 모두 빠져나가니 예루살렘 성전 내 전력누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은 예루살렘 성전 주민들을 동요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7년 뒤 모든 수로와 보급로를 차단한 로마제국 군대의 계락 앞에 무릎을 꿇며 처참히 붕괴됩니다.

이제 메시아 운동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당시 메시아 운동은 왕권적 권세를 쟁취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그것은 그 당시의 기대에 부흥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뢰아의 시몬이라는 메시아 운동가는 스스로 왕관을 쓰고 다니며 자신을 왕으로 부르게 합니다. 또 유다의 아트롱게스도 역시 스스로 왕관을 쓰며 자신을 왕으로 부르게 합니다. 므나헴, 베뢰아의 시몬, 유다의 아트롱게스 모두 메시아를 자처한 메시아 운동가입니다. 이들의 일치점이 있습니다. 바로 권세를 누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섬김 받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 왕조의 복원을 기대한 아주 전통적인 메시아를 자처합니다. 하지만 마가 공동체는 이러한 메시아가 아닌, 아주 전형적인-전통적인 메시아가 아닌 비교적 온순하며 섬기러 왔다는 뜻밖의 메시아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그 많은 메시아 운동가들 중에서 예수를, 가장 온순한 메시아를 그들은 기억합니다. 그들은 왜 많고 많은 메시아 중에 예수를 기억했을까요? 그들은 왜 섬김받는 메시아를 자신들의 공동체의 메시아로 고백했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마가 공동체는 더 이상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항거하는 메시아 운동은 이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약자에 속한 소속국가를 잃은 난민이자 주변부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의 권세는 터무니없는 것이었으며 관심사도 아니었고 지향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흩어져 버린 유대신앙, 그리고 초유의 사태를 맞은 유대인들의 의구심을 가라앉혀 연대하는 게 중요했으며 새로운 신앙을 새로운 언어와 덕목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그들의 최우선의 목표였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그들의 태도가 마가복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마가복음 13장5~8절, 22~23절을 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거짓 그리스도들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그 거짓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본문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로마제국과 이스라엘이 다시 전쟁을 할 것이라는 메시아 운동가, 표징과 기적으로 여호수아와 모세의 행적을 재현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혼란을 야기할 메시아 운동가, 메시아를 자처한 제왕적 메시아 운동가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저항보다는 연대가 필요했습니다. 공동체의 존속과 신앙의 재건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봉착한 문제는 초유의 사태였으며, 그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 적합한 메시아를 기억해 냅니다. 그들에게 적합한 메시아는 분배적 정의, 평등사상, 율법의 완성을 설파한 예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40년 전 조용히 십자가에서 처형당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 예수를 무심히 떠나 보낸 것에 대해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서인 마가복음을 통해 이러한 죄의식을 곳곳에서 표출합니다.

이러한 마가 공동체의 대안적 인자사상, 메시아 사상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섬기는 삶, 개혁적인 태도도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그러한 대안적 인자사상, 메시아 사상을 태동시킨 그들의 탁월한 고찰인 ‘물음’, 전통과 주류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의 삶의 지평과 신앙을 묻는 그 태도, 끊임없는 ‘물음’의 자세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지평에서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붕괴 이후 그들의 방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물은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떤 메시아의 말씀을 배워 그 무엇을 도모해야 할지 말입니다. 그들의 기억엔 권세를 지향하고 옥좌에 앉는 메시아 보단 그들이 40년 전 그렇게 무심히 떠나보낸 분배적 정의와 평등의 질서, 그리고 율법의 완성을 설파한 나사렛 예수가 그들의 삶의 지평에서 적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수를 부활시켰고, 예수는 부활했습니다.

지금까지 마가 공동체가 처한 시대사, 그리고 예수와 수많은 1세기 메시아 운동의 성격을 통하여 그들의 탁월한 통찰인 ‘물음’, 다시 말해서 결코 건드리기 쉽지 않았던 기존의 메시아상, 인자상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인 ‘물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인자‘다움’, 메시아‘다움’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인자와 메시아에게 요구되는 기존의 전통적인 상들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저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끊임없는 물음을 통해 태동된 마가 공동체의 신앙고백서를 읽는 저희가 마가 공동체의 정신인 ‘물음’을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남성중심주의의 언어입니다. 남성중심주의 언어가 ‘물음’이 가장 필요한 곳입니다. 사회 속 많은 남성주의의 언어들은 문화 속에 자리하여 자연스럽게 답습되고 있습니다.

‘여자문제’. 매스컴에서 지인과의 대화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단어입니다. 여자문제는 여자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자도 일정 부분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에서 남성의 폭력은 자취를 감춥니다. 여자문제라는 프레임은 이성애 남성의 성적 욕망을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여성은 욕망을 자극한 남성의 자연스런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술문제’ 이것 역시 여자문제와 동일합니다. 여기서도 가해자의 폭력은 ‘술’ 뒤로 자취를 감춥니다. 성폭력 사건 중 음주 후 일어난 게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성폭력의 폭력성을 희석시킬 수 없습니다. ‘술’이 가해자의 면죄부가 되는 건 정말 가당치도 않습니다. 술잔은 가해자가 들이키는데 왜 갑자기 술 탓을 합니까. 사람은 습관을 반복합니다. 반복하기에 습관입니다. 술을 마셨다면 음주 후 본인의 모습은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는 것은 음주 후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술’ 뒤에 숨은 변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저희 모두 여자문제, 술문제가 남성의 실수로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 발을 딛고 있습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남성사회는 서로를 격려합니다. 남성 문화의 헤게모니가 구축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동시에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합니다. “어떻게 피해자가 가해자가 좋아하는 음식점을 알아 볼 수 있지?”, “어떻게 피해자가 피해 후에 가해자와 함께 업무를 볼 수 있지?”라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피해자는 피해자답게 은신하고 격리되어야하고, 보호되야 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왜 피해자에게는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요? 피해자‘다움’에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페미니즘 연구자 정희진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회적 약자는 돈, 권력, 폭력, 제도 같은 전통적인 자원이 없다. ‘우리’에게 유일한 자원은 새로운 언어와 윤리뿐이다. 이 두 가지를 버릴 때, 다시 말해 지배자의 도구를 욕망할 때, 사회 운동은 타락하고 붕괴된다.” 이 주장은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마가 공동체의 탁월한 통찰인 ‘물음’을 요약할뿐더러, 그 물음을 현재화 시킬 우리의 ‘물음’에 적절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 적합한 언어와 윤리가 끊임없는 ‘물음’을 통해 사회에 자리할 것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다움’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물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재정의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남성주의가 지배한 언어에 대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살림교회 온교우 여러분들도 끊임없는 물음으로 사회를 마주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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