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 베드로전서 1:3~9[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4-28 14:53
조회
978
2019년 4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본문: 베드로전서 1:3~9



베드로전서는 이른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책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사회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이며 그 근본 도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라는 것이 서신의 골자입니다.
본문말씀은 가장 기본적인 인사말(1~2절)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그 서신의 첫머리로서, 그리스도인이 시련을 겪는 가운데서도 산 소망, 살아 있는 꿈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역설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말씀의 첫 구절(3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크신 자비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소망, 살아 있는 꿈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시련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희망을 간직하게 된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데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거듭남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병행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상응하는 구체적 표징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부활의 체험은 거듭난 삶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말씀의 첫 구절은,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산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산 소망, 그것은 그야말로 내 삶을 움직이는 동력으로서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소망을 말합니다.

그 소망, 그 꿈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보장하는 유산입니다.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으로 그것은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4절).
여기서 산 소망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산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상속인,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이 상응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사랑과 믿음으로 이뤄진 관계입니다.
그 관계 안에 경험하는 현실은, 지금 인간들이 경험하는 현실과 엄격히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된다는 의미에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 유산, 곧 산 소망의 궁극적 실체가 하늘에 보존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아직 뚜렷하게 경험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현실은 여전히 시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은 당장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유산을 손에 쥔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5~6절)
이 말씀은, 지금 당장은 시련을 겪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소망 자체가 포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소망을 간직한 그 믿음이 확고한 것인지 검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진정한 소망을 간직한 이들은 잠정적인 시련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오히려 시련 그 자체를 자신의 소망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라!”고 본문말씀은 선포합니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던 시련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오늘 우리의 희망이 아련하게만 느껴지고 따라서 갖가지 사회적 고통의 현상이 도무지 쉽사리 극복되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는 오늘의 상황에도 그대로 주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희망과 믿음이 하나님의 뜻, 곧 보편적 의와 선을 향한 것이 분명하다면 현실의 시련과 난관 때문에 그 희망과 믿음이 꺾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히려 시련과 난관 때문에 그 희망과 믿음의 진가가 더욱 드러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상황을 불로 연단되어 정련된 순금에 비유하며, 오히려 시련 가운데 연단된 믿음은 그 금보다 더 고귀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매우 실제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시련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9절)
이 말씀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도마가 만나는 장면 말미(20:29)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은 흔히 의심 많은 도마를 질책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과 삶을 함께 나눈 세대가 다 사라진 상황 가운데 기록된 복음서의 정황을 나타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베드로전서는 그 기록연대가 그보다도 더 늦습니다. 확실하게 예수님과 실제 삶을 나눈 세대가 사라진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 그리고 그것이 인도하는 구원의 현실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세대에 영합했으면 겪지 않을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격려하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격려의 선언, 축복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 선언은 당시 그리스도인의 실존 그 자체를 확인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 적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흠모하고 그분의 사랑의 삶을 지금 살며, 마침내 그분이 실천했던 그 사랑의 삶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 있는 참 소망을 간직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존 그 자체에 대한 확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서두에서 말하는 ‘산 소망’, 그것은 막연한 어떤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생생하게 살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삶의 원동력이 되는 살아 있는 꿈입니다.
본 적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믿으며 기쁨을 누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적 실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지 못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가올 미래에 성취될 소망 역시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이미 살고 있고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말미에 그렇게 믿는 대로 구원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9절) 여기서 ‘영혼’은 영육이원론을 전제로 한 개념이 아닙니다. 온전한 인격 전체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영혼’입니다. “사랑하며 믿으며 기쁨을 누리는 삶”은 그 자체로 구원을 누리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어 있다.”(스콧 니어링). 꿈을 꾸면 현실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지만, 꿈꾸지 않으면 그대로 현실의 속박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대로 사랑하는 삶은 우리의 현실을 바꾸고 내 삶을 바꾸지만, 지레 접어버리고 현실에 적응하는 삶은 우리에게서 사랑도 믿음도 기쁨도 앗아가 버리고 맙니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선거법을 개정하자는데 악다구니를 쓰고 육탄 저지하는 정당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벌거벗은 야욕을 그대로 드러낼 뿐입니다. 좀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소망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현실을 고수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처럼 소망이 없는 정치세력을 용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무관합니다.
얼마 전 대통령이 경제계 원로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듣는 자리에서 이전에 총리를 맡은 분은 요상한 소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 인권정책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경제는 그렇게 운영하는 게 아니다’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 발언은 우리 사회 경제 엘리트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자 동시에 현대 경제학의 잘못된 전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경제학에서 가치지향을 배제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 전제를 따르는 사람들은 과학을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을 배제한 잘못된 믿음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배제하고 인권을 무시하는 사회제도와 정책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콜텍 노동자들의 협상타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사업장 폐쇄로 해고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최소한의 자존심과 명예를 살릴 수 있는 요구를 관철하는 데 13년이 걸렸다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 사회의 완고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질긴 소망의 결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해주는 사태입니다.
하기는 70년이 넘었어도 해결되지 않은 사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억울한 죽음과 희생들, 우리 사회는 그 숱한 역사적 비극을 안고 있지 않습니까? 그 억울함을 풀고자 하는 소망이 없다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꿈이 없다면, 그 희생과 죽음은 또 다른 희생과 죽음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그 희생과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어째서 어제 휴전선 248Km 길을 따라 인간띠(216Km + 284Km)를 잇고자 먼 길을 다녀왔습니까? 강요된 분단과 강요된 삶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 진정한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소망 때문입니다. 죽임을 넘어서는 부활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며 믿으며 기쁨을 누리는 삶”, 그것이 죽음을 딛고 일어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 삶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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