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평화 - 고린도후서 13:11~13[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6-16 13:47
조회
20490
2019년 6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평화
본문: 고린도후서 13:11~13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걱정하면서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이자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ㆍ후서를 본문으로 할 때마다 확인하는 사실이지만 고린도교회는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인 파당들이 형성되어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간 데 없고 저마다 자기 파당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옳으니 그르니 다퉜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해, 바울은 절절한 마음으로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세 번째 방문을 앞두고 보낸 편지로서,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결론에 이르기 전 바울의 어조는 매우 강경합니다. 13장 앞부분을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번에 가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13:2). 그토록 사랑을 역설했던 사도 바울의 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호한 말투입니다.
그리고 계속 강경한 어조로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향하여 두 가지 차원에서 자기의 주장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바울 자신을 포함한 동역자들의 권위에 관한 것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를 의심당하는 의혹에 계속 시달렸던 사람입니다. 다른 여러 사도들은 예수님과 직접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사도로서의 권위를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늘 그와 같은 의혹에 시달렸습니다. 그 의혹을 의식하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서 여러분을 대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장황한 이야기를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와 동역자들이 합격자냐 실격자냐를 입증하는 것이 이번 과제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악을 저지르지 않고 옳은 잃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13:7).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겨냥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정말 강하게 되고, 여러분이 정말 완전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사도 바울은 중대한 과제를 제시합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하여 보고,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르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13:5) 바울은 다른 서신 곳곳에서 여러 차례 밝혔지만, 자신은 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 있는지 확인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르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이 말은 매우 강력한 반어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부정적 선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긍정적 선언입니다. “진리를 위해 뭔가를 함으로써”(13:8) “완전하게 되기를 바라는”(13:9) 마음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기만의 독단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독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삶의 실재를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시험해보고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13:11).
기뻐하는 가운데 온전하게 되기를 힘쓸 때, 서로 격려하며 서로 한 마음이 되기 위해 힘쓸 때,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할 때 우리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장중하고 완벽한 권면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증거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의지와 판단을 감히 하나님의 뜻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말씀의 뜻을 깊이 새기고자 할 때 동시에 그 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에 이렇게 편지하는 것은, 내가 가서, 주께서 주신 권능을 가지고 사건들을 처리할 때에, 너무 엄하게 대할 필요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권위는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13:10)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도의 진정한 혜안이 빛나는 말씀입니다. 저마다의 독단에서 비롯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질책해서 여러분이 어쩔 수 없이 행동하기보다는 여러분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해결의 방법을 찾기를 바랍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성의 촉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자신이 누리는 권위는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일깨우고 일으켜 세우는 목적을 지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한편으로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마다의 독단으로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건너뛰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전제는 바로 그 불행한 현실을 깊이 통찰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거듭남,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강력하게 희망하고 역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표본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입니다. 타율적인 율법이나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탄생하는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따르는 그 새로운 존재에 대한 희망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13:5) 우리가 기뻐하는 가운데 온전하게 되기를 힘쓸 때, 서로 격려하며 서로 한 마음이 되기 위해 힘쓸 때, 우리는 믿음 안에 있습니다.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진실로 그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우리 스스로 거듭난 존재가 되리라는 믿음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믿음 안에 있을 때, 자기중심적 삶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 안에서 마땅히 서로 지켜야 할 근본도리를 역설하는 데 일차적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본문말씀은 인간사회가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는가를 동시에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가운데 온전하게 되기를 힘쓸 때, 서로 격려하며 서로 한 마음이 되기 위해 힘쓸 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며 새로운 세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오늘 한국 교회와 사회를 소란하게 만드는 ‘거짓 예언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 그의 발언과 행동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지난 한 주간 그 ‘거짓 예언자’가 뱉어낸 말들 때문에 그에 맞서느라 긴장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렇게 험한 말들을 뱉어놓는 까닭이 무엇일까 헤아려 보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그 소란을 피우며 거두고자 하는 정치적 효과 말고, 정말 뭐가 그렇게 못 마땅해서 그러는 것일까 헤아려 보았습니다. 한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평화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것을 북측의 ‘적화’ 야욕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굳이 반대하는 합리적 핵심을 짚자면 그것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인다면, 그와 같은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과정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다양한 소수자들이 공존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는 기류가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가 불편해하는 현재 시국 상황의 실체는 그런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불편한 것일까요? 갈등과 대결의 구도를 강화시키는 편 가르기에 편승하고, 그렇게 편 가르기를 하는 가운데 숱한 타자들을 정죄하는 데서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찾아온 잘못된 인식, 잘못된 신앙 때문입니다. 누군가 악마화해야 할 상대가 무너지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없어 위기감을 느끼는 허망한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코 그렇게 허망한 세계관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궁극적인 구원의 희망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그 어떤 것을 반대하는 것만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반공주의, 반동성애, 반이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코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어떤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동으로 구현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희망은,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며, 모든 사람이 삶의 기쁨을 노래하는 세계에 대한 열망을 지금 삶 가운데서도 구현하고자 하는 데서 성취됩니다.
함께 기뻐하는 가운데 온전하게 되기를 힘쓸 때, 서로 격려하며 서로 한 마음이 되기 위해 힘쓸 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며 새로운 세계를 이루게 됩니다. 언제나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이라는 자각 없이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으며,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그저 사람을 옭아매는 도그마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말도 안 되는 정치적 선동으로 신앙을 타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함께 기뻐하는 가운데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한 마음이 되기 위해 힘쓰는 가운데 평화를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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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시 1 -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아이덱거 럿셀 헤밍웨이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가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1968년 11월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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