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내 마음이 맑아야 - 누가복음 6:36~42[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7-14 13:53
조회
219
2019년 7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내 마음이 맑아야
본문: 누가복음 6:36~42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분의 삶을 따르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아 그 뜻을 구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수 없이 난관에 부딪힙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고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 지난 주간 수요 성서연구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낸 사건의 의미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와 더불어 그 의미를 생각했었지요? 과연 평범한 인간들이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본문말씀 또한 그러한 물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가르침입니다. 열두 제자를 뽑아놓고 그 제자들이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내용의 한 대목입니다. 앞부분에는, 산상설교로 더 잘 알려진, 이른바 팔복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산상설교가 아니라 평지설교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 다음에 원수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본문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일련의 말씀들을 음미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째서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말뜻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실행이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윤리와 예수님께서 제시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의 질적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궁극적인 어떤 차원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막연한 목표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당장 실행해야 할 행동규범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윤리가 일반적인 윤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일반적인 윤리는 호혜적인 쌍방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예수께서 제시한 윤리는 먼저 일방적으로 베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윤리란 저쪽에서 해 준만큼 이쪽에서도 당연히 갚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가르친다면, 예수의 윤리는 내가 원하는 만큼 먼저 상대에게 베풀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윤리가 ‘최소의 원리’ 곧 상대가 해 준 만큼 ‘최소한’ 감당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다면, 예수의 윤리는 ‘최대의 원리’ 곧 내가 원하는 만큼 ‘최대한’ 베푸는 원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일반적인 윤리가 대가를 서로 주고받는 관계의 차원을 전제하는 반면, 예수의 윤리는 대가 자체를 파기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든, 어떠한 사람에게든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할 올바른 도리를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절대적 베풂의 윤리는,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나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누가 6:35)는 것을 구체화한 행동의 원칙을 말합니다. ‘해는 비추는 곳을 가리지 않는다’(마태 5:45)는 것과 통하는 정신을 따르는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마태복음은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요구로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8)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취해야 할 행위규범의 근거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니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역시 자비로워야 한다는 마땅한 요구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두 가지 행동규범(37~38절), 그리고 그 행동규범을 실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내적 품성(39~42)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 행동규범은, 첫째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요, 둘째 남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품성에 관한 이야기는 눈먼 사람의 비유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무슨 의미일까요? 거의 한 순간도 예외 없이 남을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이 말씀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남을 비방하지 말라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그 뜻을 그런 대로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를 아예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볼 것 같으면 참 난감해집니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남을 비판하지 말라’(<개역한글판>는 말로 인용되는가 하면, 그 어떠한 것에도 비판을 하지 말고 용인하라는 의미로 오용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의 진의를 진지하게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이 말씀은 남에 대한 판단 자체를 금지하거나 옳고 그름 자체를 판단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에 대한 판단,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없이 어떻게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남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궁극적인 심판관의 자리, 마치 하나님의 자리에 선 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의 진정한 뜻입니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여기에 본뜻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사람을 정죄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판단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예컨대 종종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거두절미하고 한마디로 ‘그 사람 참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 헤아려 보십시오. 내가 만일 그런 말을 뱉은 경우에, 거기에 어떤 감정이 실리는지? ‘그 사람은 이러이러해서 마땅치 않다’거나, ‘그 사람이 이렇게 해서 나를 곤란하게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합리적 근거를 대는 경우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판단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증오의 감정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한 판단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느낌일까요? 합리적인 근거를 대면서 말하는 경우와 완전히 다른 느낌입니다.
그와 같은 단정적인 판단, 곧 ‘정죄’는 다른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한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 자신은 완벽하다는 것을 맹신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자리에 선 것과 같습니다.
권력자들이 쉽사리 범하는 오류입니다. 성서는 어떤 형태이든 절대권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무신성(無神性),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권력은 스스로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무신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왕권을 극구 반대했던 사무엘의 증언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권력의 성격을 경고하고 있습니다(삼상 8장). 사람을 희생제물로 즐기는 힌놈 골짜기의 잔인한 신 ‘몰록’(열하 23:10)과 히브리어로 왕을 뜻하는 ‘멜렉’이 사실은 같은 말이라는 것도 그 권력의 무신성을 말합니다.
물론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히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겠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판단을 하고 그 누구를 정죄할 때 나도 모르게 마치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냥 하는 잘못은 쉽사리 범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위험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을 심판하지 않는 태도는, 보다 근본적인 베풂의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적극적으로 베풀라는 말씀인데, 이 대목의 비유적인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하게 되어”라는 표현입니다. 알곡이 엉성하게 쌓여 한 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빈틈없이 꽉 차서 한 되가 되게끔 하라는 것입니다. 베풀되 최대한 베풀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본받는 인간의 너그러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종일관 하나님은 긍정적으로 이해되고 있고,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 역시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점을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대목의 말씀은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어떤 보상을 미리 전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이해타산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먼저 넉넉히 베풂으로써 완성되는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제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추종하는 청중들을 향하여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원래 이 말씀은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지킨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 감히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그 바리새파 사람들의 태도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버리고 만 오만함을 간파했습니다. 바로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처럼 심판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일러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스승으로부터 배워 그 길을 제대로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는 그것을 다시 제자들과 그 밖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무리를 향한 말씀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나선 이들에게 어째서 또 이런 당부가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이들 역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빠졌던 잘못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는 한층 더 구체적인 언급으로 마음의 자세, 곧 앞에서 말했던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내적 품성에 관해 일깨워 주십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에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남의 허물을 먼저 보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적 성찰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눈동자에 장애물이 걸려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흔히 종교 전통에서는 이와 같은 내면적 성찰에 대한 강조가 외부의 부조리를 정당화해주는 근거로 남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깨워주신 이 가르침이 그렇게 오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종교와 윤리, 신앙과 윤리의 가장 근본이 되는 진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내면의 빛이 그 어떤 것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나아가 방해받지 않은 그 빛으로 내 앞의 형제를 비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눈이 맑아져야 이 세상을 맑게 봅니다. 그래야 스스로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고, 또한 우리의 형제들,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태조가 “자네는 어찌 돼지 같이 보이는가?” 했더니 무학대사가 “제 눈에는 임금님이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더 훌륭한지, 누구의 눈이 더 맑은지 일깨워주는 일화입니다.

모든 혐오와 차별의 논리는 어떨까요? 모든 혐오와 차별의 논리 저변에 깔린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은 용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모든 혐오와 차별의 논리는 자기 마음의 투영일 뿐입니다.

일본의 아베 총리와 관료들이 어째서 한국에 대한 보복성 경제제재를 가한다고 혈안이 되어 있을까요? 평화헌법을 고쳐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야 하는데, 한국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북한의 존재만으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북간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기에 그 이유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는 맞상대로 한국정부를 겨냥한 것으로 보입니다. 속내가 그것입니다.
한국, 그리고 한반도에서 진행되는 일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입니다.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어 긴장이 완화되는 것도, 강제징용노동자에 대한 배상판결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의 사실상 파기도, 후쿠시마 산 해산물 수입규제에 대한 WTO 판정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경제력에서도 한국이 일본을 바싹 추격해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을 싸잡아 ‘나쁜 나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일본이라는 나라의, 그 나라를 이끄는 집권세력의 자기 마음의 투영입니다. 내가 싸대기를 치면 저쪽에서 싸대기를 치는 것으로 나와 주기를 바라면서 사실상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강제징용노동자 배상판결,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문제, 후쿠시마 산 해산물 수입규제 이 가운데 어떤 것도 단지 민족주의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되는 사안은 없습니다. 평화 프로세스는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이루는 과정일 뿐 아니라 제국주의 유산을 청산하는 일입니다. 강제징용노동자 청구권 배상 판결 문제는 삼권분립하의 한국 사법부에서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자체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는 취지를 따른 것입니다. 또한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국제적 규범을 따른 것입니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분명한 것입니다.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높은 후쿠시마 산 해산물 수입 규제는 건강과 안전에 관한 사항입니다. 이 모든 사안이 정의와 평화, 인륜과 안전 등 보편적 가치와 관련된 사안들입니다.
이 모든 사안들을 국가간의 갈등 문제로, 민족주의적 감정의 차원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일본의 집권세력입니다.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세계관이 좁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그 만큼 자신들이 보편적 인권과 정의, 그리고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눈이 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일본의 무역 규제 그 자체와 관련해서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한국에 유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지만, 모진 이웃 때문에 우리 사회에 미칠 부정적 효과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벌개혁도, 경제민주화도, 노동권의 신장도 방해를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염려되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더더욱 지체되게 생겼습니다. 건강한 시민사회 또는 교회간 국제적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일 자리를 함께 하며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을 마주하는 그 의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온전히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맑아진 마음, 맑아진 눈으로 나를 보고 세상을 보기 위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진실을 깨달아 새기며, 세상을 밝히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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