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진정한 생명의 양식 - 요한복음 6:1~15[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8-04 14:38
조회
39217
2019년 8월 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정한 생명의 양식
본문: 요한복음 6:1~15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들 가운데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풍경은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이 펼쳐지는 상황, 곧 그 풍경과 주인공들의 이미지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일이 일어난 때가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가까운 때라고 했으니까, 요즘 달력으로 치면 4월 어느 날입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은 물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푸른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있는 우리의 풍경과 유사합니다. 아마도 군데군데 들꽃들도 피어 있었을 것입니다. 맑고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는 가운데 푸른 풀밭에 앉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운 풍경 한 가운데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진짜 주인공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이 더욱 눈에 띕니다. 바로 예수님과,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지닌 어린 아이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대할 때 언제나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의 성격에 주목합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해결해주신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으로서 예수를 기억하고, 그러기에 그분은 진정한 메시아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게 이해하는 것으로 족할까요?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기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사에서 불가능한 어떤 일을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해결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기적은 한마디로 나눔의 기적을 뜻합니다.
네 복음서는, 다소 상황 설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이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공통되는 특징이 있는데, 무리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해법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가 두드러지게 대비됩니다. 이 대비되는 태도는 빵의 문제, 경제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의 상반된 시각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상당히 의도적인 구성을 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의중을 떠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대비되는 구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생각을 보면, 무리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어디 가서 돈으로 먹을 구해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돈으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시장의 법칙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무슨 마음으로 그런 느긋한 태도를 취했을까요? 예수님의 해법은 바로 나눔의 지혜였습니다. 그 해법의 열쇠를 쥔 주인공이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가 지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거기에서 기적이 시작됩니다. 그 어린 아이가 지닌 것을 두고 감사드리고 난 후 나눴을 뿐인데, 오천 명이 충분히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지닌 사람이 어린아이였을까요? 어린아이는 순수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생명 본연의 순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의 표현을 따르면, 하늘의 빵입니다. 하늘의 삶을 땅 위에서 보여줌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 삶을 따르도록 하신 분입니다. 그 삶을 따르면 누구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빵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이치를 몸소 구현하고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인간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진실을 모릅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기적의 사건 현장에서도 사람들은 그 진실을 모릅니다. 바로 그 때 어린 아이가 등장합니다. 어쩌면 그 어린 아이는 인간들 가운데 함께 하는 예수님의 또 다른 분신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진실은, 지금 예수님도 그 어린 아이도 모두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빵을 누릴 수 있는 해법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는 그 진실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그 진실을 일깨워주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 어린 아이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하늘나라가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하늘나라를, 하늘의 생명의 빵을 다시 일깨워 주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하늘나라의 주인공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어린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를 가로막는 어른의 세계는 그 순수의 세계를 잃어버린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어린 아이는 그 세계를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진실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건을 전하는 요한복음의 전후문맥은 흥미롭습니다. 상당히 집요한 의도성을 띤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어린 아이가 안 진실을 사람들은 끝까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요한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말씀의 맨 마지막 구절을 볼까요?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아마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흥미롭게도 그 기적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고 전합니다.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통치자의 기본에 해당합니다. 백성을 먹여 살리기만 한다면, 경제를 살리기만 한다면, 다른 불의나 폭력은 다 무마됩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경제 살리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했을 때 언제나 그것을 자신의 성과로 내세우기를 즐겨합니다. 백성들은 그 성공을 그 통치자의 덕분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광합니다.
무리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신 예수님은 그 무리들이 당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낌새를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맙니다. 바로 여기에 하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나 어떤 지위나 권력을 얻기 위해서 기적을 베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를 사람들이 깨닫고 그 하늘나라를 살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 진실을 모르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합니다. 이미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늘의 양식, 하늘의 삶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기어코 그 진실을 말씀으로 설파하십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 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7~58).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이 살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것과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함께 생명을 구가할 수 있는 순수의 삶, 하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생명의 질서를 인간의 삶 안에 구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진실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둘 떠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떠난 사람이 있다고 전합니다(6:66). 다 떠나고 열두 명만 남습니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을 때 열광했던 오천 명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단지 열두 명만 남았습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생명의 빵을 설파하신 말씀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해 준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빵, 곧 이미 인간들 가운데 있는 하늘의 삶을 일깨워 준 사건입니다. 그 점에서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고 맙니다. 누군가가 베풀어준 것을 받아먹는 데는 익숙하지만 이미 자기 안에 베풀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두 주간 휴가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저 지난 주간 사흘간은 오사카에서 열린 제12회 한일 NCC URM(Urban Rural Mission)협의회에 NCCK 정의평화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하였고, 남은 기간중 주일은 탄고미야즈교회에서 설교한 후 오후에 교토교구의 대전노회교류위원회에 참석하고, 그 밖의 시간은 골방에서 꼼짝 않고 “박형규 목사의 신학사상”을 정리하는 논문작성에 몰입하다 돌아왔습니다. 한일관계에 대한 교단 총회의 성명서도 작성해야 했고, 교우도 ‘심방’도 했습니다만.^^
한일관계가 격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 사람들을 만나고 왔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URM협의회는 1978년부터 이어져 온 정신을 잇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아쉬움과 착잡함이 많이 남았습니다. 성소수자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측 참가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란 때문에 분노하였고, 이후에도 여전히 착잡한 마음입니다. 앞으로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인권과 성인지 교육을 반드시 거쳐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소수자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 의견을 내면서 하는 말들이 얼마나 참람한 말인지도 모르는 그 무감각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점잖기만 한 일본측 참가자들의 태도도 아쉬웠습니다. 의의와 성과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다른 이야깃거리가 많지만, 오늘 말씀의 문맥에 한정된 문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그에 앞서 제가 노동문제를 발제하였을 때, 그에 대한 한국측 참가자의 어깃장 놓는 질문 때문에 저는 또 분노했습니다. 성소수자 의제에서 가장 심각한 발언을 내어놓은 당사자, 그것도 같은 우리 교단의 총회본부에서 행정을 책임맡고 있는 분이 저의 심사를 몹시 불편하게 했습니다. 노동문제에 대한 해법에서 무조건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물경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제기한 물음의 취지에 따른 답변을 못할 바 아니지만, 그 자리에서 적절하지도 않고 다른 참가자들을 지루하게 할 것이므로,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응하기보다는 물음의 저의를 맞받아치는 방식으로 응했습니다. ‘경제법칙은 자연법칙이 아니며, 경제운영에서 인간 삶을 위한 가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신앙의 입장에서 어떤 경제가 인간 삶에 바람직한 것인가를 문제시한다.’는 취지로 물음을 일축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그렇게 착잡한 마음으로 보내다, 8월 2일 귀국하였습니다. 기어코 일본의 아베정권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경제전쟁의 선전포고를 한 날입니다. 그 소식을 접한 후 짐 싸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일전’이 아니라, ‘아베와 일본의 그 집권세력 대 한일 양국의 건전한 시민사회간의 대결’로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편적 가치를 우위에 두고 세계인들을 설득해가는 전략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경제전쟁을 걸어왔으니 만큼, 그에 대한 현실적 대응 또한 당장 절박한 문제입니다. 일본에 대한 경제의존성을 탈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한국사회의 오랜 지속되어온 경향처럼 단지 대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차제에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방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존하는 경제생태계의 조성하여 경제민주화를 이루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익을 보장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가치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진정한 ‘극일’은 단지 경제적 전쟁 그 자체에서 패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는 사회문화적 포용성의 차원에서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방향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3ㆍ1운동이 항일 자주독립운동에 그치지 않고, 세계적 평화를 표방하고, 동시에 민주공화국의 탄생 계기가 되었던 것과 같은 그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담화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주주의 역량 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그 자긍심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진실, 단지 빵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라는 진실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진정한 생명의 양식을 나누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들 가운데 있는 생명의 빵을 함께 나누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이미 우리들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를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있는 생명의 기운, 서로 기운을 나누는 삶을 몸소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베푸신 그 하늘의 삶을 맘껏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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