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가족 - 마가복음 3:31~35[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9-15 14:59
조회
11976
2019년 9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가족
본문: 마가복음 3:31~35



한가위 명절을 맞이하여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즐겁지만은 않은 분들도 있겠지요?^^
마침 지난 한 달 동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이야기가 온통 언론을 채우는 동안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공인으로서 책임을 맡아야 하는 사람이기에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에서 비켜갈 수는 없지만 한 개인의 가족 사정이 그렇게까지 까밝혀져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기도 했고, 한 사회 안에서 가족이 갖는 의미의 음양을 동시에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가족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를 보여 주는,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예수님에게서 혈육상의 가족의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역사적 존재로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셨던 예수님에게도 분명히 혈육상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목수인 아버지 요셉,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 형제는 오늘 본문말씀과 병행구절(마태 12:46~50; 누가 8:19~21)에 따르면, 적어도 두 명 이상의 형제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구절(마태13:54~56; 마가 6:3)에 따르면, 남동생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적어도 두 명의 여동생 포함해서 최소 여섯 명의 동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맏아들’이었습니다(누가 2:7). 그 형제들 가운데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누가복음에 의하면(1:36),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친척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가족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가족과 다르지 않은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가족관계 안에서 책임과 의무를 졌을 것이고, 그 가족관계 안에서 삶의 안정과 갈등을 동시에 겪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특별히 예수께서 가족관계 안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바로 앞에 전하는 바를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미쳤다고 해서 그 가족이 예수를 찾아 나섭니다. 단순히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붙잡으러 나섰다고 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가족들은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찾아 나선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를 불러내려 합니다.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생존해 있지 않은 탓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불러내려 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님은 참 독한 분입니다. 어떻게 곁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극적으로 전하고자 한 복음서 기자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첫 번째는 기존의 혈육상 가족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족이기주의’라는 말을 씁니다. 사회적 명분이나 대의는 안중에 없고 자기 가족밖에는 모르는 태도를 말합니다. 꼭 ‘가족이기주의’라 하지 않고 ‘가족주의’라 할 수도 있습니다.
꼭 적나라한 어떤 이해관계를 과철하고자 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아주 단순히 일상사에서 어떤 시비가 붙었을 때, 그래도 ‘내 자식이’ 혹은 ‘내 형제가’ ‘내 부모가’ 한 것이 옳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냉혹하게만 보이는 법의 논리에서도 이러한 ‘가족주의’는 어느 정도 보호를 받습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가족이 그를 보호했을 경우에는 ‘불고지죄’의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 정서요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에서 보여 주는 태도는, 아주 단호하게 이와 같은 ‘가족주의’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전후문맥을 통해 예수님의 그와 같은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악한 세대를 말하는 문맥 바로 뒤에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가족이 악한 세대와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사람이 제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제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태 10: 34~38)
종교적 열광주의를 내세우는 말씀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딪혀야만 하는 악한 세상과의 갈등을 구체적인 가족관계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족관계, 가족주의가 ‘악한 세대’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고 그것을 강화하는 온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내 가족밖에 모르는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평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가족관계, 그러한 역할을 정당화하는 가족주의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족이 갖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길러준 보금자리로서의 가정, 사랑의 유대로 맺어진 가족, 그래서 삶의 안정을 누리게 해주는 그 가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가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이 말씀은 바로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족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새로운 대안적인 가족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은, 그 새로운 관계를 여전히 가족관계의 언어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새로운 관계가 마치 진정한 의미의 가족관계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대립하는 세상의 평화, 곧 거짓 평화를 정당화하고 강화해주는 가족주의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써 연결된 새로운 가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두 번째 초점이요, 예수께서 진정으로 하시고 자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자면,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가정과 가족의 경험이 ‘내 가족’만의 것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의 가족’의 경험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거듭난 가족’ ‘가족의 거듭남’입니다. 그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사회화’ ‘사회의 가족화’를 말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선 진정한 가족’으로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유대로 다시 구성되는 사회를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혈육만을 위해서 헌신하는 가족, 그래서 자신을 위한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지되고 있는 가족관계를 부정하고, 그 대안으로 제시한 ‘하나님의 가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뭉친 새로운 공동체요, 혈연이 아닌 공의로 뭉친 공동체입니다. 혈연적 가족관계의 유익함을 누렸고, 그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제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임을 자각하라고 일깨우시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참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뭉친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는, 그러나, 뜻으로만 뭉친 메마른 결사체는 아닙니다. 그저 비상한 일을 담당하기 위한 비밀결사나 소위 ‘조직’과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어떤 업적 지향의 도구와 같은 조직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는 밥상을 함께 나누는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늘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나눈 사랑의 식사가 이 공동체의 가장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친밀한 사랑의 식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들 자신의 몸으로,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식탁에는 누구든 참여함으로써 존중받고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의 원형을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가족주의를 넘어선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가족,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그 하나님의 가족은 사랑의 유대로 서로에게 힘이 될 뿐 아니라 공의 가운데 서로가 존중받고 저마다의 삶을 보장받는 관계를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성이 무너져 내리고, 따라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망가진 이 사회를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력에 의해 얼마나 심각한 방해를 받고 있습니까?
지난 주간 저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당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두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10일 당일 오전에는 93일째를 맞이하고 있는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씨의 고공농성 현장을, 오후에는 44일째를 맞이하고 있는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김수억씨의 단식농성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농성중인 톨게이트노동자 연행 소식, 그리고 강제연행을 막기 위해 여성노동자들이 윗도리를 벗고 농성을 하고 있다는 참담한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순간 ‘이거 1970년대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조국’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정책 ‘파국’이 문제다.”라고 제가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만, 촛불민의로 탄생한 지금 정부하에서 노동현장을 이렇게 빈번하게 쫓아다녀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이뤄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업은 무시하고, 정부는 이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촛불민의를 위임받은 정부마저 무력한 상태에 빠질 만큼 어마어마한 힘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가족’을 내세우는 대기업은 전혀 가족적이지 않고, 가족해체의 위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만이라도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실상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렇게 무너져버린 사회를 향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룰 것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저마다의 가족에서 사랑의 유대를 나누고 삶의 안정을 누리고 있다면, 그렇게 누리는 사랑의 유대와 삶의 안정을 오늘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더불어 누릴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가족을 희생해서 누리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말씀을 지고의 이상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 뜻을 이룰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