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땅에서 하늘을 볼 수 있기에 - 누가복음 3:10~14[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2-15 18:46
조회
13741
2019년 12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땅에서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본문: 누가복음 3:10~14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포한 세례 요한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행해야 할 바를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한 대목만 읽었지만, 3장 1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 전체를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몫을 맡았던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길을 예비하라고 이르면서 엄청난 선언을 합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케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4~5)
이 말씀은 사실 천지개벽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굽은 길을 곧게 하고 험한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은 천지의 개벽입니다. 이것은 마치 앞서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와도 같습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1:51~52)
이렇게 노래했던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사악한 세상의 질서를 바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놀라운 선언을 한 만큼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비상한 각오를 다지도록 선포합니다. 도저히 일상적 어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아주 거친 말로 선언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어떤 상황일까요? 시대의 징조를 예감하고 세례 요한의 말을 따라 세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아두는 것이 앞날을 대비하는 데 바람직하다는 것에 적어도 동의를 한 셈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들을 보고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아니 자신에게 세례를 받고자 다가온 사람들에게 어쩌자고 이렇게 심한 말을 했을까요?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진정성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의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속사람의 모습은 그대로인 채로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를 일종의 보험 정도로 생각한 사람들이라 하면 될까요?
이들을 보고 세례 요한은 하나의 의례로서 세례를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세례는 곧 회개를 뜻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그에 걸맞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의표를 찌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조상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구원받은 선민의 대열 가운데 있는데, 무슨 새삼스러운 세례며 회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더욱 격하게 선포합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외적 형식으로서 세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이뤄져야 하고 그런 만큼 구체적인 삶으로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본문말씀은 그야말로 추상같은 세례 요한의 선포입니다.

그렇게 선언한 세례 요한 앞에 무리들이 몰려와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이 답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많이 받지 말아라.” 군인들까지도 찾아와서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이것이 요한의 대답이었습니다.
바로 앞의 엄청난 선언, 그리고 그에 이어 그러면 어찌해야 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내놓은 답변 사이에 상당한 온도 차이가 있습니다. 묘하다고 느껴질 만큼 긴장이 있습니다. 어법이 단호하다는 것은 똑 같은데, 그 내용은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이 대목에서 요한은 언뜻 보기에 근본적인 회개를 요구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다가선 사람들은 그 부류를 특정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세리와 군인들까지 있었습니다. 세리는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사들인 세무업자들을 말하며, 여기서 군인은 로마의 군대에 속한 사람들이기보다 헤롯 안티파스의 군대에 속한 사람들이거나 지방경찰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세리나 군인은 그 일에 종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악시되었고 민중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정당성을 갖지 못한 권력 체제의 하수인으로서 민중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천지개벽의 선언에 걸맞은 요구라면, 마땅히 불의한 그 체제를 떠받치는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해야 될 텐데 이 대목에서 요한은 그런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부패하고 범죄적인 체제의 전복이나 그로부터 벗어나라는 요구는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묘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물음을 던진 사람들은 대단한 각오를 하고 있었을 것이고, 제법 비장한 마음으로 대단한 요구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어쩌면 상식적인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나머지 한 벌을 나눠주고, 음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역시 나눠주고, 세리는 정해준 대로만 받고, 군인은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을 하지 말고 자기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

이 묘한 불균형, 묘한 긴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이 요구, 별로 위험 부담이 없어 보이는 이 요구는 사실 평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체제의 변화를 위한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구체적 행위를 요구하는 요한의 이 선포가 겨냥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세례를 받는 자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곧 사랑의 실현이요, 정의의 구현이라고 집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답변은 급격한 체제 자체의 변화를 이루는 데 방점을 두지 않고 각자의 삶의 태도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이 요구는 간단한 것 같지만 간단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환기해보시기 바랍니다. 옷 두 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머지 한 벌을 남에게 주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음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남은 것을 남에게 거저 주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두 경우는 할 만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세리와 군인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당시 세리들은 정해준 대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상식이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었겠지만 그대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세리에게 재량권이 인정되었고 그 만큼 세리에게도 실질적인 이익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세리든 더 많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에 해당했습니다. 그것이 상식이었으므로 그것을 거스르기 쉽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정해진 봉급이 있었지만 그 봉급으로는 충분한 생활을 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가진 무력의 특권으로 강탈하거나 부당하게 고발해 그 재산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일이 예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상식을 거스르기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요구는 그 상식을 거스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체제는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것은 내버려두고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상식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손을 깨끗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깨끗한 손을 갖기 위해 노력하라는 요구입니다. 이것은 자기와의 싸움을 하라는 요구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편이든 저편이든 편승하기는 쉽습니다. 별 생각 없이 현실에 편승해 살아가면 편하고, 아니면 그에 강력히 저항하는 대열이 형성되어 있을 경우 그 대열을 따라 가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따를 만합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깨끗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깨끗해지려고 애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이것은 특별한 상황이 아닙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처한 지극히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처한 상황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모두 손 털고 자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고, 일상 안에서 각자가 의를 이루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사람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고, 불의를 보고 그에 대해 대대적으로 저항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처해 있는 일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몫을 감당하는 것도 결코 소홀히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조리한 현실의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일상에서 의를 이뤄야 할 각자의 몫이 방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종전선언과 더불어 평화체제가 아직 확고하게 자리잡지 않았다고 해서 적대정책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아직 새롭게 짜이지 않은 질서 안에서라도 신뢰와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교착국면에 빠진 남북관계, 북미관계를 보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 아닙니까?
‘너 하나 변한다고 세상이 변하느냐?’라고 자조할 때 ‘나부터 변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겠느냐?’ 하고 나아가는 삶의 태도, 오늘 말씀은 그 진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이 이 땅에 그리스도의 빛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서 방기하거나 유보할 수 없는 삶,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을, 스스로의 삶에서 선취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세례 요한의 선포는 그야말로 선구자로서 마땅히 선포해야 할 가장 적확한 말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길은 저절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발작 한 발작 이어지고 한 구간 한 구간이 이어질 때 비로소 하나의 길이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 후반부 세례 요한의 선포는 그렇게 길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태도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세례와 동시에 이뤄지는 회개의 열매, 그것은 곧 일상의 삶 한복판에서 마땅히 따라야 할 몫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삶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원동력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삶 한복판에 이미 배태되어 있습니다. 일상의 삶 가운데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사랑을 펼치려 하지 않았다면, 일상의 삶 한 가운데서 성실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최소한의 연민의 감정도 없는 이들에 대해, 불의를 숱하게 자행하고도 뭘 잘못했느냐고 하는 이들에 대해 분노할 수 있을까요? 일상의 삶에서 정의감이 없다면, 40년 전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뻔뻔하게 자축하는 자들을 보고 분노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바로 그 일상의 삶 한복판에서 이뤄져야 할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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