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처음이요 마지막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 요한계시록 1:9~18[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2-02 14:37
조회
18255
2020년 2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처음이요 마지막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본문: 요한계시록 1:9~18



여러 신화적 표상들과 비밀스러운 이야기 형식으로 엮어진 요한계시록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성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언로가 폐쇄되었을 때,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면 신앙과 양심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가 극단적으로 제약당할 때 특정한 확신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비의로 기록한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비밀스럽고 상징적인 표현들을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이 헤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근본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린다면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근본 뜻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은 1세기 전후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희망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에 해당합니다. 처절한 박해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수난, 불의에 맞선 순교자적 신앙의 신실함, 그리고 역사의 궁극적 심판자가 되시며 동시에 진정한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 초점만 분명히 알고 있으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요한계시록 서두의 한 대목으로, 저자인 요한이 그리스도로부터 말씀을 받는 장면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유배지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일곱 교회에 전하도록 명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어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분의 영광이 놀랍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가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발은 화덕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여기에는 구약성서에 그 연원을 둔 여러 상징들이 총동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알아야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토록 놀랍다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묘사된 내용을 두고 그 의미를 캐물을 수도 있지만, 이 시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묘사에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한 환상을 보여 주기에 앞서 스스로의 권위를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 그리스도 주 예수를 부를 때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교회당이나 교회의 기물들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A와 Ω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시작과 종말의 지배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이 어떤 각별한 의미를 지닐까요?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의미를 지닐까요? 혹시라도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이렇게 부르며 기도를 드렸다면 그 뜻을 어떻게 연상하였는가요? 교회에서 늘 그렇게 부르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늘 그렇게 부르니까 그저 습관적으로 말한 것은 아닌가요?
1세기 로마제국의 극한적인 박해의 상황에 놓여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그렇게 고백된 그리스도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이 말씀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역사의 주관자라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왜 각별한 의미를 지녔을까요?
전 근대 사회에서 황제들이 즉위하면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였습니다. 그 연호를 제정하고 또한 그 연호를 따른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연호를 제정한 자의 입장에서는 이제부터 자신이 지배하는 시대임을 알리는 의미를 지녔고, 그것을 따르는 자의 입장에서는 그 지배자의 질서에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예컨대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조선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숭정기원(崇禎紀元)이 사용된 것은, 연호의 사용이 단지 편의적인 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연호로 표현되는 하나의 세계질서에 대한 용인, 곧 세계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믿음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그 의미를 헤아려야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당시는 이른바 로마의 평화가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로마황제의 운명이 곧 세계의 운명과 동일시되던 시절입니다. 로마제국 내의 내란을 종식시키고 로마의 평화를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당대에 세계의 진정한 구원자로 칭송 받았습니다. 당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그를 이렇게 칭송했습니다.
“그는 국가를 결속시키는 기반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삶의 숨이다. 그가 제국에서 떠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다. 왕이 살아 있을 때에만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며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존재는 당대 세계의 운명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 상식적인 견해로는 로마의 황제가 곧 처음이요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실로 대담한 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이 강요하는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따르겠다고 의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대의 지배적 세계관을 따르지 않고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따르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어때야 할까요? 그것은 지금 현존하는 질서와는 다른 삶의 질서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고백할 때 과연 그렇게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그저 멋진 수사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는 삶의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 통상 ‘서기(西紀)’로 알려진 연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예수님 탄생 이후 2020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4년의 착오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의미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지 몇 년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연호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놓인 걸까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명목적인 뜻은 그리스도의 지배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서구문명의 세계지배를 뜻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적인 연대를 사용하는 문명권 또는 나라들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대개 보조적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말이죠. 우리나라에서도 단기(2333 + 2020 = 4353)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북쪽에서는 주체 연호를 사용합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천황의 연호를 사용합니다. 이슬람권에서는 그 나름의 고유한 연대를 사용합니다. 불기 또한 사용됩니다. 그 경우들은 각 민족 또는 문명권의 독자성을 나타내는 한 방식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역시 서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이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배를 뜻하느냐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그 고백을 삶을 통해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가질 때 그 뜻은 되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동시대 동일공간 안에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곧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빈번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발원지인 중국 우한으로부터 귀환한 교민들을 2주간 수용할 시설이 우리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지정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진천과 아산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규모가 커지면서 천안의 시설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지역의 한 정치인이 1월 29일 오후 7:38 문자를 날려 왔습니다. “격리시설 지정취소 시민 여러분의 강력한 성원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상돈 올림”
문자를 날린 그 시간에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다음날 아침 보고 깜짝 놀라 우선 번호 차단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캡쳐한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지역민으로서 부끄럽다는 말 한 마디 남겼습니다. 도저히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사태로 느껴졌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한 것은 혐오와 차별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위중한 사태 한 가운데서 자신만 위험을 피했다고 안도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엉켜 있지만, 그 가운데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눠진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과연 어떤 길을 따르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과 마지막이라 고백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결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인정과 포용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그 뜻을 저마다의 삶으로 구현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따르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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