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진리란 무엇인가? - 요한복음 18:28~38[이정희 목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0-02-16 21:00
조회
5832
2020년 2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리란 무엇인가?
본문: 요한복음 18:28~38
설교: 이정희 목사 (<살림의 상상력> 저자, 신학적 미학 연구와 강연 활동)



이 재판은 이상하지 않은가? 논쟁이 자꾸 엇나가면서 꼬이고 있는 것 아닌가?
"진리가 무엇이오?"
물었는데, 대답은 없다. 왜 대답하지 않았을까? 빌라도가 재판 이전의 모든 예수의 행위와 말씀, 가르침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아무튼 빌라도는 죄가 없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한다. 왜, 무엇이 이렇게 다른 주장을 하게 한 것일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려는 것의 초점은 자꾸 심문과 변호가 어긋나 보이는 것 같은 재판의 과정이 아니다. 그런데, <함께 생각해보자>는 말에 대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뭘 함께 생각해봅니까? 그냥 말씀하시고, 우리는 아멘 하면서 듣겠습니다. 생각하면 골치 아프거든요.” 할 것이다. 물론 속마음으로.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으니, 목사님이 진리란 이런 것이다, 말씀하면 저희는 아멘 하겠습니다, 한다는 것이다. 훈습된, 길들여진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인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빌면 ‘무지에의 욕망’(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의지)이 언제나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그리스도인의 관행은 목사님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아무튼, 그럼에도, 오늘 함께 생각해보려는 것은 "진리가 무엇이오?"라는 물음에 대해 진리란 이런 것이다 하는 대답을 찾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 우리가 “예수의 진리”를 증언하다가 체포되어 법정에서 “당신이 증언하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심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헬라스어 ‘증언’은 ‘마르테루소’이고 이 말이 martyr, 순교의 어원이다. 생명을 걸고 대답해야 한다. 오늘 가끔 만나게 되는 증인, 증언의 하찮음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대답이 아니라 묻는 것이다. 만일 자녀가 성장하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면 어떤 사태가 들이닥칠까? 교제하거나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어떤 물음이나 질문이 없다면? 어떤 관계든 물음으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엄마, 뭐야?”, “아빠, 왜 그래?” 이제부터 엄마 아빠는 분주해진다. 움직여야 한다. “그런 것 왜 물어” 하는 순간 생동하는 관계는 일그러진다.

물음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빌라도의 진리물음은 예수의 죽음[십자가처형}과 직결된다. 그러나 이 재판만으로는 예수 처형을 이해할 수 없다. 요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는 선포에 예수 처형 사건의 핵심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과 행위를 통해 자유하게 한 구체적인 사건의 예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작에 끝이 돌을 던져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 요한복음 8장 전체의 사건과 쟁론 속에서 집약된다. 우리는 간음하다 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여인에게 관심을 집중하지만, 이어지는 격렬 한 쟁론 마지막에 예수도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결말에는 무심하다. 요한복음 8장은 진리, 자유, 종[노릇], 죄, 아브라함의 자손 등 알아듣기 쉽지 않은 말들이 뒤엉키고 있다. 예수는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너희는 ‘죄의 종’들이다. 나의 말과 행위는 죄의 종인 너희를 자유하게 하려는 것이다고 역설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8:38)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8:40)
여기서 근본적인 세상, 역사 현실에 대해 한 가지 질문을 해 보자. 왜, 어떻게 어떤 사람이 ‘종’이 되었을까? 무엇이 어떤 누군가를 종이 되게 하였을까? ‘종’[노예]의 제도, 체제는 어떻게 지속되었을까? ‘빚’을 지거나 정복당했을 때. 그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두렵고 떨리지 않는까? 예수-진리를 증언하는 삶을 산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므로, 자칫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 아닐까? 예수-진리로 자유롭게 된 사람 혹은 사건의 전형은 무엇보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아닌가?
이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면서 슬그머니 들추지 않으려 하는 한 가지. 왜, 여자만? 간음한 남자는?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죄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이미 낙인찍힌 여자인데...?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을까? 그들의 삶이 달라졌을까? 여기서 드러나는 자유 사건은 기존체제의 척도를 통째로 뒤바꾼 사건이라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무엇으로, 어떻게? <오직, 사랑으로!>
이 사건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진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일으킨 자유의 <원-사건>이다. 발터 벤야민은 ‘원천’을 기원이나 근원을 횡단하면서 “생성의 흐름 속에 소용돌이로서 있으며, 그 리듬 속으로 발생과정 속에 있는 자료들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인식한다. “원천적인 것의 리듬은 한편으로는 복원과 복구로서, 다른 한편 바로 그 속에서 미완의 것, 완결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모든 원천 현상 속에는 어떤 하나의 형상이 정해지는데, 그 형상 속에는 하나의 이념이 그 자신의 역사적 총체성 속에 완성되어 나타날 때까지 역사적 세계와 거듭 갈등을 빚는다.”
그러므로 이 자유 사건은 도래하고 있는 하느님나라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의 삶으로 이루어나가야 할 사건의 원천이다. 사랑으로 이 세상의 척도를 바꾸라. 만물이 자유하게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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