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3/ 8 온라인 가정예배] 삶의 위기 앞에서 성찰하는 신앙 - 로마서 5:1~5[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3-07 20:10
조회
19375
2020년 3월 8일 사순절 둘째 주일, 청년주일 온라인 가정예배

시작 오전 11:00
인도 담임목사 피아노 백수현 박은경 박영옥 장구 정경록 정문자 이승철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청년주일 공동기문(수정)/ 다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으시고, 그 안에 살아가는 한 포기의 풀과 한 줌의 흙과 한 마리의 동물과 한 사람 한 사람 무엇하나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다들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버겁고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힘든 하루가 매일 반복되는 세상 속에 지내며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욕심과 분노와 절망에 빠져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십시오. 부디 모두가 보기 좋은,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청년 예수를 기억합니다. 세상의 온갖 혼란스러운 말들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무릎 꿇고 기도로 많은 날을 보내며 답을 구하시던 예수를 기억합니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미움받고 천대받던 이들을 사랑으로 살리신 예수를 기억합니다. 불의 앞에서 굴복하지 않으며 정의를 외치고 그 몸까지도 내어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를 따르겠노라 수 없이 다짐했지만 매일 무너지는 약하고 약한 저희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 그러나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수많은 불의 가운데에서 정의를 좇아 살아갈 용기를 주시고,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는 이들을 살리는 사랑을 주시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고 살아갈 평안을 주십시오.
청년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를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우리도 간절히 꿈꾸며 기도합니다. 약하고 약한 우리지만 청년 예수를 기억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갈보리산 위에”(새찬송 150 / 통일찬송 135)/ 다같이


묵상과 성찰 / 엘가, “아침의 노래”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정혜진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Malotte, “주기도문”(신영옥)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로마서 5:1~5 / 인도자


말씀나누기/ 삶의 위기 앞에서 성찰하는 신앙 / 최형묵 목사


2020년 3월 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삶의 위기 앞에서 성찰하는 신앙
본문: 로마서 5:1~5

사순절 둘째 주일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믿는 것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역설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앞의 4:25의 말씀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4:25)
이 말씀은 전통적으로 대속론의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죄인을 대신해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또한 그 덕분에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해 준 분의 숭고한 뜻을 따라 스스로 그 뜻을 실현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속론의 효과가 이렇게 귀결된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대속론은 오용되어 왔습니다.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지닌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였으니,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찰적이며 실천적인 삶으로 인도하기보다 주술적인 안도의 세계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 자신에게는 물론 살고 있는 세계 안에 그 어떤 변화가 없어도 그저 안주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저마다의 주관적 믿음만 강화될 뿐 아무런 변화 없는 인간, 아무런 변화 없는 세상을 정당화하는 편리한 도구로 사용되어 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은 전혀 새로운 사건, 곧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향한 출발점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먼저 믿음으로 이르게 되는 삶의 궁극적 목적에 관해 선포합니다. 믿음은 곧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의미와 궁극적 목표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평화는 단지 마음의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며, 또한 동시에 땅 위에서 이뤄져야 할 현실을 뜻합니다. 믿음은 바로 그 궁극적 목적을 향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참을 줄 압니다. 참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켜 고매한 품격을 만듭니다. 거기에서 희망이 굳건하게 자리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개역성경). 이 말씀은 그저 고상한 도덕률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인간은 새로운 주체로서 새로운 인간입니다. 5절 말씀에 따르면, 성령으로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 새로운 인간의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 새로운 인간의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라 죽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보편사적인 사건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봅니다.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신 사건으로 봅니다.
그 사건을 대속론으로 이해하는 대신 달리 이해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잔인한 하나님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기로 예정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깨닫지 못했던 진실을 예수님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데 말씀의 참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처해 있는 상황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인식하고 살아갈 방도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아리송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땠을까요? 사실은 사도 바울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금방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사건이고, 그런 의미에서 역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인간 구원을 위한 보편적인 사건으로 이해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기 의를 비판한 것은 단지 유대인만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한 표본으로서 유대인을 겨냥한 것뿐이지, 사실은 또 다른 형태로 그 자기 의를 내세우는 그리스인을 비판하고 있으며, 나아가 모든 인간의 자기 의를 비판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경험하고 있던 세계에 대한 인식, 곧 로마세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죽음은 바울이 경험한 그 세계와 떼어놓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가 단지 유대의 율법을 어겨 돌에 맞아 죽었다든지, 아니면 로마제국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처형당했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의 율법을 어겨 죽었다면 그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배에 군사력으로 항거했다면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특정한 체제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그 죽음이 보편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그저 진실을 선포했고 사랑을 실천했을 뿐인 그분이 로마의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사건을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을 나타낸 사건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 변방의 한 사내가 죽은 사건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해 했을까요?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 ‘황당함’이 더 없이 좋은 빌미였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일개 촌부의 죽음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형집행인이었던 총독 빌라도마저도 이유를 알 수 없어 하면서도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충실한 집행자 역할을 맡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죽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거기에서 모든 사람이 그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진실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 세계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죽음과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지 사랑을 이뤘을 뿐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체제의 현실, 바로 거기에 어떻게든 모든 사람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고난을 겪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른 사건의 보편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그 체제 자체,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건이 되는 것은,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모두 예수를 죽게 만든 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알아야 그로부터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곧 구원의 가능성으로 직결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나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악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선하고 의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체제에 연루되었다고 하면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새기는 바울의 선포는,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밑바닥 근원의 차원에서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인간의 삶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깨닫고 진정으로 새로운 인간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희망하고 살도록 일깨웁니다. 그것은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에 인간 스스로를 내맡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는 사람만 알고 있을 뿐 그 밖의 사람들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한 사건을 환기하며, 그 사건이 지니는 인간 위기의 상황과 인간 가능성의 상황을 동시에 통찰하고 그 보편적 의의를 역설합니다. 이로써 바울은 인간에게 나락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전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로 심각한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 처해 있습니다. 워낙 심대한 위기로 체감하고 있는 까닭에 위기 여부 자체를 두고 논란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를 대처하는 태도는 제 각각입니다.
한편에서는 위기의 근원을 깊이 성찰하는가 하면 당장 직면한 위험에 대처하느라 분투하고 있습니다.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를 불러일으킨 인간문명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장기적 비상상황을 유념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는 제안, 모이는 예배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진정한 신앙과 예배, 그리고 교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성찰, 다급하게 실질적인 위기 대응을 위해 연대하는 노력들(의료진들의 헌신, ‘달빛연대’ 등), 안타까워하며 어떻게든 위기 극복을 위해 정성을 모으려는 시도들, 최소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달라진 일상에 적응하고 있는 노력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각기 주관적 믿음대로 구도를 그려놓고 자기이익에만 몰두하는 행태도 있습니다. 사태 해결에 지혜를 모으기보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며 정치적 계산을 하는 태도(국내의 보수정치세력, 일본정부의 조치 등), 마스크를 사재기하며 한몫 잡으려는 행태, 공동체의 안전보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일부 종교집단의 태도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자신들만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신천지에 의해 감염이 확산되고 사회적 위기가 증대된 것은 그 나쁜 본보기의 극명한 사례입니다. 그 신천지에 젊은이들이 많이 현혹되었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과연 어떤 길이 모두가 온전한 삶을 누리는 길인지 분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나쳐 버리면 아무도 모를 뻔 했던 한 사건에 담긴 인간 위기의 상황과 인간 가능성의 상황을 동시에 통찰했습니다. 그 진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성찰하게 하고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도록 인도합니다.
오늘과 같이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는 위기 가운데서 우리가 과연 어떤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절망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 가운데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더욱 고양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요, 위로가 됩니다. 그 희망을 더욱 키워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우리 빈손을 모아”(살림의 노래 169)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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