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3/29 온라인 가정예배] 성문 밖 구원의 길 - 히브리서 13:12~16[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3-28 20:41
조회
2247
2020년 3월 29일 사순절 넷째 주일 온라인 가정예배

시작 오전 11:00
인도 담임목사 / 피아노 백수현 / 장구 정문자 / 찬양 김광식 김성래 서윤아 정문자 / 장구 정문자 / 음향 이장희 / 촬영 최시내

* 오늘 예배를 위하여 수고하여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주님!
아름다운 봄이 왔습니다.
새싹들이 움트고 꽃들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며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기쁨으로만 맞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인간에게 다가온 질병으로
온 세계가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찬 생명의 약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일깨워주시는 뜻을 따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나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 가운데 두려움을 넘어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 “구세주를 아는 이들”(새찬송 26 / 통일찬송 14) / 다같이


묵상과 성찰/ David Foster & Carole Bayer Sager, “기도”(신영옥)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정경록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히브리서 13:12~16 / 인도자


말씀나누기/ 성문 밖 구원의 길 / 최형묵 목사


2020년 3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성문 밖 구원의 길
본문: 히브리서 13:12~16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삶을 지탱시켜 주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든 아니든 그것이 사라지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어떤 것입니다. 흔히 ‘마음의 지성소’라고도 합니다.
지성소(至聖所)란 일 년에 딱 한번 모든 백성을 대표해서 대제사장이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 안의 가장 깊은 장소를 말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에서 볼 때 지성소는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중심이었고, 그것은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을 보증해주는 지표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어떤 마음의 지성소를 갖고 있습니까?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은, 구약성서 시대의 그 지성소 관념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형태와 의미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가운데서 최고 수준의 헬라어를 구사하는 히브리서는 유대인의 전통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사 종교로서 유대교의 전통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화해자로서 진정한 제사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의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빌어 말하되 그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제사에 빗대어 말하지만, 유대교의 제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의미의 제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내적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무엇을 믿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믿음을 역설합니다. 이 청중들은 유대교적 전통에는 익숙합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러기에 유대교적 상식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자 동시에 히브리서의 대미에 해당하는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제사의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제사를 드릴 때, 속죄 제물을 잡아 피를 성전 안 지성소에 바치고 그 몸은 성 밖에서 태워버렸습니다. 지성소는 일 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희생제물이 되는 동물의 부정한 몸은 성문 밖에서 태워버리고 오직 순결한 피만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온 백성이 순결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에서는 지성소만이 거룩한 곳이고 성문 밖은 부정한 곳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문 밖’ 곧 ‘진영 밖’으로 나아가자는 말씀은 그 통념을 뒤집어엎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지성소를 뒤바꾸는 말씀입니다. 성문 안에 있는 성전,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있는 지성소에서 드려지는 피로써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문 밖에서 고난을 겪으시고 세상의 화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정한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지성소는 성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문 밖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문 안’과 ‘성문 밖’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은 하나의 확고한 질서와 체제를 의미합니다. 성벽이 둘러져 있고 궁전이 있고 성전이 있고 지성소가 있어 조직화된 질서가 절대시되는 곳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의 삶은 그 격에 맞는 법도와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그 성문 안에 사는 것은 그 질서와 체제가 보장해주는 삶의 안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문 밖은 성벽도 울타리도 없고 반듯한 길도 없고 화려한 집도 없습니다. 성문 안의 질서를 따르는 시각에서 보면 무질서한 곳입니다. 사람들도 보잘것없습니다. 살아가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래서 성문 안의 사람들은 그 성문 밖을 부정한 곳으로 여깁니다.
성문 안과 성문 밖은 그렇게 대조됩니다. 성문 안에는 지체 높은 사람들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반면 성문 밖에서는 항상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소박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성문 안 사람들은 항상 성문 밖 사람들 덕분에 살아갑니다. 성문 밖 사람들의 고단한 노동과 소출 덕분에 성문 안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문 안 사람들은 군림하고 영광을 누린 반면 성문 밖 사람들은 섬기며 희생합니다.
‘성문 밖의 그리스도’는 비단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이 성문 밖에 있다는 사실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성문 안 사람들과 달리 성문 밖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문 밖 갈릴리 민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했지만, 성문 안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로마의 총독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고 결국 성문 밖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성문 밖 사람들을 표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치욕을 짊어집시다.” 성문 밖에서 사셨고, 그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치욕을 겪으신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자는 뜻입니다. 그것은 성문 안의 질서와 가치에서 볼 때 치욕일 뿐입니다. 그 치욕은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지 않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주어진 것들에서 안녕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주어진 삶의 질서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 다가오리라는 믿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도피가 아닙니다. 성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얻으려면 너무 고단하기에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위한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성문 안에서는 누군가의 힘에 의뢰하여 자신의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손에 들리어진 희생제물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제사장 말고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운명을 자기가 선택하지 못합니다. 통치자이든 제사장이든 나보다 힘 있는 누군가에게 내 몫을 넘겨야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성문 밖의 삶은 다릅니다. 제도가 보장하고, 제사장이 대신해 주는 어떤 의례를 따라야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스스로 선을 행하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진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구원의 희망을 맛봅니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로서 지성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스스로 선을 행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자리가 지성소가 되고, 바로 그 일을 행하는 때가 지성소를 찾는 순간이 됩니다. 성문 밖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성문 밖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것을 뜻합니다.

저마다의 마음의 지성소는 과연 무엇일까요? 스스로 물음을 던지며 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지성소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성문 안 성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성문 밖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복판이 곧 그리스도인의 지성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그 의의를 더욱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선을 행하며 가진 것을 나누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요 그 일이 이뤄지는 자리가 곧 지성소입니다.
우리가 흩어져 예배를 드릴 때 마땅히 우리의 마음이 향해야 할 곳 또한 분명합니다.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엄습해오는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 그것을 막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 전사회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삶이 무너지는 사람들, 더 나아가 스스로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위해 더 뛰어다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장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위기, 심각한 생명의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이들을 생각하고, 그들 모두가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지혜를 모으는 일의 중요성을 우리는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그 각성이 우리가 일상을 회복했을 때 또한 지속되고 그 각성에 따른 행동이 펼쳐질 때 모든 사람이, 모든 생명이 평화를 누리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외신의 보도를 보며 짐짓 놀랐습니다. 한국인은 정부에 대한 기대가 높고, 시민의식이 높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가 높은 것이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평상시 상식으로 보면 고개를 기웃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코로나19 사태에서는 틀리지 않은 진단일 수 있습니다. 역시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할까요? 그 평가가 옳다면 그것이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도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일상의 삶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고, 헌신적으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더 나아가 좀 덜 쓰고 덜 움직이면서도 사랑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면 오늘 겪는 위기는 중대한 전환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은, 소수만이 삶의 안위를 보장받는 체제와 삶의 방식을 넘어 모든 생명이 진정한 삶을 누리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진실을 새기며 그 길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십자가”(살림의 노래 132)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알림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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