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4/5 온라인 가정예배] 삶의 진정성, 관계의 진정성 - 마가복음 14: 3~9[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4-04 20:17
조회
1892
2020년 4월 5일 종려주일 온라인 가정예배

시작 오전 11:00
인도 담임목사 / 피아노 백수현 / 장구 정문자 / 찬양 김성윤 서윤아 이지수 정재영 차의숙/ 장구 정문자 / 음향 이장희 / 촬영 최시내

* 오늘 예배를 위하여 수고하여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하나님!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흩어져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여 주시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 주십시오.
머리로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옳은 일을 따르고,
관습과 규범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의 태도에서 벗어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바로 내 곁에 있는 자매형제들에게도
그 정성으로 대하게 하여 주십시오.
얕은 인간관계, 쉽고 간편한 삶의 방식보다는
진실을 따르고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서로 만나지 못하는 가운데서
영적인 교제로 오히려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 “오 영원한 내 주 예수”(새찬송 139 / 통일찬송 128)/ 다같이


묵상과 성찰/ “거기 너 있었는가”(박경민 대금연주)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김광식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마가복음 14:3~9 / 인도자


기다림의 찬송/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 찬양 임미현 교우, 반주 김두선 교우


말씀나누기/ 삶의 진정성, 관계의 진정성 / 최형묵 목사


2020년 4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삶의 진정성, 관계의 진정성
본문: 마가복음 14: 3~9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물면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 그 옥합을 깨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같이 있던 사람들이 분개하여 이 여자를 나무랍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나무라는 사람들의 말의 동의하지 않습니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니 삼백 데나리온이면 일 년치 임금이 되는 셈입니다. 그 돈으로 차라리 자선을 할 것이지 어째 그것을 낭비하느냐는 사람들의 태도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는 그 행위를 칭찬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얼른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상식으로 봐도 그렇고, 당시 예수님의 언행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여자의 행위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의 대비입니다. 여자의 행위는 참 무모해 보입니다. 단지 예수님 한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아무런 효용성도 없어 보이는데, 값비싼 향유를 한순간에 쏟아 붇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타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자의 행위가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흔히 이 이야기는 교회에 대한 물질적 헌신을 강조할 때 그 근거로 자주 활용되지만, 과연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전통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선한 일을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합니다. ‘자선’과 ‘좋은 일’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자선은 돈을 줌으로써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에 해당하고, 좋은 일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것으로 매우 특별한 행위입니다. 죽은 사람의 장례를 위한 배려도 이 좋은 일에 해당합니다.
이 여자가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전인격적인 자기 헌신’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손님을 대접할 때 발에 기름을 발라 주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었지만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왕이 임명을 받을 때에나 행하던 아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행위는 일상적인 손님 접대행위는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예비한 특별한 행위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기회가 아니면 돌아올 수 없는 기회에 특별한 정성을 쏟아 부은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단 한번밖에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귀한 사람, 어쩌면 가장 사모하는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이었으며 전인격적인 결단이었습니다. 그 비싼 가치를 지니는 향유도 사실은 그 여자가 가진 모든 것을 상징하는 표상일 뿐, 그 물건이 비싸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 아닙니다. 이른바 시장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을 정말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분에게 내놓은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전존재를 드러내놓는 그 행위가 다른 어떤 선행보다도 우선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은 자선 행위로 대치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고 자선을 행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도덕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종교적 계율에 맞게 행한다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내어놓는 결단과 헌신이 없다면 한갓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이 이야기는, ‘자선이 중요한지 예수를 섬기는 것이 중요한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를 때 전인격적인 결단과 헌신을 동반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문제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선이 ‘아니라’ 예수를 섬길 일이다” 하는 어법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 두 가지 일을 단순 대립시켜 양자택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원을 달리 이해함으로써 사실상 우리에게 두 가지를 모두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 곁에 있지 않다.”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자선과 예수에 대한 헌신 가운데 양자택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전존재를 드러내놓아야 할 그분이 내 앞에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전존재를 드러내놓을 수 있는 헌신이 없다면, 그 모든 행위들은 겉치레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행위의 밑바탕을 이루는 전존재의 개방, 전존재의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혹 더욱 어려워졌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드린 여인의 행위는 가장 진실한 사랑의 표현 행위로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지극한 정성, 그것이 여인의 행위입니다. 인간의 삶에 그것이 빠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지탱하는 데에는 정의와 평화, 그밖에 숭고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바탕을 이루는 지극한 사랑, 그것이 없다면 삶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의 행위는 바로 그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흔히 ‘거룩한 낭비’라고 일컬어지는 이 여인의 행위는 예부터 논란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초대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을 빌미로 예수를 섬기는 것과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을 구분하려는 태도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누가 거룩한 물건들을 만들거나 봉헌하는 것을 보거든 그리고 교회 벽과 바닥을 장식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거든, 이미 이룬 것을 팔거나 부수어 버림으로써, 그의 열성에 찬물을 끼얹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일을 하기 전에 묻는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령하라.” 이렇게 지혜로운 해법을 던져 주기도 했습니다. 그 정성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정성을 어찌 표해야 할지 묻는다면 그 때 합리적 대안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참 현명한 해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교회에 누군가 뭔가 가져 오면 제가 인지하는 한 그 마음을 보아 적절한 자리를 잡도록 신경 씁니다. 그 물건이 아니라 정성, 마음을 보아서입니다. 물론 사전에 물었다면, 이게 더 좋았겠습니다 하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족적인 조건들을 생각하면서 그 조건들을 충족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적이거나 교리적인 이해와 승인, 도덕적인 행위나 사회적 정의의 실천, 또는 금욕이나 경건, 아니면 열광을 동반하는 종교적 행위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요건들 모두 아니면 그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충족되면 신앙생활은 온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신앙인들은 그 어느 것 가운데 하나를 신앙의 전부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전존재를 드러내놓는 헌신이며 전인격적인 결단입니다. 진정으로 간절히 뭔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그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느끼는 헌신과 정성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 환원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마음과 정성입니다. 신앙은 그것으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완결됩니다. 아니,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은 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쏟는 정성, 믿을 만한 사람과 삶이 있고 그 믿을 만한 사람과 삶에 쏟는 정성, 그것이 잊혀져서는 안 되는 삶의 정수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말씀의 이야기는 여러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만큼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이라는 프랑스 영화로서 바로크 시대 비올을 연주하는 고음악가 이야기입니다.
초야에 묻혀 살아가는 비올 연주의 대가에게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제자 삼아 달라 요청하기에 연주를 시켜보는데, 스승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작곡이나 연주 모두 뛰어나 음악으로 충분히 밥벌이할 수 있겠지만, 결코 음악가는 아니어서는 못 받겠다고 선언합니다. 절규하다시피 간청하여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제자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원하던 궁중음악사로 들어가 스승 곁을 떠납니다. 주인공은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스승의 말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재능이 탁월한 자신이 어째 음악가일 수 없었을까 평생 화두 삼아 왔는데, 자신의 음악이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됩니다. 여차저차해서 스승의 집에 들어가 다시 만나 협연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힘, 오늘 본문말씀에서 옥합을 깨트린 정성을 그렇게 이해하면 조금 이해할 만할까요?
기능적인 역할과 효율성이 중시되는 오늘의 세태 가운데서 그 뜻이 우리에게 얼마나 실감이 될지 의문이기는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또 하나의 물음이 생겼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직접인 대면 관계 대신 온라인을 통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정말 구체적인 한 인간의 진정성은 표현될 수 있고, 상대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게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온라인 예배의 진정성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고, 교회의 공동체성도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논하면서 그 음양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술작품의 진품성, 곧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의 예술작품의 의의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인간관계의 진정성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과 신앙, 그리고 교회공동체 자체가 일종의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과연 직접적인 대면관계에서 드러낼 수 있는 그 진정성을 오늘의 조건 가운데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온라인 기도에 감동하고, 찬양에 감동하는 것을 보면,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조건 가운데서도 영혼을 움직이는 힘을 느낄 수 있고, 따라서 내 삶의 진정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결론을 내리면, 그것이 단지 어떤 기술적 조건 그 자체로 충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밑바탕의 그 마음이 있어야, 그것이 기술적 조건을 올라타고 널리 퍼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가 마땅히 마음을 쏟아야 할 데에 과연 어떻게 마음을 쏟아야 할 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답을 함께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조건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그 조건을 활용하여 더욱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내게 있는 향유 옥합”(살림의 노래 56)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알림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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