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4/12 부활절 온라인예배]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 고린도전서 15:12~18[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4-11 19:50
조회
2174
2020년 4월 12일 부활주일 온라인 가정예배

시작 오전 11:00
인도 담임목사 / 피아노 백수현 / 장구 정문자 / 찬양 김광식 서윤아 이정림 이지수 / 음향 이장희 / 촬영 최시내

* 오늘 예배를 위하여 수고하여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2020 부활절 남북기도문 / 다같이

생명의 하나님, 우리에게 부활의 복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긴 겨울 속에서도 새 봄을 준비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새 시대를 허락해주시기 간구합니다. 십자가 고난이 부활의 영광을 담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의 역경 속에서도 새 역사를 열게 하여 주십시오.
세계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전쟁과 기아, 기후변화와 전염병 등 천재와 인재가 뒤섞여 고통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불행의 뿌리에 인간의 죄악이 자리 잡고 있음을 고백하니 모두가 행복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여 주십시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동족끼리 총을 겨눈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경험했으니 다시는 싸우지 않기 위해 이제는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내게 하여 주십시오. 종전선언과 평화조약 체결로 이 땅에서 전쟁의 기운은 몰아내고 평화의 기운이 되살아나게 하여 주십시오.
올해로 6·15 선언이 20주년을 맞이합니다. 이 위대한 선언을 단지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함께 살아내게 하여주십시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불가역적 대원칙을 실제로 적용하고 실천하게 하여 주십시오.
한반도의 남북관계가 다시 살아나기를 소원합니다. 4·27 판문점 선언으로 한껏 부풀었던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들불처럼 타오르도록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시오. 좌절의 침울한 기운을 걷어내고 신선한 새 공기를 한반도 전체에 불어넣어 주십시오.
개성공단 여기저기에 다시금 공장의 불빛이 타오르게 하시고, 인적 끊긴 금강산 골짜기마다 화해의 걸음을 다시 내딛게 하여 주십시오. 이산가족의 평생소원을 들어주셔서 감격의 눈물로 이 땅을 적시게 하여주십시오. 비무장지대에서 군사와 무기를 철수하는 평화의 걸음이 이어지고 확산되게 하여 주십시오. 정치와 사회 각 분야의 끊어진 교류를 회생시켜 주십시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과 북이 생명의 안전을 위해 협력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로 인해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이 속히 회복되므로 우리 모두가 일상의 평온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부활은 생명·정의·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임 당한 자의 부활임을 고백합니다.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이 두 손을 맞잡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한반도 희년을 향한 부활의 거룩한 행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주님의 영을 충만히 내려 주십시오.
이 세상 모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 “즐겁도다 이 날”(새찬송 167 / 통일찬송 157)/ 다같이


묵상과 성찰/ “Une jeune fillete”(Arr., Jordi Svall) -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가운데서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김성윤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고린도전서 15:12~19 / 인도자


기다림의 찬송/ “예수 부활 했으니”(찬송 164) / 성가대


말씀나누기/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 최형묵 목사


2020년 4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본문: 고린도전서 15:1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 죽음을 딛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체에 해당합니다.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모순에 담긴 진실, 그러기에 역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진실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 부활의 의미가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얼마만큼 실감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 의미는 자명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한 것은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사도 바울에게서도 그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접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이 겪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다시 산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경험한 바도 없고, 따라서 죽음의 의미도 알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부활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1~58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바로 그 부활의 의미를 설파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증언은 성서 기록상 최초의 부활에 관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각별히 중요합니다. 부활신앙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승, 기록상 최초의 전승이라는 점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그 믿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힘주어 부활의 의미를 역설한 까닭은 바로 오늘 본문말씀 첫머리에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바울은 바로 그 의문의 상황에 봉착하여 부활의 의미를 하나하나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 첫머리(1~11)에서 바울은, 부활사건이 단 한번 일어난 사건, 다시 말해 이른바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에게까지 나타나셨다고 함으로써 부활 사건이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12~34)에서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무엇을 뜻하는지 집요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본문말씀(12~19)은 한마디로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단 말입니까?’로 집약됩니다. 그 다음(20~28)은 현재적 삶과 전혀 다른 삶의 실재로서 부활의 체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께서 삶 가운데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삶으로서 부활의 삶을 역설합니다. 그 나머지(29~34) 부분은 지금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부활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15장 첫머리가 이전에 일어난 부활의 체험을 말했다면, 이 대목에서 바울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부활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31) 하는 고백은 곧 “나는 날마다 죽고 나는 날마다 거듭납니다.” 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지막(35~58)으로 바울은 다시 사람들의 의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부활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몸의 부활을 강조하되, 썩을 몸이 아니라 썩지 않을 몸으로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씨앗의 비유를 통해 그 부활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활의 의미에 관해서는 누차 함께 나눠 왔습니다. 부활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증언인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함께 나눠 왔습니다. 그런데 성서일과를 확인하고 보니, 오늘 본문말씀(12~19) 대목만 빠져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설교자로서는 이미 15장 전반에 걸쳐 있는 내용을 통해서 부활의 의미를 충분히 새겨볼 수 있었지만, 아직 미답의 영역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말씀의 대목은 사도 바울이 15장 전반에 걸쳐 부활의 의미를 요모조모로 설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근본 동기를 확인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여기에 답은 뭘까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 안에서만 약간 표현을 달리하지만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는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대목에서 그 진실을 확증하는 논거로 그 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라고까지 합니다.
부활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초자연적인 사건일 뿐이라는 이해에 비추어보면 이 이야기는 상당히 놀랍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는 단순명쾌한 주장에,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부활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실, 부활사건의 진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활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측면이라고 할까요? 바로 앞에서는 이미 부활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었고, 당시 시점에서는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바울 자신에게까지 체험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8).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 대목에 이르러서는, 부활사건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고 말합니다. 부활사건의 보편성이라고 할까요? 특별한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 부활사건을 시체의 소생으로 이해하면 납득할 수 없습니다. 부활사건은 그런 의미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이 여기서 부활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해야만 했던 사연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자꾸 그 의미를 한정해서 이해하려는 데서 곡해가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부활이라는 관념이 낯설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죽음 이후 삶이 지속된다는 것은 그렇게 낯선 관념은 아닙니다. 불교는 윤회를 말하고 있고,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불멸을 믿었습니다.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있을까요?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허무맹랑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뜻하고 겨냥하는 바는 사실 삶에 대한 경외입니다. 그 믿음은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의 발로입니다. 그러나 단지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정당화하기보다는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의 발로입니다. 그러나 윤회나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은 종종, 아니 많은 경우 숙명론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의 변화로 인도하기보다는 체념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의한 현실을 정당화하기까지 합니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하되, 그와 같은 관념과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죽음 이후 삶에 대한 급진적인 믿음의 표현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그 전과 그 이후가 질적으로 다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에 대한 철저한 단절, 철저한 부정을 촉구합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합니다. 그 어떤 신앙적 가르침보다 분명하게 우리의 삶의 전환,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마지막 구절(19)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삶의 지평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현재의 세상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부활을 체험한 삶일 수 없습니다. 부활은, 사는 것이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현실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삶을 삶답게 누리는 세계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 극적인 단절과 전환, 새로운 삶의 희망을 실현하는 일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허망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초점입니다.

우리는 이번 부활주일만큼은 얼굴을 마주하며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태가 엄중하여 사회적 거리두기가 다음 주일까지 연장된 상태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아직 모릅니다. 여전히 불편함이 많고 제약이 많습니다. 답답함을 경험하는 분들도 많고, 삶 자체가 무너진 분들도 있습니다.
이후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이전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요? 원상복귀하면 되는 것일까요? 지혜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오늘 코로나 위기 상황은 과학과 자본이 이윤을 위해 결합하여 내달려 온 세계의 결과인 탓에 그에 대한 근본적 반성 없이 원상복귀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들 수 있을 때 세계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삶의 질서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곧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하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위기 가운데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요성, 모두의 안전을 위한 서로간의 협력, 투명한 절차와 정보의 공유, 그 정보의 선용, 그리고 그 위에 쌓아지는 사회적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의료수준과 의료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제반 조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촛불의 선택, 그 외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비로소 실감하는 것 아닐까요? 그 극적인 과정이 없었다면 ‘헬 조선’이라 불리던 한국사회가 이렇게 놀랍게 다른 면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실감하게 되었을까요?
우리 사회는 그 놀라운 변화로 세계를 새롭게 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적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주간 4월 15일, 중요한 정치적 선택이 이뤄지는 날입니다.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시대정신에 역행하여 퇴행적인 반공이데올로기를 반복하고, 보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의 정신에 반하여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선동하고, 심각한 환경의 위기 가운데서도 여전히 개발만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계속 힘을 갖는다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정치가 이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차례의 위기가 끝나면 이전과 같이 복귀해버린 사회, 선거가 끝나면 또 자기이해에 급급한 정쟁을 일삼는 정치로 복귀하는 사회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제21대 총선이 정말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딛고 일어선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에 진정으로 함께 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살아 계신 주”(살림의 노래 113)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알림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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