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법 - 예레미야 31:31~34[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5-24 21:43
조회
4606
2020년 5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법
본문: 예레미야 31:31~34

<음성>


<동영상>


오늘 본문말씀은, 오늘 우리의 통념 가운데서 매우 평범한 성서 말씀의 한 대목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성서 전반을 통해 가장 심오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심오하고, 또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결정적 실마리가 이 말씀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면서 주체로서 스스로를 의식한다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더불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인간의 도드라진 특징은 자기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점이 인간을 운명적 질서의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해나가는 주체로 세워주는 요체일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 가운데서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간의 능력은 오랜 문명의 축적 결과이지만, 특별히 인류정신사에서 볼 때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적 성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시기가 있습니다. 정신사의 차축(車軸)이 형성된 시기로, 성서의 정신세계를 비롯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고전적인 정신세계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겪은 혼란과 고통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혼란과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극복하고 빛을 드러내게 할 것인가 하는 성찰로 이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의 본문말씀은 바로 그 각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멸망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고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죄값을 치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그 나라를 회복시켜주겠다는 말씀에 이어 옛 계약과는 다른 새로운 계약을 맺으리라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구별되는 ‘신약’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기원입니다.

오늘 말씀은 새 계약이 모세의 계약과 다르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또한 덧붙여 말합니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약속이 과연 어떤 점에서 모세와 맺은 계약과 다를까요? 본문말씀은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모세의 시내산 계약은 돌판에 새겨졌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 계약의 내용은 다른 자세한 설명과 함께 문자화되어 있기에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 해석에 따라 악용되기도 합니다. ‘율법주의’는 그 율법의 정신이 악용된 결과입니다. 지키지 않아 파기되고, 악용됨으로써 사실상 파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돌판에 새겨진 계약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약은 ‘가슴속’에 ‘마음’에 새길 것이라 했습니다. 형체가 없습니다. 그것을 전해 주는 돌판이나 문서와 같은 매체가 없습니다. 곧바로 마음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필요가 없어지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깨닫는 사람이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져 억지로 지켜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지키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경지입니다. 근대에 칸트가 내면적 도덕률을 강조하여 인간 삶의 보편적 법칙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기원이 되는 통찰이 오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공동번역>의 표현이 그 경지를 아주 실감나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뜻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개별 사람들의 마음만이 그렇게 바뀐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그렇게 바뀐다는 뜻입니다. 너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우리 모두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을 겪거나 고통을 겪는 일이 없는 세계입니다.

본문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에게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단지 ‘신약’이라는 말의 기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약’의 핵심을 미리 보여준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체제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구하러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진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옭아매는 체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희생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향하여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
안식일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식일이 제정된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이 제정된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데, 생명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금기사항(39×6=234)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깨달음이 중요하고, 그 깨달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끊임없이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갈라 5:1)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에 매여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닙니다. 법이 있든 없든 마땅히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율적인 규율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요체입니다. 그 신앙의 기원, 그 정신의 기원을 오늘 본문말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오늘 본문말씀이 일깨워주는 성서의 근본정신, 그에 기원을 두고 있는 복음의 정신이 무색해진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 국가는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직접 대표하는 이들이 입법부를 구성하여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있고, 그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지 사람들이 법을 제대로 따르는지 판결하는 사법부가 있지 않습니까? 언뜻 보기에 여기에 어떤 내면의 동기나 마음이 자리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 법치주의가 사실은 민중들의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요구였고, 달리 말하면 자율성의 발로였습니다. 곧 정치적 자유를 지닌 사람들의 요구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법치주의의 중요한 성격이 결정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뜻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사회 공동체의 범위가 확대되고 복잡해진 현실 가운데서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사회적 계약으로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규범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구성원의 주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문명국가의 법이라면 그래야 마땅합니다. 법을 만들어놓고 시행하면서도 그 법의 타당성을 따지는 헌법소원 절차를 두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법이든 그 자체로 절대화되기보다는 끊임없이 그 근본취지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집행의 정당성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절차를 동반하고 있다면, 인간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보편적인 도덕률 내지는 윤리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 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를 법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와 같이 한정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직접적 대면관계를 통해 알 수 없는 사람이 더욱 많아진 현실에서 불가피하지만, 여기에 온전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인간적 각성과 내적인 윤리적 요구가 배제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법적 장치는 사회 내 공유되고 있는 윤리의식에 기반한 사회적 위임의 정당성과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지 단순히 권력으로부터 부여되는 명령의 목록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사회가 어떤 법을 갖고 이행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 공동체의 성숙함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충분하고, 그것이 생활윤리로 구체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에 반하는 법이 통용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법, 예컨대 과거사법이 쟁점이 되고, 차별금지법이 쟁점이 되는 것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 사람은 누구나 차별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 바탕입니다. 우리가 깨달아 알게 된 것을 사회의 공통기준으로 삼자는 요구입니다. 내 삶의 자유와 안전을 지킬 뿐 아니라 공동체로서 사회를 지키는 방도가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하고 있는 진실은 단지 한가로운 목가적 시대의 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칫하면 중요한 진실을 놓쳐버리기 십상인 오늘의 현실에서 더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누가 뭐라 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깨달아 새기고 있는 진실을 따름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 길을 따르는 데서 참 자유를 맛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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