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끊임없는 상상력의 원천 - 사도행전 4:32~37[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6-14 14:17
조회
2959
2020년 6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끊임없는 상상력의 원천
본문: 사도행전 4:32~37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 43~47절 말씀과 사실상 그 내용이 겹치고 있습니다. 굳이 구별하자면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이 초대 교회공동체의 면모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윤곽을 묘사해주고 있다면, 오늘 본문말씀인 4장의 말씀은 공통되면서도 특정한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먼저 2장 43~47절의 말씀을 볼까요?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이 말씀이 전하는 새로운 공동체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가장 낮은 이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공동체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재현하는 공동체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며 진정으로 사귀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등급 지우고 인간을 가르는 원천적인 조건을 철폐하고 저마다 인간 그 자체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밥상을 함께 나눴습니다. 우리 말에 한솥밥 먹는 사이라는 말이 있듯이, 함께 밥상을 나눈다는 것은 이 공동체가 진정으로 새로운 가족으로 다시 탄생했음을 말합니다. 기존의 혈연으로 제한된, 그래서 그 혈연적 이기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서로 격의 없는 가족 관계를 이뤘다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 이룬 것에 자족하여 스스로 우상에 빠지는 것을 넘어 궁극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개방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막연히 그 어떤 힘에 기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인간들의 차이가 결코 절대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내 곁의 타인을 거리낌 없이 용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뤄지는 공동체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낫게 해주고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아 주는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4장의 본문말씀 또한 그 대의에서 2장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공동체성의 물질적인 기초라고 할까요, 달리 말하면 구체적으로 물질을 공유하는 가운데 형성된 공동체의 실상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기여한 두드러진 인물로서 바나바를 명시한 점에서도 더 구체적입니다.
역시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감화 받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을 핵심 메시지로 하고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상상력이 허용되지 않는 이념의 경직성 내지는 획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으로 온전히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소통과 신뢰를 말합니다. 강압적인 규율이나 불가피한 제도 이전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는 그와 같은 규율이나 제도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뜻을 함께 하고 마음을 함께 모으는 데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서로에 대한 신의, 서로에 대한 믿음, 곧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그 공동체는 시작되었고, 생명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것은 내 곁의 형제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었고, 그 믿음이 존속되는 한 지속되는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인간 역사의 희망에 대한 믿음과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인간 역사의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서 함께 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은 함께 한 구성원들에 대한 상호간의 책임 관계를 형성합니다. 여기서 물질의 공유가 중요한 요건이 됩니다.
오늘 말씀의 앞 대목(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34~35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언뜻 보면 같은 내용을 조금 더 구체화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진술은 미묘한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공동체의 점층적인 발전 과정을 함축합니다. 어떤 미묘한 차이일까요? 앞의 진술은 개인적 소유를 전제하고 있고, 뒷 진술은 그 개인적 소유마저 내놓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 부분의 말씀은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되 그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지 않고 사실상 공동선을 위해 활용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뒷 부분의 말씀은, 전 재산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진 소유 자체를 아예 공유로 내놓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되 공동선을 위해 그 소유를 활용했다는 것은 그리스적인 미덕과 정의에 부합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의 근거가 되는 『니코마스 윤리학』이 말하는 이상적 상태입니다. 재산을 가진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이상입니다. 『국가론』과 더불어 『니코마스 윤리학』은 그 이상의 중요한 기초를 제시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 신약성서의 말씀이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32절의 증언은 그 세계가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이상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 구현했다는 자긍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4~35절의 증언, 곧 바나바를 비롯한 유력한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내놓았다는 증언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져 온 오랜 이상이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초기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는 자기 재산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다수는 갈릴리 출신의 가난한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여기에 점차 다른 지역 출신의 비교적 유력한 사람들이 결합하였는데, 오늘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키프러스 출신 바나바는 자기 소유를 내놓을 수 있을 만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초기교회에 그렇게 몇몇 사람들의 기여가 큰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증언은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애초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그것을 내놓은 사람들의 기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신명기 15: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당신들이 참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증언은 그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초기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사회’에 대한 관념, ‘공동체’에 대한 관념을 자극하고, 여러 역사적인 운동들을 자극하였습니다. 교회만의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추구하였던 모든 운동을 추동하는 끊임없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성서로부터 기원하여 오늘날 인류 공통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의 그 보편적 정신과 메시지를 다시금 조명하며 우리 사회에 확산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화의 진정한 뜻입니다.
한국에서 정의론 열풍을 일으킨 바 있는 미국의 저명한 학자 마이클 샌델은 한국사회에 대해 의미심장한 평가를 하였습니다. “주변국들과 비교해 한국이 성공적인 방역 성과를 거둔 이유 중 하나는 넓은 의미의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결속력에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그는 강력한 공동체 의식, 고통 분담의 정신, 공공선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결속력이 세계 각국의 코로나19 대응과 그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착한 임대인’, ‘착한 선결제’ 등 코로나19로 힘든 자영업자들을 돕기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운동을 언급하면서 “여기(미국)에서는 드문 광경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했습니다. 이어 “미국과 여러 유럽 국가에서는 기부 활동이 줄지어 일어났지만, 한국의 그것은 자선과 기부를 넘어선 행동”이라며 “효율적인 정부조차도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코로나19 위기에서 드러난 한국사회의 저력을 우리 스스로 깎아내릴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이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동일하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회의하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죽어나가고 있고, 가정에서 아이들이 학대당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우리사회의 대응방식이 함축하고 있는 공동체성과 연대성이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똑같이 확산되고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과제를 새삼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 우리들만의 공동체성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 그 공동체성을 구현할 때 비로소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진실을 깨달을 때,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 더불어 결단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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