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으로 악을 이겨야 - 로마서 12:17~21[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7-05 17:16
조회
2814
2020년 7월 5일(월)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선으로 악을 이겨야
본문: 로마서 12:17~21



로마제국의 변방 유대 땅에서 그 제국이 가장 혐오하고 경멸하는 방식으로 처형당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이 도대체 어떻게 거꾸로 로마제국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라고 답하면 정답일까요? 물론 우리는 그렇게 답할 수 있지만, 그 섭리와 은혜를 받아들인 초기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 물음에 제대로 답할 수 없습니다. 놀랍도록 일관되고 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윤리를 빼놓고는 그 현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따라 하게 만든, 세계관과 그에 따른 실천적 윤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세상의 질서에 매여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길을 일깨워주고, 불가능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모범이 결국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게 된 것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은 그렇게 실현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의 본문말씀은, 바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대체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구체적인 공동체의 상황에 대응하여 변화무쌍한 언어로 이런저런 권면을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그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어의 편차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일관된 신학적 입장에 따라 구체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의 말씀은, 여기저기 서신에서 말했던 내용을 정제된 형태로 정리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교회공동체에 보낸 서신의 경우는 스스로 공동체를 세웠거나 방문하고 지도한 적이 있어 그 상황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구체적 사안에 대한 권면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로마서는 바울이 아직 로마교회에 방문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전한 편지입니다. 그러기에 이 서신은 일종의 자기소개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런 만큼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제된 언어로 가다듬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12:17~21까지만 읽었습니다만, 9~21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뉩니다. 9~13절은 주로 공동체 내부를 겨냥한 생활윤리를 말하고 있고, 14~21절은 공동체 외부, 그것도 심지어는 적대자들을 유념하는 가운데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윤리적 권면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 기초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9~13)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윤리적 덕목을 말할 때 많은 경우 당시 그리스-로마세계의 윤리적 덕목, 스토아철학의 윤리적 덕목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수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가 모든 윤리적 덕목의 기초로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궁극적 지평을 함축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의 임의적인 주장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권면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그래야 하고, 나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다짐할 만합니다. 가능성의 윤리입니다.

그런데 권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14~16)
이 권면 역시 사랑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황금율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위대한 정신세계가 가르치고 있는 그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는 태도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굳이 줄여 말하면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겸손의 미덕은 그리스도교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유대교나 그리스-로마의 가르침에서는 권장되지 않은 미덕이었다는 점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강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관념이 강했고, 그리스-로마세계에서는 그것이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자유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것이라는 관념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겸손, 곧 낮아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바울의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적대자들을 향할 때에도 그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신 32:35)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잠 25:21~22)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이 말씀을 들으면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옳은 말씀인 것 같기는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불가능성의 윤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울에게서 이와 같이 변용되고 있습니다.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그것은 불의에 대한 분노를 접으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며, 불의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고전 13:6).
줄여 말하면,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할지언정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합니다. 불의와 악을 미워하기에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을 척결하겠다는 것이 더 큰 악을 만들어내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적 차원에서 또는 개인적 차원에서 경험합니다. 그 악순환을 넘어서기 위한 길로서 원수들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흔히 말하기를 죄는 미워할지언정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 불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그렇게 하기 쉽지 않지만, 그렇게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다시 강조합니다. 원수 갚는 일을 스스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 합니다.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잠언 25:21~22). 여기에 머리 위에 숯불을 얹는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 ‘뜨거운 맛을 보여준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 근동, 특히 이집트에서 참회의식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참회할 때 그 표시로 머리에 숯불을 얹는 관습을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행위를 보며, 원수가 스스로 낯 뜨겁게 느끼며 참회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회의가 나올 법합니다. 선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지는데,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교훈은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바라는 궁극적 가르침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덕목을 실천할 때 우리는 자신감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자기 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실천하고자 할 때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능한 것만 하고 산다면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어떤 목표가 필요 없습니다. 지금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마땅히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데 절실히 요구되는 것,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여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 역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윤리를 극한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망상이 아닙니다. 그 통찰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성찰의 핵심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성찰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찰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 심지어는 적대자에게까지도 확장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기왕에 자신들의 범위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위대함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극도의 긴장감 가운데 보내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 때문입니다. 10여년 동안 여섯 차례 이상 시도되었지만, 번번이 좌절되어 왔습니다. 좌절된 가장 큰 이유가 뭘까요? 종교계 일부, 정확하게는 개신교계 일부의 반대 때문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반대하는지 국회의원들이 벌벌 떠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다행히 지난 총선 이후 정치적 조건이 바뀌었고,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면서 다행스럽게도 차별과 혐오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데 절대다수의 국민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88.5%,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정의당에서도 입법 발의를 했고, 국가인권위에서도 국회에 제정 권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번 만큼은 반드시 제정되는 데 일조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뛰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차별도 겪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고자 하는 차별금지법이, 적어도 개신교 때문에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불명예는 안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개신교=차별금지법 반대 오명은 벗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차원에서 몇 차례지지 입장을 천명하였지만 여러 교단의 협의체로 구성되어 있는 그 내부에서도 긴장감이 있는 상황이라, 공식 교단으로서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라도 그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여야겠다는 마음으로 지난 주간 그 입장을 밝혔습니다. 역시 긴장이 없지 않았지만, 적법한 절차를 통해 공식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 전문은 교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언론의 관심도 높아 지난 주간 또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기자가 말미에 반대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 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이 했으면 좋겠다 했습니다. 적어도 신앙이 인간의 구원에 관한 믿음을 의미한다면, 인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말했습니다. 물론 복음의 정신이 누군가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함께 사랑을 나누는 데 있다는 대전제 가운데 한 이야기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을 나누기에도 부족한데, 누군가를 정죄하고 혐오의 시선으로 배제하는데 삶을 허비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의 정신이 서로 사랑하라는 데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서야, 그 복음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 한 영혼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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