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존재의 깊이, 삶의 경외 - 누가복음 5:1~11[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7-12 14:06
조회
1795
2020년 7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존재의 깊이, 삶의 경외
본문: 누가복음 5:1~11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이야기는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반면에 본문말씀은 공생애 초반에 제자들을 부르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크게 두 가지의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깊은 데로 나아가라” 하는 말씀이 함축하는 바요, 또 하나는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는 말씀이 함축하는 바입니다. 깊은 데 그물을 던지는 행위와 사람을 낚는 것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이 연관된 사건들입니다. 그 깊이에 도달한 사람, 그 깊이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강압적인 힘이나 고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뛰어들 수 있는 품이 있어야 하고 뛰어내릴 수 있는 밑바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깊은 데로 나아가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뜻을 더 깊이 음미해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어부들, 곧 제자로 부름받기 이전 사람들의 삶은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한 삶입니다. 이들의 삶은 진지하고 일상에 충실하지만 뭔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히 밤새워 고기잡이를 했을 뿐 아니라 그 다음 고기잡이를 위해 그물을 손질하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충족되지 않은 갈증이 있습니다. 충족되지 않은 갈증, 그것은 곧 삶의 깊이의 차원을 함축합니다. 예수께서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고 하신 이 말씀은 바로 그 깊이의 차원을 일깨워줍니다. 합리적인 삶의 법칙으로만 해명되지 않은 차원입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저 밑바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저 꼭대기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숲 속에서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들을 사진에 담은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사진을 보고 저 깊은 우물의 심연을 연상했습니다. 저 꼭대기를 바라보는 시선과 저 밑바닥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그렇게 상통합니다. 그저 자기의 눈높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높이를 벗어난 시선입니다. 저 높은 곳과 저 낮은 곳은 그렇게 자기 시각에서 벗어날 때 보이는 법입니다. 과거의 종교적 관념에서 그것은 천당과 지옥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그것은 극치의 기쁨과 그와 상반되는 극한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깊이의 차원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기쁨과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기쁨이 무엇이며 인생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아는 시선입니다. 내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동시에 내가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태도입니다. 타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겉으로 드러난 대로만 보지 않고, 저 사람의 기쁨이 무엇인지 저 사람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혜안입니다.
그 깊이에 도달한 사람, 그 깊이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과 사람을 낚을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사이에는 하나의 극적인 반전의 계기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따라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고, 두 배에 가득해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뜻밖의 어획을 하였으면, ‘감사합니다!’ 큰 소리를 외쳐야 할 것 같은데, 베드로는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고백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베드로의 이와 같은 반응은,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경이감이지만, 그 경이감을 넘어선 경외감입니다. 자신의 상식과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그 깊이를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태도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고기잡이로 치자면 목수 출신인 예수님보다 베드로가 훨씬 나을 것입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어온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고기잡이의 비결을 알 만큼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그 상식을 벗어나는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거기에서 이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가 헛 살았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말뜻이 그것입니다.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이 고백은 말 그대로 떠나달라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베드로의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어선 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이제 뭘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처합니다.
아마도 상식의 차원에서 판단했다면, 애초부터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설령 고기도 못 잡는 마당에 궁하니까 그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여전히 삶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상식적 잣대를 고집하는 데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렸으며 다른 친구들도 두려워했습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해 왔던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지금까지 얕은 물이 전부인 것으로 알았는데, 저 깊은 물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앞에서 그 존재의 깊이, 삶의 깊이를 알고 어찌할까 두려워했다면, 이제 너도 다른 사람 앞에서 그 깊이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사로잡은 바와 같이 이제 너도 다른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어린 시절 길을 가다 물을 만나면 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깊은 물을 만났을 때입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웅덩이에 돌을 던지고 마음이 일지 않습니다. 흙탕물이나 튕길 게 뻔한데 뭐하러 던지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물에 돌을 던지고 나면 ‘풍덩’ 가라앉는 소리도 오묘하지만 그 파장 또한 오묘합니다. 너무 새파랗고 깊게 보이면 지레 겁을 먹기도 합니다. 저 깊은 곳에 뭐가 있을까라는 기대와 더불어 나마저 빨려 들어갈 것 느낌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함께 일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느꼈던 경외감을 그렇게 비유할 수 있을까요?

‘그 경외감을 가진 네가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그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전하신 것입니다.
내 앞에 선 존재의 그 깊이를 깨닫는 것은 양 측면을 함축합니다. 내 앞에 선 존재의 알 수 없는 심연을 깨닫는 것을 함축하는 동시에 그 깨달음으로 나 역시 그 누군가에게 그와 같이 깊은 심연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진실을 깨닫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러기에 비로소 ‘사람을 낚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일상적으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잔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은 그 꼼수가 다 드러나 보이기에 끌리지 않습니다. 반면에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끌리는 법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뭔가가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그에게 이끌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낚을 수 있는 깊이를 가진다는 것은 그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교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의 관계를 세 가지 형태로 나눴습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 ‘나와 그이’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나와 물질적 대상과의 관계입니다. 물질적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기계적입니다. 그저 관조하는 관찰자의 시선일 뿐입니다. ‘나와 그이’와의 관계는 그보다 한 단계 발전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 역시 나는 제3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격의 관계, 말 그대로 ‘관계’는 ‘나와 너’ 사이에 형성됩니다. 상대를 인격으로 대할 때 나 역시 진정한 인격으로 등장합니다. 피상적인 관찰자의 시선을 넘어 진정한 교류가 형성되고 서로의 인격의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수없이 많은 표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격적 호칭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3자 혹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나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나를 변화시키는 존재로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예수님의 놀라운 초능력의 발휘에 놀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전도에 나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겉으로 알고 있던 것을 넘어선 삶의 깊은 차원, 존재의 깊은 차원에 대한 깨달음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그 깊이의 차원을 추구합니다. 그 깊이의 차원에 이르게 되면 세상의 오묘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고, 인간 존재,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감각적 만족과 쾌락이 지배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더 나아가 시장의 가치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는 오늘의 세계 현실에서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로부터 삶의 평화가 가능하며,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땅히 저항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지 못하면서, 사람을 두고 다르다는 이유를 내세워 안 된다는 소리만 외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까? 그 무지몽매함과 완고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실로 삶의 깊이를 추구하며 깨달아,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평화를 이루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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