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차별하시지 않는 하나님 - 로마서 11:25~32[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8-16 16:14
조회
2828
2020년 8월 16일(월)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차별하시지 않는 하나님
본문: 로마서 11:25~32



성서의 말씀을 단편적으로 구절만 따로 떼어 이해하려고 할 때 어려움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로마서의 전반적인 맥락, 최소한 해당 주제를 말하고 있는 전후맥락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선민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그리고 궁극적으로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역설하고 있는 맥락에서의 한 대목입니다. 우선 본문말씀에 한정해 그 취지를 간략히 환기합니다.
본문말씀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비한 비밀을 말합니다. 그 신비한 비밀이 뭘까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완고한 상태에 머물러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반면 오히려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이 잘 났기 때문이거나, 그 완고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원히 그 상태에 머물러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만민이 동등하게, 평등하게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 요체입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그것이 어째서 신비냐 하는 것은 말씀의 전반적인 맥락을 찬찬히 헤아리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 11장으로 이어지는 말씀은 만민의 구원을 주제로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빛 안에서 동등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증언하는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심지어 하나님의 선민으로 간주되는 이스라엘 백성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구원의 대열에 합류하는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물음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이방인을 새롭게 선택했다는 이야기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바울은 그 물음에 대해 스스로 답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고,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이전 버림받은 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 현실이 만민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은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다.” 본문말씀의 결론입니다.
도대체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역설을 표피적인 인과관계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들면 그 의미를 깨닫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비로소 그 말씀의 진의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부분에서 지루할 정도로 버림받은 것과 같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두고 물음과 답을 반복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물음과 답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동족을 사랑하는지 역설하고(9:3), 자신이야말로 정통파 유대인이라는 것을 역설하기도 합니다(11:1). 그러면서 물음과 답을 반복할 때 바울이 유념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의 실존 그 자체입니다. 버림받은 것 같지만 회복되는 이스라엘은 인간의 실존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11장 11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의 허물이 지니는 이중적 효과를 말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허물은 이방 사람들에게 새로운 계기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은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 곧 이방 사람들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금방 깨우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안에 있는 사람의 잘못은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계 안에서 잘못된 일은 덮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눈에 띌 수 있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외쳐할 사실을 뭉개고 있을 때 밖에 있는 사람은 쉽사리 ‘아니다!’를 외칩니다. ‘저러면 안 되는데!’,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은 그와 같은 효과를 냅니다. ‘아니다!’라고 부정한 사람은 다른 가능성을 찾습니다.
그 부정이 되돌아올 때 부정당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다른 결과가 발생합니다. 두 번째 효과입니다. 저 바깥사람들이 자기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옳은 길을 따르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자기도 변화할 수 있지만, 오히려 방어적으로 기존의 자기 입장을 강화하면 새로운 가능성은 차단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역설하는 대목에서 “내 동족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11:14)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조차 하는데, 그 표현은 바로 그런 상황을 유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그 구성원 전반은 오히려 민주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권의식이 고양되고 있는데 반해 오히려 교회가 이에 뒤처지고 있는 상황도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서 11장에 이르기까지 바울의 일관된 논조는 그렇게 해서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 곧 하나님의 의를 따르게 된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은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다.” 본문말씀의 마지막 구절, 이 말씀이 그 결론입니다.
이 결론은 불순종의 과정을 거쳐야만 자비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적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비를 입기 위해서는 꼭 불순종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먼저 잘못을 저질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미 인간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현실을 전제합니다. 그와 같은 인간 실존의 표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본래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알지 못했던 이방인이 그 구원의 섭리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를 환기함과 아울러 그 뜻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스라엘의 허물 때문에 이방인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허물 때문에 이방인의 정당성이 저절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본문말씀의 서두에서 확인합니다. 상대의 잘못 때문에 내가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그런 상식이 통용되는 것이 현실일지언정,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근원에서 보면 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이 특권을 지닌 것이 아니듯 이방인 역시 특권을 지닌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의 동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어느 편이든 자신의 처지를 우월한 특권으로 여기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우월한 특권으로 여기는 태도, 바울이 그렇게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자기 의는 필연적으로 그 기준에서 벗어난 대상을 만들어냅니다. 그 인식은 필연적으로 차별의 논리로 귀결됩니다. 바울이 경계한 것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요체입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어쩌자고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였을까요? 사람들의 편견의 장벽이 그렇게 두텁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간명한 하나님의 뜻을, 저마다의 편견으로 꼬이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렇게 꼬인 실타래의 매듭 하나하나를 풀기 위해 장황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바울이 그렇게 힘들게 복음의 진실을 설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심정을 조금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 차별금지법의 정당성을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자기 의 때문에,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그 법의 취지와 쟁점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무장을 하고 나서는데 안이하게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차별금지법은 “헌법의 핵심원리이자 국제인권규범이 추구하는 평등권 보장의 근거가 되는 법률”(2020.6.30. 국가인권위 설명자료)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정의당안). “이 법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써 헌법상의 평등권을 보호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포괄적 평등법/차별금지법이 필요한 까닭은, 차별 문제를 다루는 개별법만으로는 중첩되는 다양한 차별 현실을 개선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장애, 성별,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을 규율하는 법률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개별법들은 적용범위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중첩되는 차별의 사안을 다루는 데 공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차별 현실을 종합적으로 해석하고 일관된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법률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2020.6.30. 국가인권위 설명 자료 및 2020.8.4. 국가인권위 평등법 관련 팩트체크 참조).
차별금지의 대상은 이렇습니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신분 등”(정의당안 23개 / 국가인권위안 21개)을 이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적용 영역으로는 고용, 재화·용역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행정·사법절차 및 서비스의 제공·이용 등 네 가지 범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차별의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대상과 주요 영역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은 뭘까요? 특히 교계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차별을 다루는 개별법 또는 국가인권위원회법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옹호법이 아닌가, 차별금지법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들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까닭은 이미 앞에서 밝혔고, ‘국가인권위원회법’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만 간략히 해명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에 대한 조사와 구제를 규정하고 있지만, 차별의 개념과 유형을 상세히 담고 있지 않기에 그것을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별행위로부터의 구제를 강화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평등권의 보장을 위한 규범 역할을 하는 법률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 법이 동성애 옹호법이 아니냐 하는 의문은 교계에서 제기되는 가장 뜨거운 쟁점입니다. 그러나 그 법은 여러 가지 차별금지 대상 가운데 일부로 성적지향, 그리고 성별정체성을 들고 있을 뿐입니다. 교계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관해 부언하자면, 그것을 차별금지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 그것을 조장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 모두가 평등권을 향유할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법의 취지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과는 다른 성적지향 또는 성별정체성에 대해서 신앙․신학적으로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 제기되고 있기에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교회가 신학적 과제로 안고 서로 다른 견해들을 경청하는 가운데 지혜롭게 대화를 지속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그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그 성숙한 대화의 과정이 지금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특정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질병으로 보지 않고 있지만, 설령 그것이 신앙의 입장에서 죄이거나 질병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차별의 요인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평등법/차별금지법은 그럴 수 없다는 오늘의 보편적 인권의 가치기준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성서가 이를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현대의 과학 또는 의학적 상식과 성서의 문자적 진술이 충돌한다고 여겨질 때,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성서해석학의 중요 과제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성서를 근거로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장애가 있는 경우 성직에 임직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와 같은 견해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었다고 해서 성서의 진리가 파괴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법이 종교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의문은 상당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특히 설교중 동성애 반대 입장을 밝히는 것도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우선 예배중 설교는 차별금지 대상이 적용되는 네 가지 영역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자유권적 기본권으로서 헌법이 보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의 표현으로서 어떤 견해를 밝히는 것 자체가 금지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유권과 평등권은 모두 중요한 기본권으로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입니다. 물론 특정한 맥락에서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할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경우 맥락을 헤아려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법리를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지 한편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평등법/차별금지법 자체로 종교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평등법/차별금지법은 종교로 인해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교육과 고용의 영역에서 종교적 자유가 침해받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합리적 의문의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교육자(교사, 교수 등)가 동성애에 관한 입장을 밝히는 행위가 규제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역시 설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 영역에 속합니다. 다만 교육이라는 공공 영역에서 특정한 신앙과 신념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강요받는 사람의 자유권을 침해한다 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 고용의 영역과 관련하여 교회가 운영하는 기관의 직원을 선발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이 경우에는 해당기관에서 종교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는 직무와 그렇지 않은 일반적 직무를 엄밀히 구별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다. 교목이라든지 기관목이라든지 종교 고유의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 그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그 직무를 맡는 것이 타당합니다. 반면에 종교 고유의 직무와 상관없다면 그 경우는 다릅니다. 예컨대 불교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에서 기독교인 사회복지사가 복지업무를 담당하는 경우 어떻게 봐야 할까 생각하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 의문이 근거가 없는 오해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평등법/차별금지법의 기본취지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모두가 평등한 삶을 향유하여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사회가 지금 절실하게 당면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로 고용형태, 곧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로 얼마나 극심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지 직시한다면 그 법의 기본취지를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법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한 시대에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을 법으로 규정하여 공동체적 삶을 규율하는 것이고, 시대상황이 바뀌면 그것 또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비추어, 복음의 빛에 비추어 그 정당성을 판단하고 수용여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근본 뜻, 오늘 말씀의 뜻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이를 완고하게 반대하는 이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 의,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거부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는데 저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걸까요? 그러나 저들처럼 우리도 저들을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뭘 보지 못하고 있는지 깨우치기를 바라고, 오늘의 시대 한 복판에서 복음의 참뜻을 함께 구현해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함을 입고 더불어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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