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0/4 온라인 공동예배] 이 사람을 보라! - 마가복음 8:1~10[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0-03 19:50
조회
1102
[10/4] 창조절 다섯째 주일ㆍ세계성만찬주일 온라인 비대면 예배

시작 오전 11:00
인도 담임목사 / 촬영․영상편집 최시내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찬양 드리고 말씀을 새기며
삶의 결단을 다지게 하여 주시는
은혜를 감사합니다.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늘 기억하게 하여 주십시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어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그 삶으로
스스로 기쁨을 누리며
세상에 희망을 전파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 “생명의 양식”(살림의노래 124)/다같이


묵상과 성찰/ “주님의 얼굴을 보라”(Boldback)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이선희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마가복음 8:1~10 / 정문자 교우


말씀나누기/ 이 사람을 보라! / 최형묵 목사


2020년 10월 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이 사람을 보라!
본문: 마가복음 8:1~10

예수님께서 굶주린 무리들을 먹인 이야기는 복음서에 두 번 등장합니다. 흔히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이야기(마가 6: 30~44; 마태 14:13~21, 누가 9:10~17, 요한 6:1~14)만을 기억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말씀은 그와 거의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또한 마태 15:32~39). 오천 명을 먹이고 사천 명을 먹였다는 점에서 우선 두 이야기는 차이가 있지만,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같은 점을 주목하면 어떤 것일까요? 무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 한적한 곳, 당혹스러워 하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 무리들이 가지고 있는 먹을거리의 확인, 무리를 떼 지어 앉게 하라는 말씀, 예수님의 기도, 제자들의 배식, 식사 후 남은 부스러기를 모은 것, 무리를 헤쳐 보내고 예수님과 일행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 등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와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거의 같습니다. 다른 점은 어떤 것일까요? 무리의 수, 떡과 물고기의 수, 남은 광주리의 수만 다릅니다.

거의 같은 이야기인데, 반복되는 이유가 뭘까요? 복음서의 내용이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이야기들마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 또한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이 사건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강조하는 뜻을 지닙니다.
두 이야기에서 두드러지게 대비되는 하나의 초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해법’과 ‘예수님의 해법’의 차이입니다. 걱정하는 제자들의 태도와 상반되는 예수님의 태도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두 이야기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동시에 오늘날 빵의 문제, 경제 문제를 바라보는 열쇠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을 보면 당황하고 있습니다. 6장의 이야기에서 당황한 제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생각해 낸 것은, 딴 데 어디 가서 먹을 것을 사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든 돈을 끌어와서 먹을 것을 구매해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상상력은 시장의 법칙의 한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해결방법이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걱정하지 않는 것은 다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해법은 나눔의 지혜였습니다. 이미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나누는 방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어이없는 방식이요, 도대체 그렇게 해서는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굶주린 무리 모두가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방법으로는 무리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돈을 가져와 빵을 구매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하지만 그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비현실적입니다. 경제규모를 키워 충분히 생산하면 모든 사람이 풍족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부의 불평등이 오히려 심화된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는 일용할 양식의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고 계신 것입니다. 시장의 법칙에 맡겨서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면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코로나19 위기 가운데 새삼 깨닫게 된 놀라운 진실 가운데 하나가 시경경제를 내버려두면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재난지원금을 풀고, 기본소득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이유가 뭡니까? 시장의 법칙에 맡겨두면 다수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위기로 비로소 드러난 현실은 아닙니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 코로나19 위기로 급격히 진전되고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는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먼 사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부의 격차를 만들어내는 불평등한 경제가 마치 자연적 질서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질서 안에서의 상식에 매여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서가 일관되게 일깨워주고 있는 일용할 양식의 충족을 가능하게 하는 나눔의 신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복음서에서 반복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진실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아직 모르겠느냐, 얼마나 더 보여주어야 알겠느냐?’ 반복의 일차적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말씀 바로 뒤에는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을 거부합니다. 이 기적을 보고도 모른다면 더 이상 보여 줄 것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의중입니다.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와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는 그 점에서 공통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두 이야기 사이에는 무리의 규모나 이미 갖고 있던 먹을거리의 수치, 남은 분량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양적인 차이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부수적인 의미를 지닐 뿐입니다. 복음서 기자가 이 이야기를 반복한 것이 그저 공통되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서는 상황에 대처하는 데 제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반면 오늘 본문말씀에 해당하는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서는 시종일관 상황에 대처하는 데 예수님의 주도적 역할이 두드러집니다. 또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서는 먹어야 하는 필연적인 요구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미루어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반면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는 그 정황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 무렵에 다시 큰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8:1~3)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분명히 전제되어 있고, 이를 보고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먹여야겠다고 마음먹고 하신 말씀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도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고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보다 일반적인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지 당장 일용할 양식이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정황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무리들이 처한 배고픈 상황, 그 무리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 그 마음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같은 이야기가 같지만 반복해서 기록된 진짜 이유가 아닐까 충분히 생각해봄직 합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며 말씀의 뜻을 음미하고 싶습니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그저 문자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운집한 무리로 환원될 수 없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의 상황을 헤아리는 예수님의 시선, 마음입니다. 저마다 개별적으로 고유한 삶의 정황이 있고 사연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 마음입니다. 사흘 동안 다들 제대로 먹지 못하여 그냥 돌아가게 되면 길에서 쓰러질 것을 염려하는 마음, 게다가 더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어찌 될까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 그리스어가 아니라 라틴어입니다.^^)”로 한 까닭이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의 책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말은 본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요한 19:5). 이 말은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과 철학, 예술의 상상력을 자극해왔습니다. 이 시간 심원하게 펼쳐진 그 상상력을 단 몇 마디로 반복하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사건이 함축하는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라는 경구로 알려진 이 말을, 예수님 자신의 시선과 마음으로 돌려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변에 모인 무리를 그저 한결같이 측은한 무리로, 그야말로 퉁 쳐서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무리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온전한 존재로 들어왔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어떤 집단으로 범주화되어 대상화될 수 없는 개별적 존재 그 자체로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에 대한 시선, 그 시선이 함축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일관된 태도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선 마음이 그 마음입니다(누가 15:4). 한 마리 찾아내어 백 마리 채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중요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 마음으로 그 누구든 인간으로 마주하고 어울리는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은 못마땅해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 세상에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마가 2: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마저 어겼다고 비난을 받았을 때에도 그 엄혹한 율법주의에 맞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까지 선언하셨습니다(마태 25:40). 말씀이 육신이 된 진실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 가운데 온전히 함께 하며 그 질고를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저 천상의 관찰자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그 마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을 하나하나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 사람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특정한 대상들, 여러 이름을 가진 소수자들을 편견으로 대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는 것은 그 시선, 그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소수자들이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거 없는 편견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 누군가를 혐오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일하는 일터에서 아무렇지 않게 잘려 나가는 사람들, 그 뿐 아니라 떨어지고, 끼이고, 깔리고, 뒤집히고, 불타 죽은 노동자들,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해 학대받아 죽은 아이들, 배고픔을 달래려고 라면을 끓이다 불에 온 몸을 그슬리는 아이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아니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며 늘 불안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온갖 사회적ㆍ종교적 편견과 혐오에 시달려야 하는 성소수자들, 삶의 난관을 헤쳐나갈 수 없어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은 우리사회의 단지 ‘몇 %’로 환원되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저마다 꿈이 있고,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함과 애착을 갖고 있으며, 또 그 누군가에게 모두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내 가족을 대하듯, 내 친구를 대하듯 이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근거 없는 편견으로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차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공동체로 모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추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진정한 구원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마음을 닮고 따르고자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 진실을 믿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그의 나라 온 땅에”(살림의 노래 30)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알림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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