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교리와 제도를 지키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 - 에베소서 4:22~32[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0-19 09:26
조회
367
2020년 10월 1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교리와 제도를 지키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
본문: 에베소서 4:22~32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이지만 사실은 사도 바울이 살아 있을 때보다 한 참 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에베소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비중을 중요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고 조직화되어가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될 즈음의 상황을 에베소서는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고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함축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의 열정 또는 그 믿음을 지키고 설파하고자 했던 사도들의 생생한 카리스마보다는 조직으로서의 교회, 제도로서의 교회가 현실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숭고한 뜻 또는 어떤 정신과 이념이 제도화될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중의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으로는 정신과 이념이 현실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의 제도화를 요구하고 시도하는 것은 그 정신을 현실로 정착시키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제도화는 언제나 퇴행적인 요소를 동반합니다. 제도 자체가 굳어지고 결국 그것이 절대화되는 경향을 띱니다. 그 때 어떤 정신을 담고자 했던 틀로서 제도는 그 정신을 짓누르고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는 제도의 불안정에서 오기도 하지만, 제도의 고착화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에베소서가 반영하고 있는 교회의 시대는 그 이중성을 안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는 복음을 보존하고 그 복음을 따르는 공동체를 보존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었지만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복음의 역동성이 훼손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한편으로 그 위기의 산물이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 위기의 극복 대안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구약성서 이래의 유대의 덕목을 반영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던 그리스-로마 세계의 보편적인 덕목을 반영하면서도,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을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자면 저자가 얼마나 깊이깊이 숙고하고 있는지 그 사려 깊음이 느껴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언뜻 보기에 그저 좋은 말씀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매우 팽팽한 긴장이 서려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삶의 대비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비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 사람의 삶의 태도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비되고 있는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은 그 이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편지 수신자들은 거의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옛 사람을 표상하며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을 표상합니다.
옛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미처 함께 읽지 않았지만 17절 이하를 보면 그들은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무지와 완고함, 수치감의 상실과 탐욕 등이 옛 사람의 특성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 세계에 매몰된 사람의 특성입니다. 무엇이든 나의 유익을 위하여 내 맘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르고, 소통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회중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밖에 있는 이방인을 비난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과거 삶을 답습하고 있는 교회 회중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하나의 조직으로서, 하나의 제도로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과거의 삶을 답습하는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교회생활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아니라 그저 외적인 표지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경고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교회의 이름으로, 신앙을 명분으로 표현되는 언행이 단지 그 이유만으로 정당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사람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미처 함께 읽지 않은 20절부터 오늘 본문말씀의 서두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게서 듣고, 또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무지와 완고함, 수치감의 상실과 탐욕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구현된 진리, 곧 예수 안에서 실현된 사랑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마땅한 삶으로, 그 삶은 정의와 거룩함을 구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이루는 삶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이루는 삶은 구체적인 생활 규범을 동반합니다. 25~29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이 말씀 또한 각각의 덕목에서 분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정해야 할 패덕과 긍정해야 할 덕행의 대비입니다. 부정해야 할 패덕, 곧 금령은 거짓말 하지 말라, 성내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험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그 뜻을 음미해볼까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거짓말 하지 말고 참말 하라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저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은 그저 일반적인 교훈은 아닙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여 엉뚱한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뭘까요? 이미 앞서 말한 예수 안에서 구현된 사랑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진리를 믿고 하나의 몸을 이룬 지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그 진리에 입각해 서로 교통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전형적인 대비 형식과는 다르지만, 말씀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화를 낼 수는 있지만 죄를 짓는 데까지는 이르지는 말라고 합니다.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는 그 말 자체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흥미롭게도 그 한도를 말합니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해 떠 있을 때 화가 났다면 해 지기 전에 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에게 틈을 내주는 격이라 합니다. 죄를 짓는 데 이른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권고는 명확하게 대비되는 긍정의 가치를 말하고 있지 않기에, 주어진 이 말씀만으로 그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히 잘못을 범한 이에게 분노할 수 있으나, 그 분노는 잘못한 상대가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닫게 하는 데 그 한도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한도를 넘어설 때 그 분노는 역효과를 나타내어 상대가 돌이킬 기회를 갖기보다는 오히려 완악해질 수 있고, 또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당사자 본인 스스로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죄를 범하는 것이요, 악마에게 틈을 내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
이 말씀 또한 흥미롭습니다. 다른 덕목과 달리 조금 문맥상 생뚱맞아 보이는데, 이 중간에 이 권고가 포함된 뜻이 무엇일까요?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계명을 연상시키는 권고이기는 한데, 이 권고가 지금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하여 선포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도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 도둑질이 뭘까요? 그저 남의 물건 훔치는 것, 며칠 동안 굶어 계란 한 판 훔치는 것을 뜻할까요?
그 의미는 그와 대비되는 덕목을 함께 생각하면 분명해집니다. 자기 스스로 노동하여 삶을 꾸려갈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생산적 활동을 감당하라는 것이 그와 대비되는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도둑질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땀을 흘리지 않고 부를 취하는 행위, 곧 불로소득을 취하는 것을 뜻합니다. 유대교의 문헌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희의 고개를 숙여 들일을 하고 농사일을 할 때 밭을 갈기 위해 힘써 수고하라.” “아들에게 수공업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셈이다.” 직접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 도둑질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중요한 밑바탕을 이루는 세계관과 긴밀히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이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나쁜 말은 문자적 의미대로 하면 부패한 말, 부패시키는 말을 뜻합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말이요, 관계를 갈라내고 파괴하는 말입니다. 대신에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을 적절한 때에 하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이 좋은 말입니다. 사람을 북돋고 관계를 돈독히 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말입니다. 그 말은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됩니다. ‘은혜가 된다’는 말이 그저 감동을 받는다는 정도의 의미로 남용되고 있지만, 그 뜻은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전해지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의 매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과 말을 주고 받는 데서 서로를 세워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을 거들먹거리면 된다는 뜻이겠습니까? 진정성을 갖고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사소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권고 이후 오늘 말씀은 결론격에 해당하는 권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참 인상 깊은 결구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말씀,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이 마지막 결구의 한 대목 한 대목 더 깊이 음미하고 싶지만 줄입니다. 모든 악의를 버림으로써 패덕을 행하지 않고 새 사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따를 뿐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이 사는 것입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이어지는 에베소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이루라고 합니다.
초기교회의 사도들과 그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지도자들이, 교회가 제도화되어 가는 그 현실 가운데서도 어디에 마음을 쏟고 있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교회 제도를 지키고 교리를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랑의 삶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한국교회는 이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받아들이고 오용합니다. 성소수자를 축복했다고 목사직을 2년 정직하는 판결을 내린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마음 쏟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스러운 현실입니다.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린 그런 교회라면 망하기를 기도해야 하고, 그런 교회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는 불복종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사랑의 복음을 교리를 수호하고 교권을 수호하는 것으로 악용한 이들은 거짓을 말하고 행하고 있는 이들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 안에서 온전히 구현된 사랑의 진실, 그것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불어 진실로 소통하며, 서로 연민을 갖고 친절히 대하며, 서로를 용납하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부르신 뜻입니다. 이 땅 위에 그 뜻을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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