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진정으로 평화에 이르는 길 - 마태복음 10:34~39[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1-01 16:57
조회
8874
2020년 11월 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정으로 평화에 이르는 길
본문: 마태복음 10:34~39



참 난감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늘 평화의 주님을 믿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씀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착각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완전히 우리의 상식을 거스르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누가복음 병행구절(12:51~53)은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며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분열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라 설 것이라고 합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가족에 집착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까지 합니다. 우리 말 번역에서 ‘사랑하는’이라 번역된 말은 ‘이웃 사랑’을 말할 때 개념과는 다른 말입니다. 속박이나 집착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미가서 7장 5~6절에 그대로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아라. 친구도 신뢰하지 말아라. 품에 안겨서 잠드는 아내에게도 말을 다 털어놓지 말아라. 이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툰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일 것이다.” 미가의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였던 이사야와 같은 시대 같은 배경에서 나온 예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셨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니, 더구나 가장 가까운 가족이 원수가 된다니, 큰일 아닙니까? 하기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며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는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들의 종교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그러한 상황도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와 같은 종교간 대립을 전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의 질서 곧 ‘로마의 평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정치력과 경제력, 군사력으로 지배하고, 그 힘에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로마의 평화’의 허구를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허구적 ‘평화’를 깨트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단일한 가치관과 질서에 의해 봉합된 평화, 강요된 평화를 깨트리고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질서를 그대로 용인하고 누리는 가족의 평안이나 심리적 안정감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 허구적 평화를 눈감아버리고 우리 가족만 평안을 누리고자 했을 때 그 평안은 궁극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여정에서, 스스로 가장 믿고 있는 가족 사이에서의 분열과 불화까지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가족 사이에서의 불화뿐이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있던 가족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선포함으로써, 그 놀라운 사태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를 넘어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의 평화’는 힘의 우위를 전제로 하는 평화입니다. 오늘날 그 질서가 동요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아메리카의 평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들 중심으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도 감수할 수 있다는 평화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 목적뿐 아니라, 그 과정과 수단까지도 평화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두 평화가 대립될 때 파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말씀이 지향하는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길은 이미 앞선 예수님의 선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마태 5장).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평화의 복음입니다. 그 표면의 언어를 볼 것 같으면 전적으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오늘 본문말씀과 더불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유명한 산상수훈에 덧붙여져 원수사랑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선포된 말씀으로, 평화를 이루는 길, 그 방법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 5:38~42)
첫 구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환기합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탈리온법(동태복수법)입니다. 본래 이 법의 취지는 보복의 남용을 방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 법은 그 본래 취지와 달리 응징을 정당화하는 법칙으로 통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현실을 먼저 전제합니다. ‘그것이 상식이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악한 사람과 맞대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보복과 응징이 최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대가 공격해올 때 맞대응하기보다는 일단 공감을 표하면 그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도하는 현대의학이 도달한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그 진실을 통찰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한 술 더 뜹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대주라고 합니다. 어떤 해석자는 ‘때리려면 때려라’ 하는 태도로 더 강력한 저항의 태도라고 보기도 하는데,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른 뺨을 치는 행위는 상당한 모욕으로 간주되는 행위입니다. 보통 오른 손잡이가 뺨을 칠 때 때리는 뺨은 왼쪽입니다. 그런데 오른 뺨을 친다면, 그것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치는 것을 뜻합니다. 뺨을 치는 것 자체가 상대에 대한 모욕을 뜻하지만, 그것도 손등으로 치는 건 더 심한 모욕을 뜻합니다. 여기다 대고 왼 뺨을 들이미는 건 제대로 때려달라는 의미일까요? 아무튼 상대의 행위에 대한 맞대응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재판시 담보물로 속옷을 내놓으라 하면 겉옷까지 주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잠잘 때 이부자리로 대용하는 겉옷까지 담보물로 잡아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예 벌거벗은 존재가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합니다. 단순한 길 안내를 연상하기 쉽지만, 사실은 로마군대가 점령지 민중들을 끌고 짐을 나르게 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것이 딱 그런 상황입니다.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고 그 요구를 들어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진의는 도마복음(95)에 훨씬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아예 받을 생각 말고 꾸어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판단할 때 더더욱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느낀 난감함보다 더 심하지 않습니까? 일단 상대에 공감하라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희생까지 감수하라는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참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근본 뜻, 깊은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적의를 가진 상대에 동일한 적의로 맞대응해서는 그걸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적의를 무력화시킬 행동을 취할 때 근본적으로 그 적의를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철저하게 상대의 입장에 설 뿐 아니라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갈 때 상대는 멈칫할 수밖에 없고, 결국 상대의 성찰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정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적의를 물리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족 가운데 누군가 그렇게 살겠다고 하면, 대번에 뭐라 하겠습니까? ‘이 바보야,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분란이 일어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삶 가운데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깨달아 알고 그렇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평화를 이루는 길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당장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민에 빠진다면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는 길에 한 걸음 나선 셈입니다. 대번에 예수님께서 일깨워주신 그 가르침이 혹 개인적인 관계 안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오늘 복잡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 아니겠느냐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그 문제를 통찰했습니다. 개인간의 관계에서는 도덕적 선의가 통용될 수 있지만, 집단이나 국가간에는 그런 선의가 통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집단간에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 통찰은 중요하지만, 사회적 관계를 규율하는 것이 개인적 선의와 전적으로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선의를 더욱 고양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정치의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와 법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상식적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대개 상식적 윤리는 자기 또는 자기집단 내지는 공동체 내에서의 마땅한 행위를 추구하는 데 머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를 따르는 윤리, 그리스도의 윤리는 철저하게 상대의 입장에 서고, 오히려 한 술 더 떠 상대의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는 윤리입니다. 그러기에 간단치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진정으로 이 땅에 정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는 길이냐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것은 현실에 순응하고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수 앞을 내다보고 근본적 방법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깨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높은 영적 혜안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한다면, 그 혜안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의 경지에 이르고, 더불어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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