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희망 - 요한계시록 21:1~7[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1-22 13:16
조회
115
2020년 11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희망
본문: 요한계시록 21:1~7



오늘 본문말씀은 성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장엄한 희망의 약속을 그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희망입니다. 비단 우리 신앙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원하는 궁극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그 세계의 모습을 본문말씀은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요? 사실은 9절 이하에서 더 풍부한 상징을 동원하여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고 있지만, 오늘 본문말씀만으로도 그 요체는 충분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여러 신화적 표상들과 비밀스러운 이야기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 까닭에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 뜻을 대략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접근할 때에는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언로가 폐쇄되었을 때 특정한 확신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비의적인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점입니다.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면 신앙과 양심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가 극단적으로 제약당하는 상황에서, 그 역사적 상황을 헤아리고 해석하는 일을, 특정한 신념을 공유한 사람들의 언어로 기록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요한계시록은 1세기 전후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희망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에 해당합니다. 처절한 박해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수난, 불의에 맞선 순교자적 신앙의 신실함, 그리고 역사의 궁극적 심판자가 되시며 동시에 진정한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 초점만 분명히 알고 있으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마침내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고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이 직접 통치하는 세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는 모습을 극적으로 그립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땅, 바다가 사라지고 전적으로 새로운 하늘과 땅이 펼쳐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라고 할까요? 새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 새 역사의 시작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는 것으로 가시화됩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아름다운 예루살렘, 그것은 이 땅 위에 펼쳐지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뜻합니다.
우선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새롭게 펼쳐지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롭게 시작되는 새 역사의 표상이 굳이 예루살렘으로 표현되고 있는 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상만으로도 충분하고, 아니면 전혀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다른 어떤 도성의 이름을 취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랜 도성 ‘예루살렘’으로 표상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의 희망을 안고 있는 이들의 기억이 서려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욕이 서려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임종국). 영광과 수치를 더불어 안고 있는 역사적 장소에 대한 기억입니다. 더욱이 그 역사적 기억의 장소는, 요한계시록이 내내 악의 도성으로 그리고 있는 바빌론, 곧 당대의 로마와 대비되는 장소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구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대 제국의 질서 안에서 중심이었던 로마와 달리 예루살렘은 어린 양이 희생당해야 했던 수치의 장소였지만, 그 도성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막연한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현재 역사의 질곡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기록자는 역사적 기억을 회상하며 새로운 역사를 향한 희망과 의지를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꿈꿔 왔던 많은 선구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끊임없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그 새로운 역사의 터전에서 펼쳐질 아름다운 세계의 모습이 새 하늘의 보좌로부터 큰 음성으로 전해집니다. 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사실 요한계시록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 구약성서의 예언자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새 하늘 새 땅의 약속 가운데 전해져 왔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이사 25:8)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이사 35:10)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이사 43:18) “지난날의 괴로운 일들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를, 내가 다시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이사 65:16)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과 함께 할 때 일어날 새로운 역사입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는 기쁨의 세계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성서의 정신사적 맥락에서 결코 낯선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진 질기고도 질긴 희망의 약속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백성과 친히 함께 하시는 새 역사에 대한 희망 또한 오랜 약속에 대한 기대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위 26:11) “내가 살 집이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에스 37:27) “도성 시온아, 기뻐하며 노래를 불러라. 내가 간다. 내가 네 안에 머무르면서 살겠다. 나 주의 말이다.”(스가 2:10)
백성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 이래 일관된 성서의 신앙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현장에, 삶의 관계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에 매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은 말 그대로 보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움직일 때 거룩한 처소로 성별된 장막을 뜻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 그 자체 안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22절)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이 역시 오랜 약속이 비로소 성취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피안의 저 세상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새 역사를 뜻하며, 그 새 역사가 펼쳐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을 뜻한다는, 오늘 본문말씀의 요체는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져 온 오랜 약속의 성취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귀결됩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이 말씀 또한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한 오랜 믿음을 바탕으로 하며,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실히 지킬 때 누리게 되는 복락의 약속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55:1~3)를 그대로 환기합니다. 결국 그 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이 시간 본문말씀의 맥락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 의미를 상기했을 뿐입니다. 특별히 새삼스러운 어떤 해석을 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오랜 약속에 대한 믿음을, 성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요한계시록이 환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할까요?
그 오랜 약속을 환기하고 있는 말씀의 의미를 새기는 것은, 결국 오늘 이 말씀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환기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이 땅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삶,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정한 삶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성서의 대의입니다. 그 대의를 분명히 하면 성서의 말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 대의를 벗어난 채 특정한 문구에 매이거나 지엽적인 것에 매달릴 것 없습니다. 또한 특정한 시대의 맥락에서 말씀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인 교리에 매여 말씀의 진실에 다가서지 못하는 어리석음에도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데 어떤 장애물이 있습니까? 만일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혹 그것이 성서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요? 그 말씀이나 가르침을 다시 새겨보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보다 우선하여야 할 것은 먼저 자신의 욕망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욕망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성서의 말씀이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변명거리로 삼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가 있어 다녀왔는데,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차별금지법지지 선언으로, 저 지난 월요일 기장총회 속회에서 제가 교회와사회위원장으로서 홍역을 치른 터라, 이번에는 정의평화위원장으로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습니다. 관련 안건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회무처리가 순탄하게 처리되는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총회 선언서 채택 시간에 ‘소수자’가 문제 되어 삭제 또는 ‘소외자’로 대체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결국 소수의견으로 기록하고 원안대로 통과했습니다만, 도대체 뭐가 걸림돌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회무처리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그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수고한 총무님과 정의평화위원장에게 격려 박수를 보내자는 의견으로 뜨거운 박수를 받게 되어 얼떨떨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정과 균형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교회의 역량에 위로를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수를 거저 마시게 해 주시는 분이며, 사람을 그 자녀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데 어떤 장애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서가 그 진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새 하늘 새 땅에서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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