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시대의 징조를 알아야 - 누가복음 21:25~33[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2-06 16:44
조회
470
2020년 12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시대의 징조를 알아야
본문: 누가복음 21:25~33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본문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오늘 말씀은 비장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말씀은 두 토막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25~28)는 비장한 종말론적 선포로 되어 있고, 후반부(29~33)는 예수님의 평소 흔한 이야기 방식인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와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을 알리고 있으며, 후반부 말씀은 그와 깊이 연관된 비유에 해당합니다.

먼저 앞부분의 말씀을 볼까요? 이 말씀보다 앞서 이미 7절 말씀부터 현존하는 세계의 파국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는 맥락 가운데 오늘 본문말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현존하는 세계 질서의 파국을 장엄한 우주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일월성신, 곧 해와 달과 별들이 징조를 나타내고, 땅에서는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서 나자빠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파국이 닥치지만, 그 사태는 그렇게 파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파국이 일어날 때 놀라운 사태가 전개됩니다.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띠고 구름을 타고 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은 파국의 종말이 아니라 새 역사의 서막이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태는 한편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됩니다. “일어서서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한편에게 심판의 사건은 또 다른 한편에게 구원의 사건이 된다는 뜻입니다. 서로 다른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사건의 양 측면입니다. 여기서 현존하는 세계의 파국 가운데서 구원을 보장받은 무리는 지금 이 말씀 선포의 청중인 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묵시록이라 할 만큼 비장한 분위기가 감도는 오늘 말씀을 두고 과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고 몸소 구현하였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당대 유대사회의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몇 세기에 걸쳐 중요한 정신적 기조를 이룬 종말론적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점진적 변화에 대한 낙관이 무너지고 급진적인 변혁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의 희망이, 이른바 종말론적 역사관의 요체입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멸망하여 포로 생활을 하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제국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던 시대 상황 가운데서, 당대의 여러 사상의 영향으로 종말론적 세계관이 형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정신적 기조가 충일한 시대 한 복판에서 살았습니다. 그 정신적 기조와 무관하다는 것이 오히려 억측에 가깝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종말론적 급진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오늘 말씀을 예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로 보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부드럽고 섬세한 예수님의 면모와 대비되는 날카롭고 단호한 예수님의 면모는 그 역사관,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현존하고 있는 낡은 세계질서의 파국과 동시에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한편의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공포를 뜻하지만,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뜻합니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이는 마치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에베 2:2)를 연상시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우리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동안 하늘처럼 떠받들어 왔던 세계가 무너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파국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름을 타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을 반길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파국과 심판이 곧 희망과 구원의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를 분별하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평소 예수님의 따뜻한 말씀으로 그 뜻을 분명히 알아듣게 일러주는 말씀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한 자리에서 이 두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누가복음의 문맥에서 보면 두 이야기는 그렇게 같은 의미를 다른 이야기 형식으로 보완해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교훈으로 알려진 비유의 말씀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그 어떤 나무로 비유해도 좋습니다. 나무에 잎이 돋으면 계절이 바뀐 것을 알 수 있고, 무성해지면 여름이 다가온 줄 알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세상의 변화에도 분명한 징후가 있는 법이니, 그 징후를 알아차리면 곧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시대에 그 징후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 파국과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는 징후를 분별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의 선포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또한 중요한 진실을 깨닫습니다. 앞서 말한 종말론적 선포에서 현존하는 세계질서와 새롭게 도래하는 세계질서 사이의 질적 단절을 강조하고 있다면, 비유에서는 그 질적 전환이 어떤 초자연적 사건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마치 우리가 보고 있는 나뭇잎의 성장을 보고 깨닫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을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속되는 역사 가운데서 그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깨어 있는 사람이라야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읽지 않았지만 34절 이하에서 깨어 있으라고 한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시대의 징후를 알고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일깨워 주신 진실은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며 끊임없이 시대의 징후를 파악하고 그 의미를 곱씹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낯선 경험에서 오는 불편한 생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그 기대만 갖고 있다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진지하게 이 사태가 주는 의미를 새기며 과연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으며, 인간의 바람직한 삶을 위하여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지 예측하고 대비하지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위중한 시대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19로 겪고 있는 위기 현상은 비단 코로나19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시작되어 온 위기가 이를 계기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고 전면화되고 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의 진단이 대체로 일치합니다.
그 변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중요한 진실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히 부추기며 시장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로는 더 이상 인간의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일종의 ‘전시 공산주의’ 현상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기도 합니다. 언뜻 그 말 그대로 접하면 역사적으로 경험한 음험한 전체주의가 곧바로 연상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무한한 욕망을 부추기는 삶의 질서, 시장이 모든 것을 잘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진짜로 생명의 안전을 위한 긴급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데 그 뜻이 있습니다.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정보를 충분히 공유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이러스는 누구에게나 접근하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의 모색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이제껏 자유경쟁의 원리로 구성된 사회적 관계를 전적으로 새롭게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인류는 지금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현재 코로나19 위기에 직면한 교회의 위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왔고 우리 역시 실감하고 있는 터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코로나19는 한국교회의 민낯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습니다. 교인이 줄어들 것만을 염려하며 자기이해에 민감한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이미 사회적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는 현실에 더하여, 아예 사라질 위기에 처할 지도 모릅니다.
그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는 교회의 존재 의의를 다시 묻고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저 잘한다는 교회가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지키는 것 정도에 그쳐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소중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그야말로 깨어 있어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의 현실적 존재 요건이자 동시에 이상에 해당하는 공동체성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세상에 구현할 수 있을지 우리는 함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비대면에서 대면으로의 전환되기를 바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대면의 환경 가운데서도 안팎으로 공동체적 유대를 강화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그 해답의 방향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지금 세계사적으로 보나, 교회사적으로 보나 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분투하며 어떤 위대한 통찰에 이르고, 그에 따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의미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시대의 징조를 읽고, 대안을 예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소중한 몫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이 대림절에, 다시금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믿음의 빛에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향한 여정에서 성큼 한 발걸음 더 나아가고자 결단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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