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 시대, 새로운 삶을 향한 열망 - 누가복음 1:68~7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2-13 14:10
조회
479
2020년 12월 1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새 시대, 새로운 삶을 향한 열망
본문: 누가복음 1:68~79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그 대림절 셋째 주일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찬가를 함께 마주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와 함께 사가랴의 찬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뤄질 꿈, 곧 메시아의 희망을 절절하고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찬가 전반부는 장차 백성들 가운데 오실 메시아에 대한 희망의 약속을 재삼 확인합니다. 예부터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노래합니다.
“예로부터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셨다.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자기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70~75).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겠다고 한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희망의 노래요, 믿음의 노래입니다.

사가랴의 찬가 후반부는 예로부터 선포된 그 약속을 이루기에 앞서 그 길을 예비하는 몫을 갖고 태어난 예언자 세례 요한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76~79).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뤄질 꿈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노래하며, 그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맡은 예언자의 몫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노래하고 있는 꿈은 성서가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환기되어 왔습니다. 여전히 우리들에게도 희망의 원천으로서 그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차 이뤄지기를 바라는 그 꿈이 어떤 것인지는 성서가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기에 우리가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시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총체성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이 땅 위에서 온전한 구원과 해방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꿈의 실상을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이 찬가가 노래하고 있는 꿈이 이뤄지는 과정을 새겨 보는 것은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더욱 실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도래의 희망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고 그 예비절차를 거쳐야 했을까요? 어째서 굳이 그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을 거친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신 걸까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굳이 역사적 사실의 차원에서 해명하자면,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은 사실 때문에 세례 요한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 격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 안에는 많은 분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길을 따랐던 이들이 오늘의 그리스도교로 존속하고 있고, 다른 많은 분파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을 따르는 이들이 오늘날까지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역시 존속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종말론적 의식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오염된 세속을 등지고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려 한 반면 예수님께서는 오염된 세계 안에서 그 세계를 바르게 하려 한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 차이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다른 길을 걸었지만,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것이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기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그 길을 예비하는 이로서 세례 요한이 먼저 등장한 것은 단순히 하나의 사실로서 역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기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였던 역사의 의미, 다시 말해 사실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해석으로서의 역사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도래의 희망이 이뤄지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로서 역사를 넘어서, 역사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이로서 세례 요한의 등장은 희망을 바라는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그 희망을 아로 새기는 과정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은 인간의 희망, 그 희망이 이뤄지는 과정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그와 같은 통찰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가장 큰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모세의 퇴장 장면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신명 34:7) 눈빛도 형형하고, 기력도 정정하였는데, 어째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요? 그것은 단절의 마디를 지니면서도 연속되는 역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 새로운 주체의 등장으로 역사를 한 매듭짓고 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되는 역사를 성서는 그렇게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가 1:14) 역시 역사의 단절과 연속, 달리 말하면 역사의 질적 전환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 그 두 사람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다른 점은 그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례 요한은 금욕적이었던 데 반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아무것이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광야에서 고결하게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든 즐겨 먹고 마시며 죄인들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를 즐겼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참 기쁨을 누리기에 앞서 그 기쁨을 바라는 희망을 몸과 마음에 아로 새기는 과정이 인고의 과정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인고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기쁨의 열매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26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 12:5~6)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펼친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포한 세례 요한의 등장은 마침내 이뤄질 희망의 약속 앞에 있는 인간의 정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세례 요한의 역할을 언급한 대목에서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1:76~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삶의 전환 가운데서 맛보는 구원의 내적 체험을 뜻합니다. 이것은 요한이 베푼 세례의 참뜻입니다. 삶의 결단과 전환을 함축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게 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저마다의 인생을 돌아보면 항상 실감하는 굴곡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굴곡 없는 인생이 있을까요? 한 고비 넘기고 도달한 자리, 그 자리를 숙명적 조건으로 안다면 우리의 삶은 성장을 멈출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저마다의 삶을 누리는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열망이 얼마나 뜨겁습니까?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열망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 또 얼마나 많은 곡절을 안고 있습니까? 뭔가 이루었다 싶은데, 그다지 변하지 않은 현실을 우리는 늘 절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좌절한다면 역사는 전진을 멈출 것입니다. 역사의 전진이 멈춘다는 것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이 구습에 매여 속박을 받는 것을 뜻하고, 기존의 부당한 질서가 지속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공평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 고비 넘겨 처해진 자리, 그 자리가 최종 기착지일 수 없다는 자각이 다음 고비를 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그 자각을 함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자각은 단단한 무장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것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의 삶은 그 자각의 과정을 상징합니다. 비상한 의식입니다. 그 비상한 의식, 그 비상한 자각이 마침내 맛보게 될 새 희망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요? 촛불의 염원으로 새 정부가 등장하고, 게다가 총선으로 집권여당에 높은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모든 분야의 여러 개혁은 더디기만 합니다. 기득권세력의 반발은 여전히 강고합니다. 더 긴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와 희망이 더욱 절실한 때입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은 어떨까요? 코로나19로 참으로 낯선 세계를 경험하며 모두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소위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만만치 않은데, 그 직접적 영향을 받는 경우 또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겹친 경우 더더욱 힘겨울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공평하지 못한 사회와 부조리한 교회 현실과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가운데 참으로 기나긴 한 해를 보낸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서로를 향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서로를 북돋아줄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절실합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 그리고 한 해의 마감이 다가오는 오늘의 시점에서 오늘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진정한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을 메시아의 선구로 이해할 수 있었던 역사 인식은, 아직 역사의 빛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 이대로는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끊임없는 고통의 악순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바로 그 진실을 체감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각을 말합니다. 그 자각이 없는 백성에게 구원의 희망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자각으로 메시아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의 앞길을 열어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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