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침내 이뤄질 구원의 사건 - 누가복음 1:26~3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2-20 14:31
조회
469
2020년 12월 2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마침내 이뤄질 구원의 사건
본문: 누가복음 1:26~38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으로 우리가 성탄전야나 성탄절에 따로 모이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사실상 성탄의 의미를 함께 기리는 주일인 셈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른바 마리아의 수태고지에 해당하는 본문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수태고지, 곧 아기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말씀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마리아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을 하였지만, 아직 결혼 전이었습니다. 그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말합니다.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깜짝 놀란 마리아가 말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성서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때때로 성적인 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남자와 성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느냐는 반문입니다. 이 반문에 천사가 답합니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 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인간 아버지가 없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를 낳는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소위 동정녀 탄생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교회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가장 두드러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흔히 교회에서는 오늘 본문말씀에 나온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비단 현대에 이르러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수 탄생의 비밀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예수는 소위 사생아라는 견해입니다. 아마도 로마제국하의 팔레스틴에서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겁탈 당했던 비극적 현실을 생각하면, 예수의 탄생도 그런 비극적 탄생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아주 그럴 듯하게 추정하는 견해입니다. 전통적인 신앙 관념에 따르면 불경스럽게 여겨지지만, 메시아 탄생이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한다고 보는 점에서 그 나름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합리적인 해석이 이 이야기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의 결정적인 의미는 그런 논란으로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나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상황을 추정하는 이야기 모두 이 사건이 갖는 의미의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 같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 곧 동정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이야기의 진실은, 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성서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대 세계의 많은 문화권에서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멀리 다른 사례를 찾을 것도 없습니다. 고대 우리나라 시조들 가운데 혈육상의 아버지가 분명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혈육상의 아버지의 부재를 말하는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하늘의 아들,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형식 자체로 볼 것 같으면, 그 이야기는 사실 특별할 것이 없는, 고대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동정녀 탄생을 전하는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진실이 거기에 있습니다. 태어날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데 오늘 말씀의 진실이 있습니다.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와는 구별되는 존재의 탄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인간 세계와 철저하게 구별된 존재의 탄생이라면 아예 인간적 방식을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더라면 더 그럴 듯했을 텐데, 어째서 굳이 어머니로서 여자를 필요로 했을까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굳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까닭이 무엇일까요? 여자도 이 세계에 속하는 존재인데, 어째서 어정쩡하게 지상의 남자 아버지는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서 지상의 여자 어머니는 필요로 했을까요?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도 평범하지만, 마리아라는 이름 역시 평범했습니다. 그렇게 가장 평범한 이름을 가진 여자에게서, 가장 평범한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탄생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에 이 이야기의 또 하나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남자 아버지는 이 세계의 현존하는 질서를 대표하며 기성의 권위를 대표합니다. 남자는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을 누립니다. 반면에 여자 어머니는 이 세계의 현존하는 질서 안에서 가리어진 존재를 대표하며 기성의 권위와 무관한 존재를 대표합니다. 여자는 이 세계를 대변할 만한 어떤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남자는 홀로라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만 여자 홀로는 완전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성차별은 그렇게 용인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세계와 구별된 존재의 탄생은, 현존하는 세계를 대변하는 아버지를 배제하여야만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예수께서 탄생했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신의 어머니를 필요로 한 그 탄생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계 안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되었던 존재들에게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굳이 육신의 어머니가 필요한 것은 그 새로운 세계의 현실성 또는 구체성을 말합니다. 곧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현실성, 구체성을 말합니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떠난 구원의 희망이 아니라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의 구원의 희망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영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지평 안에서 벌어진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에 주목받지 못했던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와 누가의 신학적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부터 집요하게 지속되어 온,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가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서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것은 땅 위에서 이뤄질 역사적 해방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의미는, 곧바로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노래와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 고지 사이의 가교를 잇는 성서 말씀을 보면 또한 흥미롭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도 그 사연이 나와 있지만,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 또한 임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임신을 하였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잉태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문안하자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 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1:42~45)
태중에 생명을 잉태한 엄마들끼리 인사를 나누며 기뻐했을 뿐 아니라 태중의 아기들까지 공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어진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그 꿈의 벅찬 감동을 알 수 없습니다. 두 여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 사람들만의 벅찬 감동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 예수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와는 다르지만 다른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는 것은, 그 세계에 대한 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꿈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기쁘고, 서로 공유하고 있는 그 꿈 때문에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눕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그 탄생일을 기다리는 것은, 그 꿈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 감동을 나누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과 그로 인한 감동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의 뜻을 기릴 때, 그 뜻을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제 며칠 후 다가올 성탄절,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생애 가운데 가장 특별한 성탄절을 맞이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성탄의 의미를 새기는, 이제껏 성탄절을 맞이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맞이하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성탄절은 으레 가장 들뜬 절기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자원의 70퍼센트를 소비하는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에서 성탄절로 이어지는 한 달간 한 해에 팔리는 상품의 40퍼센트가 팔린다고 합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탄절이 풍요와 소비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이 낮은 사람들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결합되어 있다기보다는 주류사회의 풍요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풍요와 소비의 이미지와 결합된 성탄절의 운명은 어쩌면 그 기원에서부터 유래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이래 3세기 넘도록 예수의 생일은 특별히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부활절이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로 공식 지정된 것은 4세기 교황 율리우스 1세 때부터였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고증을 따른 것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과 유럽 지역의 전통적 축제를 그리스도교의 축제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동지에 해당하는 이 절기에는 원래 농업과 풍요의 신 사투르누스 또는 태양신 아폴론을 기리는 축제가 대대적으로 열렸습니다. 북유럽에서는 빛의 축제가 열렸습니다. 포도주와 맥주가 제 맛을 내는 때이기도 했고, 한 해중 가장 많은 소를 잡아 평소 고기 구경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고기를 즐길 수 있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풍요로운 이 시기가 가장 커다란 축복의 사건인 예수 탄생을 기리는 절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탄절을 지정한 교회의 의도는 기존의 이교 문화를 새로운 그리스교 문화로 바꾸고자 한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절기에 부유한 사람들과 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상의 음식을 대접하면서 예수 탄생의 의미를 기렸습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기에 이제 새로운 빛이 온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를 그렇게 구현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 풍요를 향한 갈망이 강한 탓일까요? 풍요 제의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이타적 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삶을 기리는 것보다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앞서는 성탄절의 풍경이 일상화되었습니다. 더 많은 소비가 미덕이 되어버린 오늘 자본주의적 삶의 현실에서 성탄절은 경제를 추동하는 중요한 한 계기라 할 만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그간 풍요를 추구했던 모든 삶의 방식을 멈추고 어떤 삶의 방식이 과연 인간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번 성탄절에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고, 이 땅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것은, 바로 그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이 존귀하게 되는 꿈을 바라는 것을 뜻합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그 꿈의 대열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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