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세상의 허위를 드러내는 진실 - 누가복음 2:22~4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2-27 13:56
조회
359
2020년 12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세상의 허위를 드러내는 진실
본문: 누가복음 2:22~40



성탄절 첫째 주일이자 동시에 한 해를 보내는 송년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본문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한 달 내내 누가복음의 말씀을 나누게 된 셈입니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부모가 유대교의 정결예법에 따라 태어난 지 여드레만에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칠 때 일어난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다른 병행구절 없이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매우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요체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예수의 부모가 아기가 태어난지 여드레만에 유대의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그들은 정결례를 치르는 제물로 비둘기를 바치고자 했다고 하는데, 이는 통상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에 해당합니다. 그때 평생을 메시아가 오시기를 대망하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날만을 고대해 왔던 경건한 예언자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자 그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 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사람들에게는 계시하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감격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기를 향한 이 극도의 찬사를 다소 의아스럽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새삼 감격하였리라는 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감격에 젖어 있을 마리아에게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도록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감격스러운 분위기 가운데서 갑작스레 덕담인지 악담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한 것입니다. 이야기인즉슨 덕담지만, 그냥 덕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비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말씀 다음에 마리아의 반응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몸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낳았다는 사실에 감격해 하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러나 그 예수가 많은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장차 감당하실 몫을 예언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게 되었을 때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 칼에 찔린 듯 찢어지게 된 상황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마리아로서는 의아스러웠지만, 그 말 자체만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아마도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 다음에 또 한 사람의 증인이 등장합니다. 안나라는 여예언자의 등장입니다. 그는 결혼한 지 칠년 만에 홀로되어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해 왔습니다. 아기 예수가 정결례를 드리러 온 것을 보고 그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사가랴의 찬가나 마리아의 찬가와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아기의 부모는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갔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성장하는 동안 예수는 튼튼해지고, 지혜로워졌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이 이야기 가운데 우선 가장 중요한 하나의 초점을 주목합니다. 어째서 구원자인 메시아 예수가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되고 그 어머니는 예리한 칼에 찔리는 듯한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세상이 결코 진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들 진실을 외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다지 진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많은 사람들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환영하기보다는 불편해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그 무엇입니다.”(마이다 슈이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사람들은 앎에의 욕망보다는 무지에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되고, 그 어머니의 마음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리라’고 시므온이 말한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밝혀지면 무너져야 하고 패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숨은 의도, 자신들의 숨은 생각과 음모가 드러나면 자신들의 지위와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편에서는 “더 없이 높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하며 노래하였지만, 그처럼 기뻐하지만은 않는 사람들이 또 다른 한편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사건입니다. 허위와 기만을 일삼아온 사람들, 권위를 내세우며 권세를 휘둘러 온 사람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귀찮고 두려운 사건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그들이 덮어쓰고 있는 허위를 벗겨내고 진실을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이 전하는 헤롯 왕의 어린이 학살은 진실 앞에 제대로 설 수 없는 세상 권세자의 두려움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어땠습니까? 시므온의 예언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혐오하고 부정하는 사람들, 곧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리에 대한 처형’이라 일컬을 수 있는 ‘십자가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실을, 진리를 영원히 죽음 속에 가두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범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진리가 압살될 수 없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참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께서는 허위와 죽음의 세계를 뚫고 일어나셨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너무나 자명한 진리의 승리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그 진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진실을 두려워하는 세상과 영합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어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 길을 보여 주신 것이 그리스도의 몫이며, 그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끝끝내 그 진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달리 말하면,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드디어 오래 전부터 갈망해왔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성취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에게 해당한다는 것이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삶은 보편적 구원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그 요체를 전하는 데서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이 등장하여 그 진실을 확인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 점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성서기록자, 초기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요체를 잘 드러내주는 예언자 시므온의 증언이 함축하는 뜻을 이미 새겼지만, 본문말씀은 또 한 명의 예언자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예언자 안나의 증언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르면 중요한 사건의 증언자로서 두 세 사람이 함께 해야 한다(신명 19:15)는 요건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증언자가 홀로된 안나라는 여예언자라는 것은 또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함께 나눈 말씀을 통해 평범한 여인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예수의 탄생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다시 등장하는 여예언자의 등장은 그 의미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결혼했다가 홀로된 이 예언자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전통에서는 위대한 유딧을 연상시킵니다. 홀로된 여인으로서 아시리아 적장의 목을 베어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한 사람입니다. 개신교의 정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우리 개신교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외경 유딧서는 그 사건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여성의 손을 통해서 원수들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일 강한 용사를 젊은이들이 쓰러뜨린 것도 아니요, 거인들이 때려눕힌 것도 아니요, 키 큰 장수들이 눌러버린 것도 아니요, 므라리의 딸 유딧이 자기의 아름다운 얼굴로 꼼짝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유딧은 과부의 상복을 벗어버리고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어 올렸습니다.”(유딧 16:5~7)
복음서의 기록자는 이미 민족의 영웅이 된 여성의 이미지와 겹치는 여예언자를 등장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효과를 의도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 영웅의 이미지와 상관없이 이 여예언자의 역할을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그 의미의 비범함을 드러내주는지도 모릅니다. 성서가 강고한 가부장제 질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면면히 결정적인 사건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역시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시므온의 예언과 함께 등장하는 안나의 이야기는, 오랜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그 오랜 구원의 약속이 누구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되었는지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존 사회질서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지위를 누릴 수 없었던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집요한 구원의 희망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이어진 삶을 통한 구원의 사건은 그렇게 전혀 다른 세계를 형성하는 것을 뜻하기에,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고’, 또한 ‘칼이 마음을 찌르는 것’과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평온하기만 한 어떤 사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새롭게 구성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코로나19 위기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사태를 경험하는 가운데 한 해를 마감하고 또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입니다. 이미 우리는 많은 생각들을 함께 나눠왔습니다. 이 시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 되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 그리고 그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각기 진정한 신앙의 의미, 더 정확하게 말해 신앙과 삶의 관계를 정말 진솔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저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우리가 신앙을 갖고 있다 자처해 왔다면,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구현한 것일 수 없는 사태를 우리는 깊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인류 전체가 위기를 겪고 있는 와중에 우리들만의 아성을 쌓는 일의 부질없음을 실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 가장 절실하게 삶의 안전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삶의 질서를 이루는 데,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존재의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나온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또 맞이하면서 교회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진실을 다시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진실을 따름으로서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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