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새로운 공동체 - 로마서 12: 1~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1-10 13:22
조회
8934
2021년 1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새로운 공동체
본문: 로마서 12: 1~8



새삼 던지는 물음이지만, 예수께서, 그리고 그 뜻을 이어받은 사도 바울이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겠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이 특정한 역사적ㆍ종교사적 맥락에서 그리스도교로 귀결되었을 뿐, 처음부터 특정한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도 바울 역시 그저 인간의 구원, 다시 말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고 그 길을 제시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를 한 대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집요하게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 이르러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삶으로 구체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말씀의 앞부분(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죄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 섬김의 요체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그것이 합당한 예배입니다.” 개역성경은 ‘영적’ 예배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그 말은 ‘합당한’ 예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본질이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데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윤리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삶의 윤리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노예의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근거한 자유로운 주체의 윤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심판이 두려워 마지못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을 바라는 사람은 당연히 기존의 어떤 질서와 가치관을 따르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스스로 좇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이 시대의 풍조’가 무엇일까요? 제의화한 종교, 주술화한 종교를 이릅니다. 당대 세계에서 모든 종교들이 신전 앞에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인간으로서 해야 할 바를 다 한 것처럼 여기는 믿음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이방종교는 말할 것 없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유대교까지도 그런 풍토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 인간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그저 지적으로 분별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뜻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거듭 반복해서 말하지만, 압도적인 이방종교의 세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친 요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삶으로 구현한 데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에서의 제의에 몰입하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든 모일 수 있는 데서 모이고, 보다 본질적으로 삶 가운데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되었고, 교회의 본질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당대의 풍조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엄연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개별 지역공동체로서, 나아가 보편적인 교회공동체로서 존재하였습니다. 바울의 시대 아직 보편적인 제도로서의 교회가 확립되기 이전이었지만, 이 교회 저 교회를 세우거나 돌보아야 했던 바울에게서도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의식이 없었을 리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뒷부분(3~8절)에서 바울은 하나의 몸으로서 교회를 말하고 있고, 그렇게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들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합당한 예배, 곧 믿음의 실천이 교회 공동체에서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할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언뜻 보면 그다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또한 한 마디 한 마디 그 말씀의 뜻을 음미하자면 사도 바울의 생각이 얼마나 복잡하였는지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선 이 말씀은 여러 지체들로 구성된 한 몸으로서 교회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 그 점만 주목할 것 같으면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 이하에서 말하고 있듯이 일종의 유기체적 교회관이라고 할까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체들이 각기 몫을 감당함으로써 온전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지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그것을 헤아리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세계 자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어떤 사회적 공동체 또한 그와 같은 비유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바울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당대 사람들에게도 일정하게 공유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와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 진실을 환기함으로써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단지 자연적으로 주어진 유기체로서의 몸을 그저 환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당대의 지배적 세계관에 따르면 십자가는 수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말하는 것은 하나의 추문(스캔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진정한 구원의 도가 있다고 바울은 역설합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누차 말했기에 오늘은 줄여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에게서 십자가는 이미 주어진 세계질서의 종식을 뜻하고 그 주어진 세계질서가 보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구원의 세계의 시작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공동체는 그 십자가의 도를 따라 전적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공동체를 뜻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저마다 각기 맡은 역할에 충실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저마다 분수에 맞게 역할을 잘 감당하라는 것 정도로 보입니다. 실제로 유기체로서의 교회관은 그렇게 주어진 질서를 정당하고 숙명론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렇게 이해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곡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기껏해야 주어진 세계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면, 바울이 말하고자 한 데서 한참 벗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권면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특별히 두 가지 초점만 주목하고자 합니다.

먼저 주목할 말씀입니다.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이 말씀이야말로 곡해를 빚기에 십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저 주어진 질서를 용인하고 그 안에서 분수에 맞춰 살라는 숙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윤리의 근본을 일깨워주고 저마다 고유하게 능동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의(義), 곧 교만에 빠지지 말 것을 일깨웁니다. 오늘 말씀이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것은 자신의 삶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을 뜻하며,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삶의 실존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뜻하며, 동시에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의식을 뜻합니다. 윤리의 출발점입니다. 그것을 의식하는 가운데 각자의 몫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분량’은 양적인 의미에서 많고 적음을 뜻하기보다는 각 사람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주신 믿음의 성향, 그 믿음의 구현방식을 말합니다. 분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은 서로를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의 몫을 충실히 감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이 말씀의 뜻 가운데서 우리는 본문말씀의 근본 뜻을 헤아리게 되었지만, 본문말씀은 다시금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침, 권면, 나누어주는 일, 지도하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을 각기 맡은 사람은 각기 그 뜻에 따라 충실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각기 저마다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은사를 능동적으로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온전한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권고가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당대 사람들이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이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 있습니다. 각기 지체들이 제 몫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개별적 주체들의 능동성, 그 역할의 다양성이 어우러질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오히려 약한 지체의 소중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말할 때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워줍니다. 한 몸으로서 교회의 통일성은 획일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단일한 명령체계로 획일화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와는 다른 실체일 뿐입니다. 각 지체들의 능동적 역할이 보장되고, 오히려 약한 지체가 소중히 여김을 받는 교회야말로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이상은 특정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교회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그리고 그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펼쳐나가야 할 삶의 도리를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해당 본문말씀에 한정하여 결론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양한 지체들이 어울리고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체득한 그 교회의 꿈을 세상에 널리 펼쳐나가기를 바랍니다.
가장 고통받는 존재가 소중히 여김을 받는다면 그 공동체는 건강합니다. 지난 8일(금)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힘 있는 세력의 의견은 반영하지만 가장 위기에 처한 이들의 호소는 외면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나약한 자들을 몰아내자. 힘을 보여줄 때다.”(트럼프). 국가 지도자가 서슴없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 어떤 목숨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세상, 그 어떤 존재도 차별하고 배제하지 않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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