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제약적이지만 무조건적이진 않은 - 갈라디아서 5:1-15[정용택 목사]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1-03-14 07:34
조회
10318
2021년 3월 14일 (사순절 넷째주일 / 청년주일 / 총회순교자기념주일)
제목: 무제약적이지만 무조건적이진 않은
본문: 갈라디아서 5:1-15
설교: 정용택 목사



1. 두 종류의 믿음

작년 2월 23일과 7월 19일에 했던 설교들에서, 저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과 3장 21-28절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인간의 구원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다룰 본문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되어 있는데요. 이 본문에 나타난 은혜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불가피하게도 앞선 두 본문을 다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학자들에 의해 “바울의 전체 서신에서 가장 간결하게 응축된 신학적 진술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마틴, 2018). 표준새번역으로 읽자면,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이 본문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유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의 신실하심을 통해 ‘의롭다’고 선언됨을 압니다. 우리 또한 메시아 예수를 믿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메시아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의롭다’는 선언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는 어떤 피조물도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N. T. Wright)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방금 읽어드렸던 새로운 번역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 대신에 ‘그리스도의 믿음’ 또는 ‘메시아의 신실하심’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어구는 헬라어 원문상으로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πιστ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바로 뒤에 이어서 나오는 축약형 ‘피스티스 크리스투’(pistis Christou)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 성경에서는 모두 다 이 어구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개역한글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개역개정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번역: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을 정의롭다고 선언하는 것, 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정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해진다고 번역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개혁적 전통에서 확립된 개신교적 칭의론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현대 신약성서학의 일각에서는 그 어구를 전통적인 번역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해선 안 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믿음’ 더 정확히는 ‘그리스도의 신실성/충실성’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저 역시 예전부터 설교를 통해 후자의 번역이 단순히 문법적 측면을 넘어 신학적 측면에서 훨씬 더 설득력 있다는 견해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2017년 12월 10일에 “참을 수 없는 구원의 무거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제가 그때 로마서 3장 21~26절을 중심으로 피스티스 크리스투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 바 있고, 교회 홈페이지에 그 설교 원고가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만일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두 번에 걸쳐 나오는 ‘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번역하게 되면, 바울은 이 짧은 본문에서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종류의 ‘믿음’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믿음과 인간의 믿음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 개개인이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기도 전에,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 인간을 정의롭다고 선언하는 근거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해 확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정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할례나 음식법처럼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분시켜주는 일종의 정체성 표지이자 경계표식을 일컫는 용어)와 같은 인간적 행동 때문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바깥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개개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고 관계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든 안 하든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본래 하느님 자신이었던 예수가 죄인들이라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되었고, 바로 그곳에서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러한 삶의 종착점에서 마침내 십자가 죽음으로 귀결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인간을 법적으로 정의롭다고 선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즉 인간의 경험 너머에서, 인간의 행위 바깥에서, 객관적‧선험적으로 이루어진 칭의사건이 우리의 구원의 절대적 전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우리가 정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것은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우리들 자신의 믿음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실하심에 있다는 것이지요. 인류 구원의 보편성은 바로 그러한 칭의사건의 초월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객관적‧선험적 칭의사건의 후속 단계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개개인의 실존적 믿음 역시 강조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비록 인간의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께 정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단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2차적인 인식”,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이미 일어난 칭의사건에 대한 지식의 결과 내지는 그 다음 단계의 사건”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의 중요성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있습니다(서동수, 2002: 688-689). 이 부분이 오늘 제가 주로 말씀드릴 내용인데요, 그에 관해서는 오늘 설교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을 중심으로 잠시 후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일단 그 전에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한 정의롭다고 인정받음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무제약적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은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칭의사건으로 재해석된 갈라디아서 2장 16절의 칭의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χαρις; grace), 즉 인간에게 마치 ‘선물’(gift)처럼 주어지는 구원의 독특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실현된 하나님의 정의롭게 하심은 은혜 또는 선물의 논리로 보자면, 그 수혜의 대상을 긍정적(positive) 형태로 규정할 수도 있고, 부정적(negative) 형태로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수혜의 대상의 범위와 규모를 처음부터 정확히 표적화하여(targeting) 설정한다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수혜의 대상자에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적 형태의 접근부터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이전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즉 그것을 선물로서 “받는 자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에, 무제약적인(unconditioned)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하나님이 세계를 정의롭게 바로 잡으신 사건은 이제 더 이상 구원이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특권에 편승한 민족적 자부심”에 기초한 유대인의 정체성과 유대인의 관습과 같은 인간의 문화적‧사회적 가치 및 전통과 결합된 것들에 근거하여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바클레이, 2020: 402).

이처럼 그 수혜자의 자격이나 사회적 지위, 사회적 가치, 정체성 등과는 무관하게 구원이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그야말로 ‘차별금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자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의 축복에 그 어떤 자격심사요건도 그 어떤 차별조항도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든 자유민이든 남자든 여자든 더 이상 그 수혜자의 인종, 국적, 신분, 정체성, 성별 등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데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정신에 입각했을 때,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성별, 성정체성, 장애(신체조건), 병력, 외모,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혼인여부, 성적 지향,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보호 처분, 학력, 소득수준, 직업, 고용조건, 사회적 신분 등의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또는 선물을 누리는 데 차별과 배제를 당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정신에 철저하게 위배되는 것이지요. 물론 유대교의 관점에선 하나님의 은혜가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자”, 특히 율법도 안 지키는 이방인들이나 오클로스/민중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을 터, 그래서 오늘날의 누구처럼 은혜의 ‘차별금지’에 격렬히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그 수혜의 대상에 관해 “제약이 없다”라는 부정적 형태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의롭다고 선언함의 유일한 통로라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의 칭의론은 그러한 구원을 은혜/선물로서 인간이 누리는 데 아무런 자격요건이 붙지 않는다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누릴 대상에 제약이 없다는 말을 뒤집어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제약 없는 은혜란 ‘모두를 위한 은혜’(Grace for All)로 바꿔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의 수혜자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제약 없는 구원이란 결국 모두를 위한 보편적·총체적 구원에 다름 아닙니다(롬 11:36). 하나님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그러나 아담 안에서 사망선고 받은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려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구원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롬 5:12-21). 실제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이라는 그 은혜/선물의 수혜 대상을 보다 긍정적‧적극적인 형태로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바울은 로마서 5장 6절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구속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하며, 8절에서는 좀 더 확대하여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라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을 때를 말합니다. 이른바 ‘불신자’였을 때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도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였다고 말합니다. 결정적으로는 예수님의 그 희생의 피흘리심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구원사건이 발생하였고, 심지어 우리들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존재의 변화’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과거 상태나 조건과 무관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사건과 그에 따른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재의 변화는 우리 개개인이 실존적으로 예수를 믿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말입니다. 우리의 경험에 앞서서, 우리의 경험 바깥에서 구원사건이 선험적‧객관적으로 이미 발생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객관적‧선험적 구원론에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상태 있었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5장 6-10절에서 우리의 존재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의롭다 인정되었다’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라는 문장은 모두 과거형시제로 쓰여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기도 전에, 복음을 알기도 전에, 이미 “일회적으로 완결된 구속사건”이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신앙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집단적 칭의사건”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서동수, 2002: 681). 이러한 집단적 칭의사건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수혜 자격에 제약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원론적으로 그 수혜 대상이 모든 인간 존재를 지향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부정적‧소극적 차별금지를 넘어 적극적‧포괄적 ‘평등지향’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폐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것은 단순히 부정적인 어법으로 그 수혜의 대상에 제약이나 자격조건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선물이 주어지는 시점이 시간적으로 모든 인간의 요구, 반응, 믿음, 행위 등에 앞서 있다는 점에서 구원의 범위가 정말로 인류 전체를 포괄할 정도로 크고 중요하며 영속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그 어떤 선물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야말로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인류를 포함하여 피조 세계 전체에까지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3. 무제약적인 것이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은혜에 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다루어온 갈라디아서 2장이나 3장의 본문과는 매우 다른 어조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구원을 마치 선물처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수혜 대상에 그 어떤 사회적‧문화적 제약이나 자격조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인류 전체를 겨냥하여 인간의 요구나 반응에 앞서 주어진 그 충만한 신적 은혜로부터, 더욱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의 존재에 관해 바울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반복해서 자신의 ‘대적자들’(opponents)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여러분들을 교란시키는 자들”이라 말하기도 하고(1:7, 5:10), “여러분들을 선동하는 자들”이라 말하기도 합니다(5:12). 이들의 정체에 관해서는 현재까지도 학계에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갈라디아서 본문에 반영된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그들이 전한 메시지를 ‘다른 복음’(1:6)이라 말했을 리 없겠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이들을 ‘교사들’ 또는 ‘선교사들’이라 부르며, 그들이 전하는 복음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차이를 갈라디아서 본문을 통해 규명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그러한 차이를 드러내는 대립구도가 바울 자신의 말을 통해서 명확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5장 4절의 “율법과 그리스도, 율법과 은혜” 사이의 대립구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는 것, 그리고 마찬가지로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과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을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장 5절에서는 율법과 대립되는 것이 성령과 믿음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결국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 성령에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도 대립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 전체와 위배되는 이단적 교설을 전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5장 5절에서 단순히 ‘믿음을 좇아’(개역한글), ‘믿음을 따라’(개역개정), ‘믿음으로’(표준새번역)라고 쓰여 있는 어구는 원문상으로 ‘εκ πιστεως’(에크 피스테오스), 즉 ‘믿음으로부터’ 또는 ‘믿음을 통해서’, ‘믿음에 근거하여’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어구가 3:24절에 먼저 나온 바 있습니다. 3장 24절에서 사용된 ‘에크 피스테오스’, 곧 ‘믿음으로’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문맥상 3장 23절의 ‘믿음이 오기 전에’와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에 들어가 있는 믿음과 25절의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에 들어가 있는 믿음과 동일한 대상을 지시합니다. 그래서 3장 23-25절에서 총 네 번에 걸쳐서 반복되고 있는 ‘믿음’, 곧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3장 22절의 ‘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령에 힘입어 좇게 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했을 때만 (5장 5절의 ‘믿음’과 구문론적으로 동일한 어구인 3장 24절의 ‘믿음’과 그 문맥상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23절과 25절의 믿음이 ‘계시’의 주체로 표현되고 있는 것도 이해 가능해집니다. 3장 22-25절과 5장 5-6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2장 16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율법과 대조되는 그리스도, 은혜, 성령과 동일하게, “의의 소망에 대한 기독교인의 주관적인 신앙이 아니라 소망하는 의의 구원론적 근거로 묘사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최흥식, 2004: 171).

문제는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선동하는 이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자신이 전한 복음의 대적자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의 행위로 상징되는 “인간의 가치와 전통들”(바클레이, 2020: 396), 즉 “율법에 구현되어 있는 사회적 가치 기준을 채택함으로써 그리스도-선물을 기존의 가치 체계 안에 가두어놓았기 때문”입니다(바클레이, 2019: 661). 바울의 진술로 보건대,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일부가 정말로 그와 같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함으로써 그리스도-사건을 유대교 전통에 따라 규정된 가치 기준 안에 다시 가두려 선동했던 자들, 복음을 교란했던 자들의 말에 속아 넘어간 것으로 판단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좇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이들이 그 대적자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을 좇아 유대인처럼 되고자 정말로 ‘할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행동이 율법의 멍에를 다시 쓰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가 아닌 율법 안에서 다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행태를 반복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의의 기준으로 받아들임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사건을 율법의 제한을 받는 선물로 만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관점에선 복음에 대적하는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선물을 제약하거나 제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제약과 제한으로 인해 그리스도-선물이 완전히 무효화”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바클레이, 2019: 662). 그래서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구원이 너희들의 반(反)복음적인 행동으로 인해 무효화되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바울이 선포한 구원사건이 한편으로 그 수혜 대상자의 과거 및 자격요건을 전혀 따지지 않고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선물이라는 점에서 ‘무제약적’이지만, 그리고 심지어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애초부터 인류 전체를 겨냥하여, 즉 우리의 경험 이전에, 우리의 경험 외부에서 ‘모두’를 구원하기 위하여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얼마든지 그리스도에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조건부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속에 계속 머무르냐 아니면 떨어져 나가느냐를 가르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따라서 구원 역시 조건부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제약적이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선물을 나 자신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확대‧적용하는가 아니면 바울의 대적자들 및 그들에게 속아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의 일부 교인들처럼 자신들이 받은 무제약적이고 보편적인 은혜/선물로서의 복음을 유대교 전통에 따라 규정된 가치 기준에 따라 제한‧폐지하는가에 따라서 보편적‧무제약적인 구원사건이 나에게 실효화될 수도 있고 무효화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서 베풀어주신 은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나타난 정의가 수혜자의 자격이나 지위, 신분, 정체성 따위에 대하여 어떠한 제한이나 제약도 없이 주어지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바울이 선언할 때, 거기에 괄호치고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그런 무제약적인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선물의 수혜 대상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한 적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의 정의가 수혜자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요구하지 않는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하는 응답의 행위의 목록에 이성애 따위는 들어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느닷없이 우리 모두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그런 무제약적인 은혜와 정의에 합당하게 응답하도록, 즉 나 역시도 내 이웃들에게 그러한 은혜와 정의를 적용하고, 이 세계에 그러한 은혜와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행동을 조건부로 요구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이미 주어진 그 보편적이고 무제약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실효적인 것으로, 즉 나의 구원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선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나의 이웃들에게 보편적이고 무제약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선물의 논리를 이 세계 속에서 확대‧적용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구원은 무제약적이면서도 조건부적인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동료 인간들에게 차별과 혐오를 예수의 이름으로 실천하는 이들에겐 보편적이고 무제약적인 하나님의 은혜/선물이 그 자신의 구원으로서, 그 자신의 삶에서의 정의로 결코 실효화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금 자행하는 바로 그런 배은망덕하고 악의적인 행동에 따라 보편적‧무제약적으로 주어진 은혜/선물에 입각한 그들의 구원도 소급적으로 무효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역시 ‘의롭다’ 선언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렇듯 그들의 구원을 무효로 만드는 것, 그들의 ‘칭의’를 취소시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차별과 혐오를 자행하는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바울의 보편적이고 무제약적이지만 결코 무조건적이진 않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조건적인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선물을 인간들 자신에게 실효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의 몫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선물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서 행동했을 때, 즉 그리스도-선물을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나의 이웃들, 그리고 이 세계 전체를 향해 확대‧적용했을 때,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의 선언은 유효한 것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보편적이고 무제약적인 하나님의 은혜/선물을 그 어떤 인간적 가치와 기준을 끌어들여 왜곡한다면, 세계를 정의롭게 바로잡으신 하나님의 행동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그 분의 정의와 은혜는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난 바울의 조건적 구원론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 역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를 유효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편적‧무제약적이지만 무조건적이진 않은 하나님의 은혜/선물의 신비는 그것이 결국 수혜자인 우리 인간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소급적‧사후적으로 실효화되는 ‘참여적 구원론’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4. 조건적‧참여적 구원에서 조건적‧참여적 기본소득으로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이 청년주일인 오늘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지난 몇 년 동안 불안정노동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문을 써온 연구자의 입장에서, 저에게 청년문제란 곧 우리 시대의 불안정노동 문제에 다름 아닙니다. 최근 발표된 청년노동시장에 관한 한 연구에서는 “임금노동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실업과 취업의 구분이 현재의 청년노동시장 참여 상태를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높은 수준의 실업률을 통해, 취업도, 실업도 아닌 모호한 고용관계 위에서 사회안전망과 연동되지 않는 비정형적이거나 불안정한 노동을 반복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추측”한 바 있습니다(김규혜 외, 2020: 49-50). 취업과 실업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불안정 노동사회에서 실업은 불안정노동의 하위 구성요소이지 취업 및 고용의 대립물이 아니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되고 있는 셈인데, 중요한 것은 청년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전세계적으로 심화되면서 청년 불안정 노동자들이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즉 ‘불안정한(precarious) 노동계급(proletariat)’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스탠딩, 2014).

동일한 임금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지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도 미달하는 프레카리아트가 자본주의적 노동체제의 핵심 계급이 되고 있는 노동의 프레카리아트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빚은 가장 역설적인 결과는 프레카리아트를 구성하는 이들이 과거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달리 실제로 노동과정에서 수행하고 있는 노동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정규교육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 얘기인즉슨,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우리 시대의 청년들에게 이 사회가 제공하는 노동의 대부분이 “고용의 불확실성, 낮은 임금 및 소득, 사회적 보호의 결여, 그리고 대변할 수 있는 권리가 제한된 노동”, 즉 불안정노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의 노동사회가 처한 곤경은 노동의 종말론자들이나 4차 산업혁명론자들이 말하듯이 ‘일자리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의 지속이 아니라 사실은 ‘성장 없는 일자리들’(growthless jobs)의 확대라고 봅니다. 저임금은 물론이고 비임금 수당도 거의 없는 낮은 생산성을 지닌 일자리들의 거대한 확산, 나아가 그러한 성장 없는 일자리들이 대부분 청년세대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노동사회의 위기의 현실을 타개할 방안으로 기본소득정책이 일찍부터 학계와 시민사회로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폐업한 자영업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제 정치권에서도 기본소득에 관한 논쟁이 불붙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기본소득은 별도의 자산조사나 자격심사 없이, 특정한 정치공동체가 그 모든 구성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을 말합니다(판 파레이스, 2016). 특히 노동을 비롯한 그 어떤 활동도 소득 수혜에 대한 답례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조건적’ 기본소득이 기본소득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습니다만, 기본소득에는 ‘무조건적 기본소득’(UBI: Unconditional Basic Income) 말고 ‘참여소득’(PI: Participatory Income)으로 대표되는 ‘조건적 기본소득’(CBI: Conditional Basic Income)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참여소득은 “그 또는 그녀가 소득지원을 받아서 그 대가로 어떤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특정한 정치적 공동체의 성인 구성원들 각자에게 지급되는 소득”을 말합니다(Muñoz, 2018). 자산 및 소득에 관계없이 지급한다는 점에서 ‘보편성’과 가족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지급한다는 점에서 ‘개별성’, 그리고 즉시 사용 가능한 화폐로 지급한다는 점에서 ‘현금성’의 원칙을 ‘무조건적 기본소득’과 공유하지만, 사회에 대한 기여 내지는 참여를 조건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선 구별되는 것이지요. 물론 임금노동이 아닌 돌봄, 교육, 학문, 예술, 종교, 시민운동 등 광범위한 형태의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기존의 근로연계복지(Workfare)와도 다르고요.

많은 신학자‧목회자‧활동가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하면서, 그 성서적 근거를 공관복음에서 찾고 있습니다만, 저는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기본소득의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신학적으로나 사회윤리학적으로나 더욱 유의미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단, 제가 지지하는 기본소득은 그 수혜의 대상에 관해선 보편적‧무제약적이지만 타인을 향한 은혜의 확대‧적용을 조건으로 내건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진 않은 바울의 ‘그리스도-선물’론(論)에서 성서적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참여적 기본소득’입니다. 이처럼 신학적으로 바울의 조건적‧참여적 구원론에서 성서적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조건적 기본소득, 즉 참여소득은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교회의 안과 밖을 막론하고 우리 시대의 청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청년들의 학력이나 경력, 출신, 성별, 소득, 배경 등과 관계없이 그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소득을 지급하되,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보장의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들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까지도 포괄하는 그런 형태의 소득 지원 프로그램이 청년들에게 절실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그런 방식의 청년 지원 프로그램이 제도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천안살림교회에서도 일정 부분 그런 취지를 반영한 관행이 형성되고 있기도 하지요. 부디 오늘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바울의 무제약적이지만 무조건적이진 않은, 그 진정으로 참여적인 구원론, 참여적 기본소득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참고문헌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4.
김규혜 외, 「‘취업’과 ‘실업’의 사이에서: 청년이직에 대한 질적연구」, 『한국사회정책』 제27권 4호(2020 겨울).
서동수, 「그리스도의 믿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인가?」, 『신약논단』 제9권 3호(2002 가을).
J. 루이스 마틴(J. Louis Martyn), 『앵커바이블 갈라디아서』, 김병모 옮김, CLC, 2018.
존 M. G. 바클레이(John M. G. Barclay), 『바울과 선물: 사도 바울의 은혜 개념 연구』, 송일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9.
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에 대한 복종: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윤리학』, 이성하 옮김, 감은사, 2020.
최흥식, 「갈라디아서 5:5에 나타난 ἐκ πίστεως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34집(2004).
톰 라이트(N. T. Wright),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 나라 신약성경』, 김명희 외 옮김, IVP, 2019.
필리페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기본소득에 대한 철학적 옹호』, 조현진 옮김, 후마니타스, 2016.
Cristian Pérez Muñoz, “Participation Income and the Provision of Socially Valuable Activities,” The Political Quarterly, Vol. 89, No. 2, April–Jun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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