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회의 순간, 자기부정의 결단 - 요나서 1:1~1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6-06 14:40
조회
12417
2021년 6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기회의 순간, 자기부정의 결단
본문: 요나서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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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는 성서 안에서 매우 독특한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언서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전기적 소설과도 같습니다. 다른 예언서들처럼 예언자의 선포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행태가 중심이 되는 문학양식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또한 이야기 자체로 특정한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바로 그 시기 예언자로서 활동을 추적할 수 있는 역사성을 확인하기는 어렵고, 훨씬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로는 주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 전성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전 5세기 전후 곧 포로기 이후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분리주의 또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에 그와 대립되는 보편주의를 내세운 것이 요나서의 주요 메시지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저작 룻기와 상통합니다.
전기적 소설로서 요나서는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어쩌면 동화 같기도 하고, 요즘 감각으로는 만화로 그리면 훨씬 실감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요나서는 자기만의 닫힌 세계에서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한 개인의 성장사로 읽어도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모처럼 요나서를 마주한 만큼,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환기해볼까요?
아밋대의 아들 요나(열하 14:25)는 하나님으로부터 명을 받습니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악을 알리고 회개를 촉구하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일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대제국으로서 뭇 민족을 괴롭힌 그들이 회개 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랄지언정 그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칩니다. 니느웨는 육로로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배를 타고 지중해 서쪽 끝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그런 요나를 보고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바다에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신들에게 부르짖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데 요나는 태평하게도 배 밑창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선장은 요나를 깨웠고, 어찌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 있느냐고 호통 쳤습니다. 뱃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재앙을 만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요나는 어쩔 수 없이 이실직고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도망치는 바람에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점점 거세지는 풍랑 앞에서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에 내던지라고 하였습니다.
바다 속에 내던져진 요나는 물고기에게 삼켜졌고, 사흘 밤낮을 캄캄한 물고기의 뱃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안에서 참회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요나는 갇힌지 사흘만에 빛을 보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니느웨로 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 선포를 듣고 멸망을 면하기 위해 참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또 못마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어쩔 수 없이 선포하기는 했지만, 니느웨 사람들이 정말로 회개할지는 몰랐습니다. 아니 그들이 회개하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고 멸망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투덜댑니다. “제발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하고 불평합니다.
그렇게 불평하며 니느웨 성이 어찌 되나 지켜보고 있는 요나의 초막 위로 박 넝쿨이 자랍니다. 그 박 넝쿨이 만들어준 그늘 때문이 요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벌레 한 마리가 박 넝쿨을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박 넝쿨이 시들자 그늘은 사라지고 찌는 듯한 더위로 요나는 기진맥진해졌습니다. 요나는 다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습니다.” 그렇게 불평하는 요나를 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의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목적으로 기록된 한편의 소설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 보편주의를 일깨워줍니다.

이렇게 요나서 전체의 메시지를 충분히 새긴 셈이지만, 다시 오늘 본문말씀에 집중하여 그 뜻을 헤아리고자 합니다.
이미 본문말씀의 내용은 앞서 파악한 대로입니다. 니느웨에 회개 선포를 명받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명을 거슬러 배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는 도중 발생한 사태입니다. 본문말씀은 사실 16절까지 연장하여 한 단락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본문말씀은 편협한 자기세계에 갇힌 주인공 요나의 완고한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 그 태도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사태에 직면하여 서슴없이 자기부정을 감행하는 요나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렇게 자기부정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집을 버리지 못하는 주인공, 아니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메신저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주인공의 결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기회의 순간에 보여준 그의 결단은 끝내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된 것입니다.
본문이 전하는 상황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그야말로 철부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그렇고, 난리가 난 통에 배 밑창에서 태연하게 잠에 떨어져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의 아집과 태만으로 스스로는 편할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세상은 오히려 요동칩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는 예수님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입니다(마태 8:23~27). 예수님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의 원동력을 뜻한다면, 요나의 평화는 세상의 소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자기세계에 대한 집착 그 안에서 안위를 구하고자 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듭니다.
흥미롭게도 요동치는 배 한 가운데서 다른 선원들이 보여준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사려 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습니다. 침몰을 방지하려는 조치도, 풍랑을 잠재울 방법을 찾는 절차도(물론 오늘의 과학적 인식과는 다르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에게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처리하는 절차도 모두 사려 깊습니다. 결국 16절 결구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역시 요나의 상식을 거스르는 사태입니다.
그 와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주인공으로서 요나가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 순간 깨끗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기적’(마태 12:38~42)이라고 말했던 그 태도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거듭나게 하는 계기였으며, 동시에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팽팽한 긴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요나의 태도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요나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아집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긴장을 조성하고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거듭나는 태도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기회는 스스로의 깊은 내적 성찰 이전에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다가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뜻을 겸허히 새기고 받아들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도 스스로의 아집을 떨치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결단이 있었기에 요나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펼치고 전하는 예언자로서 위대한 몫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의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요 동시에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결정적인 결단 이후 그에 동반되는 부단한 극기 훈련의 과정이라고 할까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 여정을 너무나 실감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요나의 이야기는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우리는 환경주일을 맞아 특별히 지금 온 인류와 지구의 생명 모두가 처한 위기의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그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그 위기가 촉발된 것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기왕에 시작된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적 위기의 동인은 무엇이고, 그 현상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실체는 이른바 근대 이래 확고하게 자리 잡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로부터 비롯합니다. 그것이 위기인 것은 그 체제 자체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크게 말해 생태적 위기와 사회적 위기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생태적 위기는 기후위기로 대표되고 있거니와 코로나19 팬데믹 현상 또한 그 위기의 한 양상입니다. 사회적 위기는 사실상 인간적 삶의 방식, 곧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여러 차원을 함축합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전 세계적으로 두드러진 양상을 꼽자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차별과 혐오의 만연, 그 양상에 편승하여 나타나는 정치적 민의의 굴절과 민주주의의 퇴행 현상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위기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체제와 그 안에서의 삶의 방식을 단절하고 새로운 전환을 이루어야 하는 매우 절박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간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온 생명을 살리는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나의 기적이 요구됩니다.
물론 우리가 요나의 기적을 경험한다 해도 마치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긴 시간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의 방식이 유일한 것처럼 착각하고, 그것이 주는 혜택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관성을 쉽사리 떨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가 파멸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감한 결단을 하여야만 하며, 그 결단에 걸맞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간의 삶을 보장해준다고 믿었던 조건들에 매여 있는 세계에서 탈출하여 생태적 정의와 평화,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온 생명에 그 숨결을 부여해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절박하게 요구되는 몫입니다. 교회만의 자족적인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몫이 아닙니다. 드넓은 세상 한 가운데서 참 생명의 길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피조물들이 탄식을 멈추고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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