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 마태복음 28:16~2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7-11 18:44
조회
10781
2021년 7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본문: 마태복음 28:16~20



본문은 마태복음의 대미로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해 왔습니다. 바로 이 말씀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의식, 그것은 세상 어떤 사람들의 사명의식보다 더 투철합니다. 그 덕분에 전 세계에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존재하며,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 곳곳에 복음을 구현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1:8)은 또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은 ‘땅 끝까지’라고 함으로써 복음전파의 공간적 확장을 말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말씀은 ‘세상 끝 날까지’라고 함으로써 복음전파의 시간적 지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완전한 전파를 말합니다.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따라 많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동으로 서로, 북으로 남으로 저마다 나서서 분주히 움직입니다. 그 투철한 사명의식과 열정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한편 본말이 전도된 경우도 있습니다. 제국주의적 침탈을 정당화하는 방편이 되어버린 근세 서구의 선교 역사, 그리고 오늘날 교세확장에만 몰두하는 교회의 선교 현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씀 곧 복음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알맹이는 빠져버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교세확장이 곧 복음전파로 인식되고 있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경우입니다. 이처럼 뒤집어진 현상이 일어난 것은, 중요한 진실이 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진실은 본문말씀이 선포하고 있는 ‘세상 끝 날까지’, 그리고 그와 병행하는 ‘땅 끝까지’라는 말이 함축하는 의미 자체에 이미 반영되어 있습니다.

먼저 지리적으로 ‘땅 끝’을 정의하자면, 성서 시대에는 스페인을 말했습니다. 바울도 스페인을 최종 목적지로 삼았습니다. 세계관이 확장된 오늘날 땅 끝은 어디일까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오늘날 그 땅 끝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정된 영토 안에서나 그 끝과 시작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땅 끝의 의미는 단순히 지리적 경계의 한계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단 오늘 세계관이 달라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이미 성서가 기록될 때 역시 그것이 단지 지리적 한계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이 땅 위에 온전히 구현되는 궁극적 목표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복음이 이르지 못한 영역을 나타내는 의미였습니다.
본문말씀이 선포하는 ‘세상 끝 날’이라는 것도 확정 가능한 기계적 시간의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역시 복음이 온전히 실현되는 궁극적 목적을 뜻합니다. 온 세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전파, 복음전파의 목적은 말씀의 실현, 복음의 실현입니다. 그 진실이 망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끝 날까지 그 실현을 갈망하는 것은 아직도 복음의 구현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과연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새기는 가운데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 첫머리는 이렇게 상황을 묘사합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열두 제자가 아니라 열한 제자로 되어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 상황을 반영합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상황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원점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곳은 갈릴리의 한 산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된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복음서의 일관된 증언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께서 먼저 찾은 곳 또한 갈릴리였습니다. 본문말씀 역시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중심이요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중심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수탈당한 주변으로서 민중들의 삶의 터전 갈릴리가 복음의 원점이라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그 주변, 곧 민중들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세계교회는 이로부터 중요한 선교개념을 확립하였습니다. 과거 기독교왕국 시대의 선교개념이었던 ‘교회의 선교’ 개념에 대한 반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확립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교의 의미가 교회를 늘이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역사하는 것을 뜻한다는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선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상 가운데 구현되는 복음의 의미입니다.
오늘 세계교회는 이를 더욱 첨예화합니다. 2013년 한국 부산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에서는 ‘주변으로부터의 선교’ 개념을 채택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더욱 철저히 한 것으로, 복음의 요청에 대한 오늘 이 시대의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주변으로 간주되어 왔던 곳으로부터 비로소 선교가 이뤄진다는 진실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제까지 주변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 떠도는 이주민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원주민들,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떠밀린 여성들, 그리고 인간에 의해 그저 대상물 취급만 받아온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그 가운데서 선교의 역사, 곧 복음전파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인식입니다. 선교는 차별의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중심의 확장, 기존 지배질서의 확장을 통한 인간의 역사, 교회의 선교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떠받들어져왔던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세계인식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성입니다. 그것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애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깨워주신 진실입니다. 부활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난 사건은 그 진실을 환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첫머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산에 이르러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합니다. 성서에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시내산 정상이었고, 예수님께서 변화를 체험한 곳도 변화산상이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말하는 산은 어떤 곳일까요? 마태복음의 맥락에서 헤아리면 그곳은 곧 산상수훈이 선포된 곳을 뜻합니다. 사실은 갈릴리의 한 언덕이지만 마태복음은 그곳을 산으로 묘사하고 있고, 따라서 그곳에서 선포된 말씀이 ‘산상수훈’(‘산상설교’)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바로 그 산 위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 산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바로 그 복음의 원점을 다시 환기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요, 옳은 일에 헌신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축복의 말씀, 그것이 복음의 원형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현실과는 상반되지만, 그러기에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길을 제시해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곳이 바로 그 말씀을 선포한 자리입니다. 이것은, 그 자리에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들의 몫이 바로 그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는 진실을 일깨웁니다.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이뤄야 하는 사명입니다.

복음서의 맥락을 통해, 우리가 그 진실을 적어도 머리로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평소 언행을 통해 그 진실을 헤아리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 극적인 장면을 통해 제자들에게 새삼스럽게 환기되고 있는 사연이 무엇일까요? 어째서 굳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극적인 드라마 가운데서 그 사명이 환기되고 있을까요? 살아생전 선하고 의로운 삶, 절대적인 사랑을 베푸셨던 삶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긴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결의로 그치지 않고 어째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극적인 드라마 가운데서 그 진실이 환기되고 있을까요?
그것은 삶의 길과 죽음의 길 사이에 너무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삶의 길을 보았고 그 길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죽음의 길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 삶의 길로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죄와 구원을 대비하고, 십자가 사건 곧 죽음과 부활에 몰두한 사연이 거기에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인간의 현실을 극단화하여 죄에 매인 인간의 구원을 역설한 뜻은, 그저 병 주고 약 주는 방식이 아니라, 정말로 인간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자는 뜻입니다. 선하고 의롭게 살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려는 뜻입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통찰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한 대목(로마 6:1~11)은 특별히 그리스도인 됨의 한 표지로서 세례의 의미를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말씀과 한 실마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에 병행본문으로 제시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더불어 부활한다는 진실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로마 6:8) 죄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성을 함축한 이 말씀은, 그 주장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흔히 세례는 죄를 씻는 정화의식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그것은 죽음의 의식에 해당합니다. 물속에 빠졌다가 일어서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죽음에 이르게 만들 만큼 세상 죄의 완악함을 말합니다. 세상의 죄악은 모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듭니다. 자연적 질서 안에서 생물학적 개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으나 죽음과 다르지 않은 삶을 강요하는 죽임의 문화, 그 체제, 구조적 현실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매순간 죽음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모든 죽음을 극적으로 대표합니다. 역설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반면에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현실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을 방관한 사람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죽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죽음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을 한순간에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상의 악한 죄악을 깨닫고 그 세상과 절연하게 만드는 사건이 곧 부활사건입니다. 심연을 뛰어넘는 사건입니다. 그 때 더 이상 사람들은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비로소 사람들은 삶을 삶답게 누립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세상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극적인 드라마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점이 환기되는 것은, 삶의 길로서 복음이 죽음의 길과 그렇게 극적인 차이를 지닌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은 세상의 성장신화에 얼버무려진 번영의 신학을 신봉하는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온갖 세속적 욕망이 신앙의 이름으로 치장된 것과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도 좋다는 의식과 철저하게 단절을 선포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라 살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선포합니다. 그래도 타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존, 교회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타협의 실마리를 주지 않아도 타협하게 되어 있는 현실에서 만약 타협의 실마리를 용인하게 되면 복음이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이를 길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 궁극적 목적이 폐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불완전한 현실에서 끊임없이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과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여정에서 좌절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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