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회적 재난의 현실 한 가운데서 - 열왕기상 17:8~1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7-18 14:34
조회
10074
2021년 7월 1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회적 재난의 현실 한 가운데서
본문: 열왕기상 17:8~16



예언자 가운데 엘리야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예언서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민담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는 엘리야의 이야기는 그 주인공의 역할과 인간됨의 면모를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엘리야는 민중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예언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메시야의 다른 이름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로부터 엘리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마태 16:14 등). 오늘날까지도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라는 별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같은 이름의 영화 주제곡명이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그 제자 엘리사에게 그 능력을 물려줄 때 하늘에서 불 말과 불 전차가 내려와 엘리야를 데려갔다는 성서의 이야기(열하 2:11)에서 비롯됩니다. 엘리야가 메시야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연입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모두 인상적입니다. 불의 전차를 타고 승천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의 사제들의 물리친 이야기, 오늘 본문말씀인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일으킨 기적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 성격이 다 달라 보이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다시 들여다보면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예언자의 삶에서 체험되었던 다양한 삶의 면모들이기도 합니다. 그 사건들은 각기 다른 별난 체험들이라기보다는 올곧은 한 예언자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일련의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불의 전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뿐 아니라, 가슴에 불덩이를 안고 산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의 여정을 거꾸로 되돌아볼까요? 엘리야는 죽지 않고 불의 전차를 타고 하늘에 올랐고 장차 메시야로 다시 오리라는 기대를 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사람들의 기대를 안고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언제나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극심한 좌절과 실의에 빠져 삶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열상 19:4). 그는 도망자 신세로 떨어지기도 했으며 권력자로부터 ‘골칫덩어리’(‘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 열상 18:17)로 비방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 직전 상황입니다.
그가 그렇게 곤경에 처한 것은 바알 사제들을 물리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나면 승리의 열매를 거두어야 할 텐데, 엘리야에게는 거꾸로 더 극심한 고통과 좌절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어 했기에 늘 권력자와 당대 주류 세력에게 곤경을 겪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지만, 불의에 대한 분노의 결과는 늘 고통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권력자의 불의에 분노하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물리칠 수밖에 없었던 사연, 그에게는 영광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의 근본 동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이 그 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불의에 대한 그의 분노는 전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 도탄에 빠진 민중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의 과부집에서 일으킨 기적 이야기는 엘리야가 어떻게 민중들의 가슴 속에 메시야의 한 원형으로 기억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전해줍니다. 고단한 삶으로 지치고 스러져가던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로서 엘리야의 삶의 진정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요한 배경은 이스라엘과 인근 전역에 내린 가뭄입니다. 그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어 죽음 직전에 이른 과부와 그 아들의 집에 엘리야가 나타나 그들을 도탄의 상태에서 구해준 사실을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그 인근 전역에 내린 가뭄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요? 사르밧 과부 이야기의 문맥을 깊이 살펴보면 그 가뭄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민중들을 도탄에 빠트린 그 가뭄은 단순히 자연적인 재해로서 가뭄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뭄은 당시 북 이스라엘을 다스린 아합 왕의 통치 성격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기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절은 기원전 9세기 북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 아합 왕 시대입니다. 오므리 왕조 시대 북 이스라엘은 최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오므리는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펼쳐 유다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며, 대외적 교역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일찍이 선진문명을 누린 페니키아(시돈)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그 문물을 도입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페니키아의 풍요종교인 바알종교가 이스라엘 내부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습니다.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그 바알종교는 사실상 국가종교와 다름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허울 뿐 실질적으로 북 이스라엘을 지배한 것은 바알종교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성장을 통한 국가발전 전략을 택한 통치체제의 문제요, 사람들의 일상적인 가치관의 문제였습니다. 바알에 대한 숭배는 물질적 풍요가 그 사회의 최상의 가치관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합 왕이 부당하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사건(열상 21:1~29)도 그와 같은 배경 속에서 일어납니다.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고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살 길이 묘연해진 상황입니다. 그것이 기근의 실체입니다.

그 배경 속에서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경고합니다. “내가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17:1). 그것은 바알숭배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바알은 비와 자연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를 주관하는 그 신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엘리야는 경고합니다. 경제적 풍요가 오히려 빈곤을 낳고, 경제적 성장의 추구가 오히려 삶을 악화시킨다는 경고입니다. 그 경고는 곧 당시 현실이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하나님의 사람인 예언자 엘리야 자신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요단강 가에서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먹을거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아직 남은 시냇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명(시 147:9; 욥 38:41)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엘리야가 그들과 깊은 유대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목마르고 주린 사람으로부터 오히려 도움을 받는 그의 모습을 예고합니다. 시냇물마저 말라버린 이후 엘리야는 시돈 지역의 사르밧에 이르고 그곳에서 과부와 아들을 만납니다.
사르밧으로 들어간 엘리야는 땔감을 줍는 한 여인을 보고 마실 물을 청합니다. 절박한 목마름의 상황입니다. 여인은 순순히 물을 뜨러 움직이는데 염치 좋은 엘리야는 또 다른 청을 합니다. 먹을 것도 좀 갖다 달라 합니다. 기가 막히게 배고픈 상황입니다. 그 청을 받은 여인의 상황은 더 기가 막힙니다. 그 여인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빵 한 조각도 없거니와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뿐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밝히는 여인의 이야기는 더 기가 막힙니다. 그에게 남은 밀가루와 기름 몇 방울은 자기와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을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 절박한 상황을 전해 듣고도 엘리야는 뻔뻔한 요청을 합니다. 그 남은 것으로 만든 음식을 먼저 자기에게 갖다 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입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도탄에 빠진 민중과 하나님의 사람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그 상황에 매몰되지 않은 주인공들의 태도를 모순되게 겹쳐 놓고 있습니다. 먼저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한 줌의 밀가루와 몇 방울의 기름이 남아 있습니다. 희망의 근거가 다 사라진 것 같지만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를 뜻합니다. 인생이 바닥을 쳤다고 느낄 때조차도 자신의 삶을 떠받쳐주는 어떤 근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희망의 근거는 그렇게 남은 밀가루와 기름 곧 물질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먹더라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정한 희망의 근거는 스스로 절박한 상황에서도 역시 절박함을 호소하는 타인의 요청을 뿌리치지 않은 여인의 태도에 있습니다. 여인은 목마르고 배고픈 나그네에게 물을 떠 나르고 먹을 것을 건네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마치 굶주린 오천명 무리 가운데서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꺼내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 여인이 말하는 태도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그 나그네에게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말합니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17:12). 모든 사람이 바알숭배에 빠져 있는 것 같지만, 바알숭배의 본산지인 페니키아(시돈)에서조차도 그 숭배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의 존재를, 이 여인은 증거합니다. 그 여인에게 비가 내릴 때까지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여인 앞에 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여인이 지닌 희망의 불씨를 확인하고 살려내는, 사실상 기적의 촉매자로서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말씀의 단락만으로는 행복한 귀결로 끝맺음됩니다. 비가 내릴 때까지 그 여인은 죽음에 이르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혹독한 세월을 견뎌내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린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사실을 전합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과 대결 끝에 비로소 비가 내립니다(열상 18). 이 이야기는 가뭄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경제적 풍요가 오히려 빈곤을 낳고, 경제적 성장의 추구가 오히려 삶의 악화를 불러오는 현실, 그것이 곧 가뭄의 실체였습니다. 비를 주관한다는 바알에 대한 숭배가 극에 달했을 때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돌보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었을 때 비가 내렸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기적을 일으킨 엘리야의 이야기는 그 극적인 드라마의 절정에 앞선 예표와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구현한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근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곤경 가운데서 벗어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에 누구에게 가 닿아 있을까요? 사르밧의 과부일까요? 엘리야일까요? 어느 편에 시선을 두든 중요한 진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르밧의 과부에게서 우리는 풍요의 종교, 성장의 신화가 압도적인 현실 가운데서도 그 헛된 신화가 자신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는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염치 좋은 엘리야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과의 깊은 삶의 유대를 깨닫습니다. 곤경에 처한 과부와의 유대뿐이 아닙니다. 까마귀로 표상되는 피조물과의 유대를 포함합니다. 사회적 유대요 생태적 유대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깊은 신뢰와 유대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곧 사회적 기근을 넘어서는 원동력입니다. 그것이 기근을 불러일으킨 바알을 무너뜨리고 생명의 단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승리로 귀결되는 사건의 실체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위기 또한 심각한 기근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적 재난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재난입니다. 그 재난의 결과가 사회적 재난을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사회적 재난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 해법 역시 인간사회의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하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까마귀와 과부만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엘리야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 진실을 겸허하게 새기며 그 생명의 유대를 살리는 방안이 그 해법입니다. 허울 좋은 풍요 가운데서 승자독식의 질서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엄연한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해법입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엉뚱한 물음을 던집니다. “왜 철학자에게 작물 수확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하는가?”(<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일손이 딸려 작물들을 수확하지 못하는 사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게다가 또 다른 자연재해까지 겹치고 있는 상황에서, 팬데믹의 의미를 깊이 새기고 정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그저 옛 교훈이 아닙니다. 자연적ㆍ사회적 재난이 겹친 오늘의 현실 가운데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와 그 방향을 일깨워줍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유대, 그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진실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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