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택받은 백성의 몫 - 출애굽기 19:1~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8-08 16:19
조회
827
2021년 8월 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선택받은 백성의 몫
본문: 출애굽기 19:1~6



본문말씀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그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는 이야기의 첫머리에 해당합니다.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될 것이며 나아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될 것이라 합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신다는 말씀은 오경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주제일 뿐 아니라 성서 전반을 통하여 환기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문제를 두고 씨름해야 할 만큼(로마 11:25~32)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도 환기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타적 선민의식, 그리고 오늘 그와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여겨지고 있지만, 여기에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다는 점입니다(신명 7:7~8). 그것은 이스라엘의 어떤 우월한 능력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진 선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선택받은 백성은 그에 상응하는 몫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 계약이 아니라 쌍무적 계약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예컨대 예언자 호세아는 그 사명을 저버린 백성을 두고 ‘로암미’, 곧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포합니다(호세 1:9).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진실이 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기억되었지만, 선택받은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망각되었습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말해 줍니다.
본문말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선민이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무엇일까요? 본문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건의 첫머리입니다. 언약이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 말씀들은 십계명을 서두로 하여 일종의 법전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계약법전(출애 20:22~23:19)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이 밖에도 신명기법전(신명 12~26장), 성결법전(레위 17~26장)을 포함하고 있는데, 계약법전은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법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착시대 초기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성서의 문맥에서는 출애굽 여정 가운데 시내산에서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계약법전의 정신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 그 첫머리에 나오는 십계명(출애 20:1~17)입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백성, 곧 자유민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고 해방된 백성으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 도리는 여러 관계의 차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켜져야 할 도리로서 종교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두 번째는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서 윤리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물론 더 세분화해서 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는 직접적인 인간관계의 차원과 인간과 사물과의 차원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어쨌든 계약법의 정신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도리와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도리를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야 할 정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그 두 가지 차원이 온전히 이뤄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충족될 때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백성의 삶이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십계명은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계약법전은 그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규율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법전들 모두 그 내용과 형식상 고대근동의 대표적 법전들(주전 3,000여 년경 수메르의 관습, 주전 7세기의 함무라비 법전, 그리고 후대의 로마법)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고유한 역사와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이라는 해방의 사건이 기본 출발점입니다. 예컨대 고대의 모든 법전이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에 대한 보호규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대개 기존의 위계적 사회질서를 온존하는 범위 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반면 성서의 법전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한 형제라는 전제를 분명히 할 뿐 아니라 특별히 약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를 하나님의 친권 행위라는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의 법전이 지닌 그와 같은 성격은 이집트에서의 억압과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 함축하고 있는 정의를 이룰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선민이 되어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본문말씀은 선포합니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가교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동시에 사람들의 염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선민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진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망각되었습니다. 다들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만 기억하였을 뿐, 진정한 선민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망각하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 곧 왕과 제사장들도 그 진실을 망각했고, 수많은 백성들도 그 진실을 망각했습니다. 그 진실이 망각되었을 때 그 진실을 일깨운 사람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제사보다도 정의를 외쳤습니다. 제사에는 열심이지만 정의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질타했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도 그 진실은 망각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민족들 사이에 이뤄야 할 정의와 평화의 사명을 망각하고, 오히려 정의와 평화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마침 저 지난 주간에 책이 한권 출간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맞서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책갈피, 2021). 20년 전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출판사가 그 서평을 발견하고 표지에 인용하면서 책을 보내 왔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오늘의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안다면, 광장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광기서린 목소리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도된 선민의식은 세상의 근심거리일 뿐입니다. 정의를 해치고 평화를 해칠 뿐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가능합니다.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배척하는 의식과 태도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태도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역행하는 것입니다. 오도된 선민의식이 초래하는 결과입니다. 교회가 이익집단이 되어 버리고 권력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밤낮으로 기도하고,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언약을 지키는 백성이라야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스스로 선택받은 백성이라 자처한다면 스스로의 잘남을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겸허하게 이 땅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민족이든, 어떤 집단이든 늘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주체로서 자신을 의식하는 불가피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에의 몰입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나의 나됨은 불가불 타인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는 철저하게 그 점을 강조합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처지에 함께 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라고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오늘 현실에서 우리의 교회, 우리의 사회가 되새겨야 할 진실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이미 앞서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오늘 한국사회는 한편으로 볼 때 자랑거리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단기간 내에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것에 대해서 세계인들이 놀랍니다. 게다가 한류로 지칭되는 문화적 저력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명암이 너무나도 극적으로 대비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고 그것을 완화할 효율적인 분배체제 또는 복지체제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기본권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한 채 목숨의 위협 가운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차별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발전한 나라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전 세계에서 성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후변화로 전 세계가 위기를 겪고 있는 와중에 탄소중립을 향한 여정은 더디기만 합니다.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이 가시화되면서 탈원전의 공감대가 높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방해하는 세력의 목소리가 여전히 높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목록을 열거해야 하겠습니까?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여전히 분단체제하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다가 발전한 나라가 된 한국사회가 세계에 기여할 몫이 무엇일까요?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그 뜻은 언제 새겨도 좋습니다. 한국 현대사가 겪었던 그 경험의 반전을 이뤄내야 하지 않을까요? 약자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정의와 사회적 연대, 억압에 맞서 싸워 일궈낸 민주주의와 인권의 고양, 이념과 체제의 대립을 넘어선 평화의 실현,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처구니없는 배타의 논리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나라 걱정하는 듯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위기요, 그 위기로 강퍅해져가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교회가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을 실천하고 그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몸과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선택받은 백성이라 감히 자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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